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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Apr 07. 2020

어젯밤 여고생이 그들에게 끌려갔다

성범죄, 성추행 사건을 일으키고 바라보는 시각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일순간 잠잠해진다. 

작은 술집 밤늦은 시각. 티브이에서 뉴스 소리가 크게 들린다. 성범죄 사건, 리벤지 포르노, 영상을 몰래 찍어 SNS에 유포, 폭행, 감금. 화면에는 온통 빨간불이다. 가지 마라, 하지 마라, 알지마라, 라고 빨간 신호뿐이다. 가고 하고 알아버리면 침범한 것이 되고 마는. 가고 하고 알게 되는 대상물 전체가 싸잡아 표적이 된다. 나는 슬쩍 시선을 내려 소주잔을 응시한다. 소주잔 안에 소주가 가득, 지그시 쏘아보자 순간 소주가 찰랑거린다. 마치 내가 저를 오랫동안 지켜보아서 얼굴이라도 빨개진 양 소주는 잔에서 내적 갈등을 일으키며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다. 나는 입꼬리를 씩 올리고는 냅다 마셔버린다. 그리고 말한다.

“다 여자들이 문제야. 자기 몸 찍어서 영상 올려 돈 벌고.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내 말을 듣던 테이블의 여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응수한다.

“오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참, 기가 막혀서,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말이 안 될 건 뭐야?”

“저놈들이 순진한 미성년자를 꾀어 강제로 찍고 벗기고 영상을 빌미로 협박한 거잖아요.”

“어쨌거나 애당초 여자들이 돈 욕심 때문에 나선 거잖아. 다 돌고 도는 거지, 원!”

“아, 에나 콩콩, 개념상실, 말이 안 통해.”

“아무튼 여자들이 문제야, 여자들이.”


나는 여자가 문제라고, 근데 에나 콩은 어딨는 거야, 아까 콩 안주가 나왔나, 갑자기 콩이 먹고 싶은데 어딨는 거지, 중얼거리며 테이블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쪽에서 야, 냅 둬라 냅 둬, 또 취했다, 일부러 저러는 거야, 니들이 발끈하니까 재밌어서 그래, 좀 있으면 일어날 거야, 저런 인간인 줄 알고는 있었지만 참 어이가 없네, 뭐 그따위의 말들이 귓가에 들렸지만 나는 일어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똑똑히 들린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다 그들의 푸념이 날 지칭한 건지 조차 의아해지고 어느 순간 다 부질없노라, 나는 지쳤으니 이제 일어날 수 없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일어날 힘도 없이 바닥에 다다랐으니 더 욕을 하면 자칫 땅속에 파묻힐지도 모른다고 그만 내버려 두라고 전하고 싶었다. 대답하려고 고개를 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지만, 오른팔에 이마를 대 온전히 숨쉬기에도 바빠 그럴 힘이 없었다. 내내 고개를 돌리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고개를 돌려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이마 아래 정면으로 맞댄 테이블의 딱딱한 부위에 코끝이 맞닿아 내쉰 숨이 곧장 돌아오는 바람에 얼굴 전체를 화끈하게 데웠다. 견디기 힘들었다. 답답한 벽돌이 숨 한번 쉴 때마다 한 장 한 장 쌓여 벽을 만들었다. 나는 대체 몇 겹의 벽에 갇힌 걸까.    



저 쪽은 밝지만 여긴 어둡다



으슥한 밤길. 

나는 교복 치마 차림에 책가방을 가슴팍에 멘 여고생이다. 

오후에 체육 수업이 있어서 위에는 체육복을 입고 아래는 교복 치마를 입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다. 벌써 두 번째 옷을 맞춰 입었지만, 가파른 발육성장을 이겨내지 못해 체육복은 딱 달라붙어 앞가슴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그래서 체육복을 입은 날이면 책가방을 앞으로 멘다. 그러면 평소 구부정한 자세도 왠지 모르게 당당해져 뒷짐 진 양반처럼 이완되어 펴진다. 야자를 마치고 이제 막 귀가하는 중이다. 버스에서 내려 버스가 다니지 않는 우리 집을 향해 한참을 걸었다. 우리 집은 버스정류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그나마 밤에는 낮보다 거리가 가깝게 느껴지지만 그렇다 해도 빠른 걸음으로 십오 분 가량이다. 이제 십분 걸었다. 오 분만 더 가면 우리 집이다. 집에 가면 엄마가 간식을 준비해두고 딸을 기다릴 테다. 오늘은 어떤 것일까. 어제는 시루떡이 남았다며 주길래 허겁지겁 먹다가 체할 뻔했다. 오늘은 빵을 먹고 싶은데. 엄마는 내가 빵순이인 것을 잊었나, 빵 먹어본 지가 언젠데, 아냐 아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늦은 밤이니 살찔 거야. 왜 밥을 먹으면 가슴부터 커질까, 그래도 딱 하나만 먹어야지. 더 먹고 싶어도 딱 하나만 먹고 자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가로등이 없는 도로를 무단 횡단했다. 

어쩌면 신호등도 없고 교차로도 그어져 있지 않으니 무단 횡단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고하지 않았기에 내가 여길 건너는 신호를 어떠한 객체도 받지 못하여 아무도 가로막지 못한다, 즉 누구도 이곳을 지켜보지 않고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각오한다. 세상이 나를 주시하지 않으니 덩그러니 혼자의 힘으로 제 몸을 지탱해야 한다. 나는 손에 쥔 어떤 발신기도 없다. 핸드폰을 비롯한 기타 전자 장비라도 있다면 누구든 전파를 감지하다가 이상이 있을 때 혹은 의심이 갈 때 한 번쯤 넌지시 살펴볼 여지가 있음 직도 한데 그러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형편이다.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지금의 시공간을 다스리고 무사히 통과해야 한다는 자각뿐. 결론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면 큰일이라는 거다.


이 한 몸 굳건히 지키려면 서둘러야 한다. 

달빛도 없고 가로등도 없고 차도 다니지 않는 여기는 마치 어둠의 구름이 내려앉은 것처럼 뭉게뭉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른바 안개구름. 그것은 내가 뛰어들자 입을 벌려 삼키고 내가 나가자 입을 벌려 내뱉었다. 구름을 뚫고 길을 건너자 별안간 누군가가 나타났다. 안개구름의 다른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남자들. 그들은 곧장 내게로 다가와 외쳤다.

"야!" 

나는 멈칫 그들을 봤다. 어둠 속 구름을 뒤로한 그들의 얼굴은 죄다 까매 눈코 입을 선별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과 나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그들이 내게 말했다.

“어이! 너! 이리 와.”

나는 움찔 놀라 휘청거렸다. 그들 중 하나가 나를 딱 지칭하자 블루투스로 연결된 것처럼 그의 말이 뇌리에 박혀 그대로 따르도록 어떠한 전기적 결합 메커니즘으로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일면식도 없던 나는 그들에게 접속되어 실제 물리적으로 연결되거나 친밀감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는 길 뒤에서 끌려가다시피 했다.  도로가 끝난 지점을 지나 어둠 속 수풀이 우거진 곳 입구로 그들은 앞장섰고 나는 뒤를 따랐다. 그들이 내 손을 붙잡은 것도 아니기에 나는 얼마든지 뒤돌아 도망칠 수도 있는데 차마 그런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발길이 돌려지지 않았다. 따라오라는 그 말은  꼼짝없이 따를 수밖에 없는 특별한 강제력이 있었다. 만일 내가 도망치면 그들에게서 몇 배나 더한 보복이나 핍박을 받을 것만 같았다. 이보다 더한 건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묵묵히 잘 따르면 그들이 아무리 화가 났다 할지라도 조금만 꾸짖고 너는 얌전히 말 잘 들으니까 이 정도로 혼내고 보내주마, 라고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조금만 혼난다는 건 뭘까. 나는 알 수 없었다. 상상할 수도 없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머릴 한 대 쥐어박는 걸까. 무릎을 꿇고 싹싹 빌면 되지 않을까. 막연히 내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라고 짐작했다. 가방 안 필통에 꼬불쳐둔 만 원짜리를 꺼내 드리면 기뻐하지 않을까. 가만 용돈 받는 날이 언제였더라. 마침 오늘 받았구나. 다행이다. 용돈이 주머니에 그대로 있겠지. 아냐 아냐 아까 저녁에 영심이가 돈가스를 먹자고 해서 같이 갔는데 마침 지갑을 안 가져왔다고 해서 내가 냈잖아. 영심이는 내일 돈가스 값을 준다고 했는데. 하필이면 왜 오늘 지갑을 가져오지 않아서 내 돈을 다 쓰게 만들었을까. 확 절교해버릴까 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따르는데 무리 중 하나가 뒤돌아보며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영심이가 내일 돈 준다는데 내일 돈 받으면 그거까지 반드시 드릴 테니까 오늘은 그냥 보내주세요. 내일 꼭 드릴게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감히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심판은 지금이다. 나는 준비되지 않았지만 시험을 치러야 하고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야 한다. 마침내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세 명이었다. 세 명의 남자 어른이다. 어둠 속이지만 나는 그들을 볼 수 있었다. 다정하게 생긴 남자들. 그들은 내게 무어라도 원하는 것을 줄 것만 같았다. 나는 절벽에 몰렸기에 절박하니까 그들은 다정해야 했고 나의 절망적인 호소에 응해야 했다. 나는 겨우 용기를 냈다.

“저기, 지금 이것밖에 없어요.”

얼른 가방을 열어 필통 안의 지폐를 손바닥으로 박박 문질렀다. 바로 펴 공손히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두 손으로 지폐 끄트머리를 나눠 잡아 내밀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내 팔을 휙 잡아당겼다. 나는 곧바로 그의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이때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

"살려주세요."

단지 그가 팔을 당겨 내 어깨를 어루만졌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내 입에서는 살려달라는 말이 나왔다. 그가 어깨만 만지고 그칠지 아니면 그 이상을 원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끝이 어딘지 알 수 없기에 두려움은 증폭되어 끝 모를 두려움을 생성하고 생성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그도 몰랐다. 그리고 사뭇 놀랐다. 이 여고생이 어찌하여 대뜸 살려달라는 말을 하는지. 죽인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다만 품에 당겨 어깨를 살짝 만졌을 뿐인데 살려달라니. 살려달라는 말은 칼을 꺼냈거나 세게 때리거나 어쨌든 폭력적인 성향을 겉으로 내 보였을 때 응답할 대사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다짜고짜 살려달라니. 아아, 그래 나는 어쩌면 처음부터 널 죽일 생각이었나 보다. 잘 몰랐는데 네가 여기까지 따라오고 우리가 따라오라 말한 건 네게 뭔가 원한 게 있었던 것인데 그 원하는 것 바닥을 사실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살려달라니. 그렇담 내가 애당초 원했던 건 너의 목숨이구나. 목숨까지 취할 수 있는 장면. 목숨을 취한다면 상호 비례하여 나 역시 목숨을 내놓아야 할 정도인가 나는 몰랐다. 오늘 처음 봤고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갑작스레 목숨을 취하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사람의 목숨이 이다지도 쉽게 없어지고 날아가는 게 아닐 터인데. 그저 살점 한 덩이만 탐하려고 했는데.


남자의 내적 갈등이 느껴지자 나는 어깨를 덜덜 떨었다. 

떨림이 어깨 위 손을 통해 그에게 전해지리라. 한편 걱정이 깊어졌다. 어쩌면 이 떨림이 그의 분노를 부를지도 모르는데 왜 이렇게나 떨리는 걸까. 그만 좀 떨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의 손이 어깨를 지나 내 가슴팍으로 내려왔다. 교복 위 가슴 부위를 가볍게 움켜잡는다. 그는 원을 그리며 매만졌다.

내가 태어나 사는 이유는 뭘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 가슴을 만지는데 나는 고개 숙인 채 두 손을 모아 잡고 어쩔 줄을 몰랐다. 맞잡은 손에 땀이 배어 금방 축축했다. 그는 계속 원을 그렸다.

“살려주세요. 집에서 엄마가 기다리고 있어요.”

“뭐?”

그는 나의 엄마라는 에 움찔했다.

“매일... 지금 이 시간에,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그러자 뒤에 두 남자가 그에게 말했다.

“야, 그만 보내줘라. 불쌍하잖아.”

나는 그들이 보기에 불쌍한 존재였다. 내가 불쌍해진 이유가 뭔지 모르지만 불쌍하다고 불러준 두 남자가 사무치게 고마웠다.

“아, 안 되는데 이렇게 보내려고 데리고 온 게 아닌데.”

그는 내 어깨를 툭 치고는 “그래, 너 오늘 운이 참 좋구나, 가라 가”라고 말했다. 나는 무너질 듯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움직이며 한 걸음씩 전진했다.

“야! 가방 가져가야지.”

그 말에 나는 정신없이 가방을 부여잡고 앞만 보면서, 뒤돌아보면 다시 부를까 두려움에 떨며 거기를 빠져나왔다.    




나는 여대생이다.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간다. 붐비는 버스 안에서 갑자기 내 엉덩이를 누군가가 만진다. 

만지는 손바닥은 원을 그리듯 엉덩이를 문지른다. 문지르는 파동은 수천 마리의 지렁이가 되어 기어오른다. 지렁이는 끝까지 올라와 머리카락과 베베 꼬여 밀착한다. 원은 때론 작기도 하고 커지기도 한다. 일정하지 않은 그 원이 미치도록 두렵다. 예상할 수 없으니. 그것은 내가 원하는 규칙이 아니니까. 왜 내 생각과 다르게 움직이는 걸까. 흉측하다. 흉측하다는 느낌이 뭔지 몰랐는데 이것은 내 심장을 잡힌 것과 같다. 그 손은 뇌 속에 영혼을 잡고 문지른다. 마구 흔들리지만 몸은 그저 버틴다. 죽도록 싫다. 싫어서 타인에게 농락당하는 부위를 떼 버리고 싶다. 내 몸에 내가 머물지 않고 잠시간 떠나 있고 싶은 강렬한 욕구. 머리 위에서, 버스 밖에서 나는 버스 손잡이를 꾹 잡고 흔들리는 내 몸을 보고 그 뒤를 본다. 그 손은 버스가 정류장에 설 때 나를 떠나고, 내리는 사람 타는 사람의 공간적 배치가 재배열된 후 출발할 때 다시금 돌아온다. 그리곤 원을 그린다. 원을 그리다 이번엔 다른 움직임이다. 그동안 2차원적인 움직임이었다면 이번엔 입체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앞뒤로 압박하다가도 압박된 부위가 다시 풀어지도록 손을 떼고는 더더욱 강력한 손아귀로 엉덩이를 부여잡는다. 으스스 소름 끼치는 느낌. 나는 버스 손잡이를 겨우 잡고 버틴다. 다리는 파르르 떨리고 팔에 오돌토돌 닭살이 돋는다. 눈을 감지도 못하고 겨우 앞에 앉은 사람만 내려다본다. 그 사람은 자신의 핸드폰을 보느라 아무것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나도 그의 핸드폰을 보는데 여느 때라면 하지 않는 행동이다. 타인의 핸드폰을 섣불리 훔쳐보지 않겠지만 줄곧 그의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계속해서 보면 그가 눈치채 관심이라도 주길 원한다. 내게 일말의 관심이라도 가져준다면 내가 처한 상황을 어떤 식으로든 알려주리라. 그리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신고 방법이다. 자칫 엉덩이의 손에 반하는 행동을 눈에 띄게 한다면 그는 지금의 선을 넘어 어떤 놀라움을 줄지 너무 두렵다.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결코 알 수 없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든 그의 기분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압박감에 종속되고 피동적인 환경에서 내내 수동적인 판단만 가능하다.


드디어 내 앞자리의 핸드폰 보는 사람이 벨을 누른다. 이제 다음 정류장이면 그가 내린다. 그가 내리면 빈자리에 앉을 것인가. 앉아서 내 엉덩이를 만진 누군가를 확인할 것인가, 아니면 문이 닫히기 전에 따라 내릴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상념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버스가 브레이크를 밟기 시작한다.    




“오빠! 그만 좀 일어나세요. 집에 가야죠.”

그 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나는 손등에 묻은 침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나는 여고생인가, 분명 여고생은 아니다. 그럼 여대생인가. 아니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다. 남자가 확실하다. 그렇담 확실한 건 뭐란 말인가. 내게 위해를 가한 자는 남자고 공포에 마냥 떨던 이는 바로 나. 나는 내가 누구인지 또렷이 인지하느라 한동안 머리를 부여잡았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여기서 잤어?”

“어휴, 사람이 지저분해서, 참, 얼른 일어나요. 택시 타고 집에 가야죠.”

나는 후배의 뒤꽁무니를 따라 술집을 나섰다. 찬바람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야, 근데 내가 얼마나 잤냐?”

내가 묻자

“삼십 분쯤요. 확 그냥 밤새도록 자게 내버려 둘걸 괜히 깨웠네요.”

라고 후배가 대답했다.


문득 밤거리가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택시를 나 혼자 타도 될까. 심야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생각이다. 문득 나 혼자 택시 태워 보내는 후배가 야속했다.


나는 포식자인데 왜 세상을 두려워하지? 

나는 몰랐다. 포식자와 피식자는 언제든 그 위치가 뒤바뀔 수 있다. 영원한 건 없다. 포식자 위에 또 다른 포식자가 군림하여 포식자는 피식자가 되어 뜯기고 먹히고 쫓긴다. 피식자는 뜯기고 먹히고 쫓기다 막다른 골목에서 달려든다. 전쟁이나 격렬한 싸움을 원치 않았던 포식자는 다만 하얀 살점 한 덩이를 원했을 뿐이다. 하얀 살점 한 덩이를 위해 자신의 다른 것까지 내놓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안개구름만 있으면 되었는데, 이토록 무거운 빚을 주고받는 실체까지는 몰랐다. 나는 택시 안에서 뒤돌아보며 후배가 택시 번호를 적는지 안 적는지 보았다. 택시기사는 내가 이 도시의 길을 아주 잘 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방 예상치 못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여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더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정보를 줘야 할 시점. 이쯤에서 사투리 한 방을 날려줘야 알아먹겠지.

"아저씨 우리 집이 어디냐면요. 에나로인데요."  

그러다 아무도 없는 사거리 신호등에 퍼뜩 택시가 섰다. 이때껏 빨간불일 때도 핑핑 지나치던 택시가 별안간 신호등 앞에 선 것이다. 공연히 택시 내 분위기가 묘한 정적에 휩싸인다. 머리 위 빨간불은 유난히 빨갛다. 거리에 가로등이 은은하다.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저기 왜 신호를 기다려요?"

그러자 기사는,

"여기 엊저녁부터 카메라가 새로 생깄심더. 벌로 보싰는가 보네예, 카메라 앞에서는 조심해야 지예."

하고 벌로 본 내게 따끔한 가르침을 주었다. 언제든 입장은 뒤바뀔 수 있다.


갑자기... 어떤 남자가 와락 내 몸을 잡아 흔든다.

"아저씨! 집에 다 왔어요. 에나로 다 왔다고예, 어서 일나이소."


눈을 떠보니 그제야 신호등은 초록불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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