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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Apr 08. 2020

전설 속 그녀 '퀸'이 나타났다

회장님 부회장님 산행대장님 무사하세요?

산에 가지 못한 지 어언 석 달째. 작년 비슷한 시기에 두 곳의 산악회에 가입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가기에 최소 달에 두 번은 산에 가리라 결심했다. 요즘의 산악회를 통한 등산이란 더러 체력증진이라든지 호연지기의 연마는 덜하지만 어쨌든 산에 가면 기분이 좋아지기에 산에 가려는 꾸준함을 위해 산악회 활동을 시작했다. 혼자나 지인과는 아무래도 멀리 떨어진 산에 갈 기회가 일회성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전히 등산을 좋아하는 취미를 가진 이들을 만나기엔 산악회만큼 좋은 곳도 없다. 그렇게 시작한 등산인데, 한 산악회에 가입하고 얼마 지나서 않아 겪은 에피소드를 간단하게 소개해 본다.     




산악회에 가입하고 두 번의 정기산행을 다녀왔다. 산악회는 보통 한 달에 한 번 정기산행을 가고 격주로 비정기 산행을 삼삼오오 번개 식으로 모여 가기도 한다. 그날은 딱 다섯 명만 모여 비정기 산행을 하러 갔다. 나는 산악회 회장님이 직접 운전하는 승용차에 올라탔다. 회장님은 친절한 사람이었다. 드넓은 이 바닥에서 우리의 인연은 무척 소중한 것이라며 볼 때마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두드려주거나 악수를 청하였다. 그의 손은 참 따뜻했다. 또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운전석의 회장님은 마흔아홉이었고 바로 옆 조수석에는 마흔여덟의 남자 부회장님이 늘 그렇듯 열심히 회장님을 보필하였다. 그리고 부회장님의 뒤에는(흔히 사장님이 앉는 운전석 대각선 뒷자리) 자칭 타칭 산악회의 뉴페이스라고 불리며, 보헤미안 랩소디를 부른 프레디 머큐리의 퀸이 아니라 산악회에서 쓰는 닉네임이 ‘퀸’인 여성이 앉았다. 여성은 누군가 나이를 물었을 때 바로 대답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그래서 나 역시 그녀의 정확한 나이를 몰라 몹시 궁금해하던 차, 누군가 전하길 그녀 스스로 서른몇이라고 말을 꺼내다 얼버무리는 화법에 하마터면 삼십 대라고 생각할 뻔했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불혹의 오로라 기운이 피부 표층 깊숙이 박혀 단단한 석고 화장에도 불구하고 삶의 구력이 은은히 드러나고 있었다. 부회장님의 말로는 그녀가 우리 산악회 창립 이래 최고의 미모라고 했다. 그런 그녀의 왼쪽에는(뒷좌석의 중간) 마흔여섯의 산행 대장님이 앉았고 그의 왼쪽, 그러니까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는 신입인 내가 자리한 터였다. 처음에는 온전히 나를 위해 운영진의 핵심들이 몸소 나섰나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회장님 부회장님 산행 대장님은 오로지 ‘퀸’님을 위해 오늘의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뒤에 전해 듣기로 퀸님은 운영진의 유력한 한자리에 스카우트될 타이밍이라고 했다. 나는 그저 과자를 먹다 남은 찌꺼기, 과일로 치면 꼭지, 딸기로 치면 이파리, 밥으로 치면 쭉정이 같은 존재였다.      




남자 넷에 여자 하나. 그녀의 야릇한 향수 내음이 차 안을 진동시켰다. 뒷자리 가운데의 산행 대장님이 불쑥 그녀에게 물었다.

“결혼했어요?”

의외로 그녀는

“아니요”

라고 답했다.

결혼했냐는 질문에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 나이가 새파란 이십 대에 비해서 지긋하지만 삼사십 대의 경계선에 있는 여자는 결혼한 여자일 수도 있고 돌아온 여자이거나 화려한 싱글일 수도 있다. 이것은 물론 산악회라는 특수성에 기인하여 나의 편견이 다분히 담긴 기준이다. 내가 처음 산악회에 갔던 날에는 사오십대가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달에 하루 정도는 가정에서 빠져나와 취미가 같은 사람들끼리 정답게 산에서 스트레스도 발산하고 긍정 에너지를 충전하려고 왔구나 했다. 그러나 웬걸 내 앞에 가던 동기 신입 회원이 돌아보면서

“저기 앞에 가는 분들, 다 싱글이래.”

그 말을 듣고 입이 딱 벌어졌던 경험 때문이다. 다들 외로워서 산에 왔구나. 산에서 도시락을 먹고 하산주를 건배하는 건 산을 위한 게 아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행 대장님은 질문의 균형을 맞추려는 듯 내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머피 님은 결혼했지요?”

나는 천만분의 일초 정도를 망설이다가 힘없이

“네”

라고 대답했다. 산행 대장님은 당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깝네요. 결혼 안 했으면 여기 이 자리에서 소개해 주는 건데.”

산행 대장님의 아깝다는 말에, 나는 어찌하여 갑작스레 아까운 걸 놓친 사람이 되어버렸나, 의아했다. 


차가 출발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하늘은 맑았다. 햇빛이 강하게 내리비치지만 차창의 선팅에 가려 얼굴까지는 침투하지 못했다. 햇빛을 받지 않은 얼굴 다섯은 바깥보다는 실내에 집중했다. 일순 대화가 끊기자 부회장님은 부회장님답게 분위기를 띄우려고 모자를 뒤로 돌려쓰며 말했다.

“덥네요. 회장님! 에어컨 좀 빵빵하게 틀어주세요.”

그러자 회장님은 그야 뭐 조금도 어려운 것 없지, 라는 표정과 함께 우아한 손길로 톡! 에어컨을 켰다. 지켜보던 부회장님은

“좀 더 시원하게 자연 바람까지~”

읊조리며 ‘외부 공기 유입’ 버튼을 눌렀다. 금세 차 안은 쾌적하니 시원해졌다. 갑자기 퀸님이 에어컨을 틀 때는 차단 버튼을 눌러야 한다며

“그런 것도 모르세요, 부회장님~❤”

이라며 ‘님’이라는 끝말을 고혹한 말투로 늘려 불렀다. 부회장님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굵은 손가락을 가져가 톡! 하고 차단 버튼을 눌렀다. 공기는 계기판 표시처럼 뱅글뱅글 차 안에서만 돌기 시작했다. 회장님은 특유의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어이쿠, 퀸님은 미모도 미모지만 어찌 이리 섬세하실 수가 있어요?”

라며 칭찬을 하고 부회장님을 돌아보면서

“여보게, 부회장! 자네는 조수석에서 앉아서 그런 것도 모르나!”

하고 핀잔을 주었다. 부회장님은 살짝 얼굴을 붉히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뭔가 만회할 게 없을까, 궁리하다가 그래, 이게 있었지! 무릎을 '탁' 치더니 발치에서 비닐봉지를 꺼냈다.

“회장님, 일단 맥주 한 캔씩 돌릴게요?”

그러고는 캔을 하나 꺼내 따그닥, 시원스레 뚜껑을 따 빨대를 꽂았다. 부회장님은 빙그레 금니를 번쩍이며 운전자인 회장님만 빼고 퀸님과 산행 대장님과 내게 맥주를 건넸다. 자신도 따그닥! 잘도 쪽쪽거렸다. 회장님은 운전대를 잡고 쩝쩝 입맛만 다시다 부회장님이 내민 사이다를 벌컥벌컥, 꺽~소리 내며 들이켰다. 그러다 곧 회장님은 차를 갓길에 세웠고 산행 대장님에게

“자리 바꾸자”

말하고 캔맥주를 뺏어 들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양보의 뜻으로

“회장님 제 자리에 앉으시죠?”

하고 자리를 권했으나 회장님은 부득불 가운데 자리에 앉겠다며 퀸님과 나 사이에 비집고 들어왔다.


이제 운전대는 산행 대장님이 잡았고 그를 뺀 모두가 음주를 즐기게 되었다. 부회장님의 비닐봉지에서는 맥주 캔이 무한정 공급되어, 다락방처럼 아늑한 차 안은 곧 시끌벅적 술판으로 변했고 모두 산에 도착하기도 전에 얼큰하게 달아올랐다. 목청도 한결 커졌다.

“회장님! 회장님은 그게 문제라고요.”

부회장님이 말하자,

“뭐? 이봐. 부회장, 자네 취했나? 꼴랑 맥주캔 몇 개에?”

라고 회장님이 응답했다.

가만히 보니 부회장님은 홀로 소주 팩을 꺼내 한 모금 쭉 빨고는 소주가 채 목구멍으로 넘어가기 전에 서둘러 캔맥주를 쪽쪽 빨았다. 이른바 급조된 셀프 소맥이었다. 부회장님이 살며시 소주 팩 하나를 건네자 회장님도 얼씨구나, 바로 옆 퀸님의 향수 냄새에, 화장품 향에 취기가 달아올라 연신

“위하여!”

를 외쳤다. 회장님과 부회장님은 미모의 그녀, 닉네임 ‘퀸’님에게 관심받고자 하였고 연이어 그녀의 행태를 칭찬하였다. 그녀가 어떤 행태를 했는지 나는 모르지만, 퀸님은 어느새 칭찬받기를 즐기고 있었다. 어찌 그리 예쁜가, 라고 칭찬하자 어머, 무슨 말씀, 회장님도 동안이세요, 부회장님의 팔근육은 너무 우람하네요, 한번 만져봐도 될까요, 따위의 답으로 어느 순간 이들은 칭찬에 칭찬을 더해 아직 몸은 차 안에 있건만 벌써 마음은 산으로 들로 아주 오랫동안 풍랑을 함께 한 동지처럼 전우애가 최고조에 이르기에 이르렀다. 나와 산행 대장님은 그저 맞장구만 치고 있었다. 그녀는 오호호호, 웃더니 빨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회장님~근데 최근에 연애하신 적 있어요?”

그러자 회장님은 손으로 머리 한쪽을 귀 뒤로 가지런히 손가락 빗을 만들어 착착 넘겼다.

“음, 그게 말이지.”

어느새 회장님은 퀸님에게 중후한 목소리로 흡사 오빠가 동생에게 옛날 얘기를 들려줄 것처럼 입맛을 다셨다. 그녀는 회장님을 보면서 코맹맹이 소리로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세요?”

라고 물었다. 그녀의 그런 물음은 내가 듣기에, 어서 나 같은 스타일이 최고라고 냉큼 칭찬해주란 말이야, 라고 들렸다. 회장님은 바로 옆 지척의 그녀를 돌아보다가 가까이 마주 보기에는 여기 차 안에 다른 사람도 있으니 부담스럽다는 얼굴로

“허허허, 스타일이라, 그야 물론.”

하고 너털 미소를 흩뿌리고는 이제 우리 퀸님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할 차례라면서

“작년에 들어온 민들레 님이라고 있었는데 정말 잡초 같은 분이셨지.”

라며 그윽한 표정으로 본격적인 연애 이야기를 시작할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뽀오오옹~!" 하고 마치 어린아이의 볼 풍선에 손가락으로 누를 때처럼 미세하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마무리로 "뽁 뽁 뽁~!" 하고 짧은 파열음이 뒤따랐다. 순식간의 사태에 좌중은 고요했다. 소리는 퀸님에게서 나온 소리였다. 그녀의 자세는 시트 위에서 무릎을 세우고 두 팔로 다리를 감싸 안은 상태였다. 위험한 자세. 돌연 무엇이 터져 나온다면 즉각 컨트롤하기 힘든 자세였다. 나는 숨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어떡해야 하나 멍하니 차 천장을 바라봤다. 가뜩이나 존재감이 없었는데 여기서 존재감을 드러내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다리를 잡고 손 한쪽에는 맥주캔이 들려졌으며 반복적인 타이밍에 한 손은 입으로 나머지 손으로만 다리를 잡고 버티는 불안정한 형태였다. 그러다 차의 덜컹거림에 순간 긴장을 놓았을 터. 아주 짧은 순간. 어색한 적막이 차 안의 사람들을 후려쳤다. 앞을 보니 운전대를 잡은 산행 대장님의 팔에 굵은 실핏줄이 꿈틀거렸다. 대각선 조수석의 부회장님도 뒤를 돌아보다 옆으로 튼 자세 그대로 굳어 한 치의 움직임이 없다. 자세히 보니 맥주 캔에 꽂힌 빨대 안에서 맥주가 빨려 올라가다 호흡마저 정지된 듯 중간에 멈춰서 있었다. 나는 차마 오른쪽 회장님을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요하다. 웃으면 끝장이다. 다시는 그녀와 대화조차 나누지 못할 것이다. 절대 못 들은 척해야 한다. 산악회 사람들이 퀸님, 역시 퀸님의 미모가 최고라고 입을 모으는 존재가 아니던가. 나는 아직 신입이다. 나의 뱃살은 등산을 원한단 말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온전히 숲의 치유에 몸을 맡기고 흠뻑 피톤치드를 마셔 심신을 회복하고픈 생각이었다. 그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뽀오~~"소리가 시작된 순간부터 슈퍼컴퓨터보다 빠르게 앞뒤 정보를 취합하여 계산했다. 나는 왜 여기에 앉아 있는가. 아까 친구 놈이 탁구나 치자고 할 때 탁구나 쳐야 했다. 집에서 마누라는 내 걱정을 하고 있을까? 우리 남편이 한 달 동안 속세에 썩다 잠깐이나마 산세에서 깨끗이 정화되어 돌아오시려나.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나의 등산 생활은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산악회는 어떤 이들의 집합체일까! 운영진은 참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술이 깨 번쩍 정신이 들었고 그녀가 낸 그 소리는 어떤 청량제보다 효과가 좋았다. 이제 그녀는 어떻게 대처할까?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산악회를 대표하는 여신의 위치에 오른 당신이다. 나 또한 처음엔 시큰둥했지만, 부회장님이 퀸님이라고 카페에 검색해보라는 말에 혹해, 잠이 쏟아지는 휴일임에도 여기까지 버티며 산악회는 좋은 곳이구나, 아주 약간은 설렘 때문에 따라온 바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죽을죄를 지었구나. 그 죄가 절대 가볍지 않음을 이렇게 알게 될 줄이야.      

그러나 가장 시급한 문제는 당장의 상황을 슬기롭게 넘기는 것이다. 평소 그녀를 선모 하던 회장님, 부회장님, 산행 대장님은 저마다 때는 지금이다 싶어 머리를 굴렸다. 위기에서 그녀를 구해야 한다. 그들은 머릿속으로 화두를 급히 딴 곳으로 돌릴 묘책을 연구했다. 명색이 산악회의 운영진이 아니던가. 핵심중의 핵심.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방책이란, 당장 코로나가 백신이 개발되어 퇴출된다든지, 자연재해로 지구가 멸망할 정도의 급이 필요했다. 그렇게 별 뾰족한 수는 행동으로 표출되지 못했고 진중한 차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와중에 회장님은 침착했다. 드디어 앞장서서 입을 열었다. 


"음음, 그래서 내가 말이지. 민들레님, 민들레님을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민들레님이 처음 언급되고부터 약간의 틈이 있었지만 회장님은 역시 회장님 자격이 있었다. 무거운 침묵을 뚫고서 그렇게 끊겼던 이야기를 힘겹게 이어 나갔다. 그가 존경스러웠다. 그런데 잠시 후 회장님은 마치 벌레가 콧구멍에 들어간 것처럼 얼굴 근육을 씰룩거렸다. 거기에 돌연 운전석 산행 대장님이 급브레이크를 끼익! 밟는 바람에 차가 휘청거렸다. 순간 부회장님은 맥주가 코로 들어갔는지 계속 콜록거렸다. 그렇다. 문제는 냄새였다. 곧 내게도 소리 없이 냄새는 밀려들었다. 대지진 뒤에 쓰나미가 오듯 '뽁뽁뽁' 여진마저 가고 마침내 독한 냄새가 독하게 덮쳐왔다. 오롯이 산에서만 등산을 통해 나름 치유의 일상을 나누고자 나온 자리였다. 회장님, 부회장님, 산행 대장님과 나는 그뿐이었다. 이 냄새를 공유하고자 온 것이 아니란 말이다. 냄새는 지독했다. 눈에서 실핏줄이 하나하나 터졌다. 이런 냄새가 존재할 수 있다는 자체가 미스터리였다. 며칠 동안 묵고 묵어서 원래는 오래전에 세상 밖으로 내보냈어야 하는 것인데, 어쩌다 보니 묵히고 묵혀져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여 가슴에 한만 사무쳤구나. 잘못된 방향으로 엉뚱하게 마치 암세포가 증식하듯 성장했구나. 이윽고 냄새는 코 안으로 들어와 전신의 신경을 마비시켰다. 그녀의 뱃속에서 오랫동안 쌓인 원한을 차 안이라는 좁은 공간에 흩뿌렸다. 에어컨 바람을 타고 냄새는 천천히 공중에서 한 바퀴 돌다가 나갈 데를 찾지 못하고 그만 통풍구를 만나 냉기와 함께 직선으로 냅다 얼굴로 돌진하여 달려오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섣불리 어떠한 표현도 못하는 남자들의 심정은 아랑곳 않고 가슴 깊이 침투하여 인내력의 크기를 가늠하면서 이성의 안팎을 간신히 헤매도록 만들었다. 어쩌면 미세하고 미세한 노랑 가루가 얼굴에 흩뿌려지는 게 아닐까 헷갈렸다. 부회장님이 조심스레 외부 공기 유입 버튼으로 손가락을 가져가자 운전하는 산행 대장님의 검은 눈동자가 희번덕 오른쪽 뒤를 가리키며 '그러지 마세요!'라는 신호를 보냈다.     


우리는 점점 사고가 마비되었고 차츰 그녀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출발 때부터 부회장님이 건넨 안주로 계란과 고구마를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었다. 그래, 퀸님 당신에게 근본적인 잘못이 있다. 왜 변비라고 미리 고하지 않았더냐! 고구마가 그렇게도 맛있더냐? 그래서 이런 사태가 조장되지 않았는가.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나는 그녀가 원망스러웠지만,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저 산행 대장님! 잠시 차를 세워주세요. 소변이 급해서요."

내가 말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산행 대장님은 갓길에 차를 세웠다. 나는 용감히 차 문을 박차고, 날 붙잡고 있던, 형언할 수 없는 눅진한 거미줄을 떨치고 일어났다.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차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킬 수도 있는 일석이조의 전략이었다. 문득 차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보고 있었다. 산행 대장님이 나를 보는 시선에서는, 머피 님은 어쩌면 산중에서 길 찾는 센스도 대단할 것이라는 경외가 느껴졌다. 차기 부산행 대장은 바로 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차창에 비친 회장님의 눈빛에서는 고마움과 감사의 뜻이 전달되어 왔다. 기꺼이 산행 대장님의 추천을 인가할 뜻을 비쳤다. 

"아니 왜 갑자기? 그냥 도착해서 볼일을 보지?"

회장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리 말하면서도 짙은 눈썹과 미간 사이를 미세하게 꿈틀거리며 속으로는, 왜 진작 그런 말을 하지 않은 거야? 이 자식아! 빨리 차 문을 활짝 열란 말이야! 나가면서 크게 공기의 통풍을 유도하란 말이다! 이렇게 조용히 외치고 있었다. 나는

"아닙니다, 맥주를 마셨더니 너무 급해서요"

말하고 밖으로 나섰다. 바깥은 더없이 시원했다. 그냥 버스 타고 사라져 버릴까? 야외 바람은 어색함과 내 몸에 걸친 가스를 동시에 날려주었다. 그런데 나는 모른 척 차 문을 열어두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철컥! 바깥으로의 탈출에 심취해서 그랬는지 그만 나오면서 문을 닫고 말았다. 나이가 드니 찰나의 기억도 잊어버리는 요즘. 그렇다고 다시 일부러 문을 열어 둘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것은 퀸님의 자존심과 직결된 문제였다. 모른 척하는 놈이 이기는 게임. 나는 고민 끝에 몰라 몰라, 그냥 볼일 보러 가기로 했다. 어차피 타이밍도 늦었고 더는 냉정을 유지하며 다시 차 문을 열 기백도 없었다. 밀폐된 차 안에서 남은 자들은, 각기 오묘한 시선으로 그리고 절박한 심정으로 침착함이란 놈을 붙잡고 있었다. 회장님과 부회장님은, 우아한 퀸님의 자존감이 다칠까 싶어 눈물까지 머금고는 처절하게, 참자!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꾹꾹 참아야 한다. 민들레님이 말이지, 산악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기필코 인내해야 한다며 닫힌 차 안에서 화생방이면서도 화생방이 아닌 척 아름다운 동료애의 필적을 남겼다. 계기판에서는 에어컨 바람이 빙글빙글 실내 가스와 더불어 잘도 돌아 불고 있었다.


이튿날, 부회장님에게서 듣기로 퀸님은 내가 다시 차에 오르기 직전

"차 돌리세요."

라는 차가운 한마디를 남기고 산악회 카페에서 사라졌다고 했다. 그녀의 신비로운 매력이 한 꺼풀 벗겨져 인간적인 내음을 맛봤지만 안타깝게도 퀸님은 '뽁뽁이'라는 전설을 남기고 자취를 감췄다.   

   


 

야단 났다. 내가 가입한 다른 산악회 밴드에 그녀가 나타났다. 사진 속 그녀는 싱그러운 미소로 웃고 있었다. 웃는 그녀의 얼굴이 무척이나 정다웠다. 그녀의 가입 인사 글에 환영한다는 댓글이 사상 초유의 개수로 늘어나고 있다. 나는 밴드 속 내 프로필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로필에는 얼굴 사진이 들어가 있다.) 누구라도 자신의 전설을 아는 자가 존재한다면...아마 그녀는 다시금 사라지리라. 아악, 이걸 어쩐담. 현재 접속한 온라인 상태의 내 프로필이 그녀 옆에 나란히 반짝이는 게 보인다. 혹 그녀가 날 봤을까? 다급한 마음에 나는 채팅창을 열어 그녀에게 말했다.


"반가워요, 뽁뽁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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