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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Oct 26. 2022

온종일 탁구장에 사는 남자

모두 자판기 앞으로! 





꼴깍! 


나는 마른침을 삼킨다. 

그가 서브 동작에 들어간다. 나는 리시브를 준비하는데 먼저 백으로 길고 빠른 회전 서브를 대비한다. 긴 서브를 감안하고 짧은 서브까지 수에 넣는다. 우선 긴 서브를 대비하고 짧은 거까지 차례로 계산하는 것이다. 서브가 길면 백으로 때릴까 아니면 돌아서서 포핸드로 넘길까? 짧으면 플릭 할까 아니면 흘리기로 받을까? 준비의 수가 늘어날수록 머리가 복잡해진다. 어디까지 감안해봤니? 일단 서브 넣는 라켓을 보고 길든 짧든 반응해야 해. 그의 서브 동작은 특히나 빠르다. 빨라서 짧은 건지 긴 건지 분간이 얼른 되지 않는다. 라켓이 잘 보이지 않을 때는 별수 없이 나오는 공 구질을 봐야 한다. 어라, 짧은 볼이네? 나는 다급히 다른 수를 접고 포핸드 짧은 서브를 받으러 퍼뜩 다가간다. 아뿔싸, 커트인 줄 알았는데 너클이네. 밑으로 받쳐 들었더니 공은 네트 위로 붕 뜨고 만다. 내 마음은 네 박자로 진행된다. 젠장 / 젠장 / 제발 / 제발. 붕 뜬 공을 그가 냅다 갈겨버린다. 여지없다. 다시 네 박자, 쳇 / 쳇 / 젠장 / 젠장. 아아~ 저 놈의 서브를 못 받겠다. 긴 건가 싶으면 짧은 거고 짧은 거다 싶으면 너클이고, 정신이 없다. 이런 기술은 대체 누가 가르쳐 줬을까? 이른바 타이밍 뺏기. 코치님이 알려 주었나. 내가 레슨을 받을 때는 그런 거 안 가르쳐 주던데 내게는 안 가르쳐주고 그에게만 알려줬나. 


나는 왜 서브부터 허둥대지? 

그는 완전 초보였는데, 너무 초보라 내 밑에 아예 보이지도 않았는데, 몇 부세요? 물으면 부수 그런 거 없는데요, 라고 말하던 그다. 게임 중 돌아보니 주변에 지켜보는 이들이 많다. 내가 밀리자 응원하는 이들이 늘어난다. 죄다 그를 응원하는 쪽. 나는 악의 축이고 그는 환호성을 받는 주인공이다. 약자가 강자를 꺾을 때 더없이 환영받는 현실. 나는 이마에 진땀을 훔치며 자세를 숙인다. 힘 빼고 자세 낮추기. 리시브가 안된다. 예측할 수가 없다. 보고 움직이면 반박자 늦어. 약자가 강자를 꺾으면 반대로 그가 강자가 되고 나는 약자가 되는 걸까? 나는 왜 막연하게 마음을 놓고 있는가? 대충 해도 이기겠지 하는 마음. 자만심. 건방짐. 언제까지나 내가 강하다, 라는 오만한 마음. 설마 지겠어? 하는 의구심. 의문 뒤 해답은 질 수도 있다, 인데 나는 왜 질 거라 한 번도 생각을 안 했는지... 때가 왔다. 지금이야말로 내가 그에게 쓰러지는 첫 순간. 그가 등 뒤에 바짝 따라붙을 동안 뭘 했나 하는 후회. 이어지는 네 박자의 탄식. 어휴 / 미친 / 젠장 / 젠장.




토요일 아침 9시. 


탁구장에 들어서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도 없겠지 했는데 누군가 있네? 연습실에서 홀로 서브 연습을 하는 남자. 경두 형이다. 오십. 짧은 스포츠머리. 탁구장에 어느 때고 방문해도 늘 보이는 남자. 상주하는 남자. 그는 집이 있는가 없는가?  


금요일 저녁 7시. 탁구장에 갔는데 역시 경두 형이 보였다. 지난 명절에도 탁구장에 갔는데 경두 형이 있었다. 저녁이거나 휴일이면 늘 탁구장에 있다. 아예 탁구장에서 사는 사람. 없겠지 하면 있는 사람. 있겠지 하면 여지없이 있는 사람. 있고 있어서 지폐까지 많은 사람. 지폐가 많아서 늘 음료수를 사는 사람. 음료수 내기를 좋아하는 남자. 툭하면 "자판기 앞으로!"를 외치는 남자. 


나는 주변에 친한 이들과 경두 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무래도 집이 없으신 거 같아."


"그러게. 종일 탁구장에서 살고."


"뭐하는 사람이래? 혼자 사나?"


"직장은 이 근방인데, 집이 여기서 엄청 먼가 봐."


"집이 그렇게나 멀어? 근데 왜 여기까지 다닐까?"


"듣자니 집에 가족이랑 사이가 안 좋다나 봐."


"대학 때 학생회장 출신이라던데?"


"뭐! 정말?"


우리는 타인의 사생활에 대해 논할 자격이 있을까? 

그것도 이렇듯 세세하게? 물론 없다. 없어서 속삭인다. 소곤소곤 누가 들을세라 쫑알쫑알 댄다. 한 명씩 어디서 주워들은 정보를 하나씩 꺼내놓으니 경두 형은 그야말로 특이하고 특이한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모두 사실일까? 학창 시절 회장 출신이라? 그러면 엄청 자기주장이 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일 텐데... 그러고 보니 경두 형은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마주 보면 꼭 째려보는 것만 같다. 게임할 때 그의 얼굴을 보면 마치 싸우는 투사 같다. 내가 일구일구에 희비가 교차하여 탄성을 내지르거나 아우~ 아까워, 한다거나 뭔가 리액션을 취하면 여지없이 그는 픽! 웃으며 뭘 그거 갖고 그리 요란을 떠느냐, 하며 대수롭지 않게 바라본다. 그 앞에서 나는 아주 작은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사람이 된다. 아유~ 요 쫌생이 같은 남자. 나는 어느덧 쫌생이가 되어 바들바들 떨면서 서브를 기다린다. 음료수 내기. 경두 형과 게임을 할 때면 으레 음료수 내기가 걸리곤 한다. 그러고는 본인이 지면 "모두 자판기 앞으로!"를 외치며 주변 테이블 사람과 관중석까지 챙긴다. 원래는 심판까지 해서 3개 정도만 사면 되는데 경두 형은 열몇 개를 사는 것이다. 그러고는 탁구장 건물 옥상으로 가 야심 차게 담배를 피운다. 


"캬~이맛이지. 바로 이맛 때문에 내가 탁구 치는 거잖아."


경두 형은 기왕 올라간 김에 서너 개비를 피우고 내려온다. 담배냄새가 진하게 난다. 아아~ 저 남자다운 냄새. 경두 형, 근데 주말에는 제발 가족이랑 좀 지내, 라고 말하고 싶다. 가족이랑 취미가 얼마나 다른지 나는 모른다. 게다가 나는 사생활에 간섭할 자격이 없다. 다만 탁구로 간섭할 뿐이다. 기습 서브를 넣고 단박에 3구 스매싱을 날리거나, 오래도록 연마한 드라이브를 날리거나, 이기거나 지거나 그렇게 우리는 탁구로 대화한다. 형, 정말 그럴 거예요? 하면서 내가 스매싱을 날리면 경두 형은 어디서 감히, 라면서 카운터로 맞받아친다. 카운터가 허공을 갈라도 그는 곧바로 공 주으러 돌아서지 않는다. 두어 번 연신 헛스윙을 날리고서 이 정도 궤도인가? 연습 후 뒤돌아 공을 줍는다. 지금은 헛방이지만 다음엔 헛방이 아니다, 라는 결연의 투쟁이다. 




3년 전 경두 형은 탁구에 '탁'자도 모른 채 탁구장에 등장했다. 


왜 여기로 왔어요? 처음 물었을 때, 단지 직장과 가깝다는 이유를 댔다. 탁구에 탁자도 모르는 이가 일주일 내내 레슨을 받고 거울을 보며 섀도 스윙을 하고 늦은 밤까지 연습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탁구에 탁자를 아는 이에게는 그야말로 쨉도 안된다. 정말 안되었다. 탁자를 먼저 배우고 오시오, 라며 나는 스매싱, 드라이브를 날려주었다. 그는 처음부터 곧바로 공을 주으러 가지 않았다. (공이 멀리 날아가도 섀도 스윙을 해보고 주으러 간다) 그것은 그만의 자존심이리라 여겼다. 오늘은 안되지만 내일은 되리라 하는 다짐. 그러나 보통의 자존심이라면 한두 달 버티다가 이탈하기 마련. 탁구의 탁자도 모르는 사십 대 후반이 탁구장에 적응하기란 그야말로 별따기 그 자체. 탁구장은 이미 그들만의 세력이 형성된 경우가 많다. 그들만의 세력은 새내기를 반기지 않는다. 관장님이 나서서 이 분이랑 한 게임 쳐 주세요, 라고 말해도 한두 번 응하다가 만다. 그러면 초보는 누구라도 붙잡으려고 두리번거린다. 과연 누구를 붙잡고 버티나? 집념의 남자, 경두 형은 거울을 붙잡고 버텼다. 포기하지 않았다. 게임하다가 담배 피우러 따라가고 게임하다가 음료수를 샀다. 그렇게 왕초보 10부가 저 안쪽 1부들이랑 어울렸다. 탁구장 중간 즈음에 나를 비롯한 중간 부수들이 중간 테이블에서 열심히 탁구를 치는데 그는 곧장 맨 안쪽 1부 테이블로 건너뛰어 심판을 보고 게임을 했다. 재미가 있을까? 싶었다. 맨 안쪽 세력들은 부수별로 한 두 명씩. 특 1부, 1부, 2부, 3부, 4부까지. 그들의 공통점은 죄다 담배 쟁이라는 거. 탁구 몇 게임하고 자판기 커피를 받아 옥상으로 집합한다. 옥상에는 정원이 잘 꾸며졌는데 한쪽에 원형 테이블과 의자가 여러 개 있다. 거기에 앉아서 예쁜 풍경을 내려다보며 담배 일발 장전을 하고 조금 전 게임 이야기를 나누며 낄낄거리는 것이다. 호로록. 캬~ 오늘따라 커피가 참 맛나다. 따뜻하고 달콤한 커피 한 모금. 그리고는 담배 한 모금 스읍 빨아 마시고, 휴우~ 바로 이 맛이지 하면서 길게 내뱉는다. 저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같이 피우니까 더 맛나다, 하고 말하면서 하얀 연기를 내뿜는다. 서로의 연기를 보며 또 킬킬거린다. 정답구나. 자, 하나 더 피워라. 어이쿠 담배값도 비싼데 땡큐~ 그들만의 세상이다. 나눠 피우고 같이 피우고 담배 피우는 사람이 드문 오늘날, 거리 한쪽에 커다란 빌딩. 제일 위층 옥상. 아무도 안 본다. 옹기종기 그들이 모였다. 모여서 몰래 피운다. 자기들끼리는 몰래가 아니다. 엄연히 흡연장소다. 담배 피우라고 조성된 공간. 이런 곳이 어디 있겠니? 담배 피우는 패거리. 패거리 외엔 올라가지 않는다. 패거리가 경시되는 사회이지만 여기는 패거리만 존재하는 땅이니 어쩐지 당당하다. 담배 안 피우는 사람이 없네? 여긴 다 담배 피우는 사람만 있다. 언제고 음료수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중 정신 차려보니 옥상이었다. (따라 올라감) 그때 본 옥상 정경이란...

 

야! 담배 피우러 가자, 고 경두 형이 외치면 다 같이 우르르 따라간다. 역시 학생 회장님 출신이라니까. 




3년이 지난 현재. 

경두 형은 몰라볼 만큼 실력이 좋아졌다. 벌써 지역대회에도 몇 번 출전했다. 경두 형과 붙으면 그만의 날카로운 회전에 마치 1부, 2부랑 붙는 착각이 느껴질 때도 있다. 역시 사람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해. 서당개 3년이면, 끼리끼리 어울리면, 끼리끼리 물들듯 경두 형은 고수처럼 변한 면면이 있었다. 아직 완연한 고수는 아니지만 매일같이 고수를 상대하느라 그만의 스킬이 뾰족뾰족하니 돋았다. 평균적 테두리는 아직 7부 정도이지만, 어떤 공은 1부, 2부처럼 날카로웠고 또 어떤 공은 7부, 8부처럼 엉성하기도 했다. 컨디션에 따라 그의 실력은 둘쑥날쑥 한다. 그리고 어떤 패턴에 따라 노련한 공과 어설픈 공이 나온다. 잘못 걸리면 지는 거다. 역시 열심히 하는 자에게는 못 당하는가? 나는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한다. 나는 수년 전에 담배를 끊은 처지다. 나는 담배를 끊어서 고수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형편이다. 나는 왜 담배를 끊었나? 탁구로 땀 흘리고 나서 피우는 한 모금이 제법 달콤할 듯한데, 그들과 좀 더 친해졌더라면 내 실력이 여태 이렇진 않을 텐데, 좀 더 많이 붙어봤을 테고, 좀 더 많이 다듬어졌을 텐데, 하는 회한이 아주 조금씩 일기도 한다.




나는 안다. 

오직 여기, 여기만이 그들의 안식처라는 것. 이곳을 벗어나면 그들은 각기 외로운 세상사를 혼자서 감내해야 한다. 혼자 숨어 피워야 한다. 혼자이기에 두리번거린다. 눈치를 본다. 담배 냄새에 찌그러진 얼굴이 된다. 알고 있습니다. 냄새 심하다는 거.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거. 흡연자가 발붙일 공간이 점점 줄어든다. 언제면 활짝 웃을 수 있나? 여기에 올 때까지 줄곧 참아야 한다. 피우고 싶어도 피우지 못하고 웃고 싶어도 웃지 못한다. 아무데서나 그냥 피우면 이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반드시 탁구를 치고 땀 흘리는 상태에서 자판기 커피를 준비해 놓은 상태에서 딱 피워야 한다. 그리고 여럿이 동시에 불을 붙여야 한다. 그래야 맛이 난다. 바로 이 맛이, 쾌감, 단지 같이 피우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탁구장으로 온다. 매일 옥상을 그리워한다. 


고등학생 아들이 탁구장 인근 학원에 다닌다고 했다. 

아들이 선호하는 학원이라고 했다. 그래서 집 가까이가 아니라 굳이 이 먼데까지 데리고 온다고 했다. 아들의 학원은 늦은 시간까지 수업한다. 수업이 끝나면 아들을 데리고 집에 간다. 그래서 아들이 학원에 머무는 시간 동안, 그는 머무를 곳이 필요했다. 어디가 좋을까? 둘러보다가 탁구장이 눈에 띄었다고 했다. 이후 아들을 학원에 데려다주고 그는 탁구장으로 왔다. 탁구장에 와서 탁구를 치고 배가 고프면 식당에 가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다시 탁구장에 와서 탁구를 쳤다. 탁구를 치면 체력소모가 크다. 중간중간 커피랑 담배를 피우며 피로를 날려주어야 한다. 휴우~ 아빠라면 이 정도쯤이야~ 3년이 지나고 아들은 집 근처 학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이제 아들이 없는데도 그는 탁구장에 온다. 탁구장에서 탁구 실력을 연마하기 위해 거울을 보며 스윙 연습을 하고 탁구 로봇과 타격 연습을 한다. 그리고 게임 뒤 짬이 날 때면 담배를 피운다. 50세 전후의 남자들. 50이 되지 않았거나 넘었거나 그 근방의 중년들. 그들이 쉬는 곳은 집이 아니다. 탁구장 위, 옥상 정원, 


올해도 그곳에 봄바람이 분다.      


차분하게 받자. 

한 발짝 더 물러서서. 천천히 다가가자. 

역회전 서브만 커트를 많이 먹는다. 그 외 짧은 서브는 모두 플릭으로 받는다. 긴 서브는 쇼트다. 길면서 하회전이 섞인 건 슈트로 흘린다. 이것만 기억하자. 나는 경두 형의 서브를 받기 위해 오늘도 마인드 컨트롤에 들어간다. 네 박자만 생각하자. 


잘 받자 / 잘 받자 / 젠장 /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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