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처음 본 여자에게 목례하는 이유
밤의 수면. 수면은 지상의 잡스러운 빛을 비출 뿐 자신의 생각을 쉬 드러내지 않는다. 더러 찰랑인다. 이게 전부다. 자꾸 본다고 쉽사리 보여줄 것 같으냐? 작전 노출은 금물이다. 물은 그리 말하지만, 나는 이렇게 전하고 싶다. 괜찮아, 아까 밝을 때 이미 다 봤다고, 네놈의 바닥까지 나는 샅샅이 한참이나 공들여 보았다고. 그리고 기억한다고. 근데 그게 정말 통하디? 저녁 해의 붉은빛 마저 저무는데 아래로 시커먼 물이 콸콸콸 흐른다.
얼굴은 하얀데 그 속내는 알 수 없는 인물.
그가 생각난다. 도서관에 가던 날. 일과가 단순하고 생각마저 단순했던 나날, 도서관에 가면 마음이 편했다. 늘 자판기 커피를 호록 빨아 마시던 남자. 빨아 마시느라 뺨이 뾰족하니 변하던 얼굴. 자그마한 코에 다만 안경 뒤 눈빛은 매서웠다.
심탁.
심은 성이요, 탁은 이름이다. 한 글자 이름. 이름자가 하나라서 어딘가 허전한감이 없지 않다. 성과 이름을 띄어 쓰면 가운데 공백의 힘이 들어가 외자의 앞뒤로 은은히 빛 난다거나, 어딘지 깊은 내공이 배인 것처럼 보일 터인데. 가령 이 페이지가 시험 칠 때 마킹하는 OMR카드라면, 그리고 공문서 하단에 이름을 기재하는 거라면 심 V 탁, 이라고 띄어 써야 옳겠지만 아무래도 허준을 허 V 준이라고, 김구를 김 V 구라고 쓰지 않는 것처럼 심탁도 심탁이라고 정해두겠다. 지금 분명히 소개하는 터이니 앞으로 이름 두 자를 꼭 인지하시고, 어이 심탁이라니? 이름 한번 이상 하지만 이상함에도 이름일 뿐이고 대체 성은 언제 알려주는 거람? 김심탁인가? 허심탁인가, 하고 갸우뚱 두리번거리지 않기를 바란다. 양심탁인가? 정심탁인가, 아니다. 바로 성이 심이요, 이름은 탁이다.
내가 어찌하여 그의 이름을 이토록 강조하는지는,
앞으로 두고 보다 보면 어느새 고럼, 고렇지, 하고 무릎을 탁! 칠만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이름과 행위가 절묘하게 일치하는데 역시나 심탁! 이네, 라고 외칠 것이다. 심탁은 내가 도서관에 갈 때마다 만났던 인물이다. 도서관에 매일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사람 치고 이 심탁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도서관 주변 벤치와 팔각정 포함 삼삼 오오 사람들이 모였다 하면 ‘오늘의 심탁’ 이야기가 피어오르곤 했다.
이제 심탁이 궁금한가!
아까부터 궁금했다고! 하는 대답이 들리는 듯하여서 서두는 이쯤 하고 그러면 가슴을 탁! 치며 심신을 안정시켜 부득불 심탁의 대표적인 활약상을 소개해본다.
키가 작고 안경을 썼다.
머리는 이주에 한 번씩 이발을 다닌 덕에 늘 단정하고 옷차림은 사계절 내내 청바지에 티 혹은 청재킷을 걸쳤다. 그는 덥지도 춥지도 않고 한없이 만만하게 생겼지만 문제의 그 입은 결코 만만하지가 않았다.
심탁은 마음에 드는 여자가 도서관에 등장하면,
그러니까 소위 뉴페이스가 나타나면 예의 이상한 표정으로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그녀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한다. 내가 뒤에서 목을 쭉 빼 가만히 보니 책을 펴긴 폈는데 페이지는 넘어가지 않고 안경 속 눈빛만 휘번쩍 좌우로 이동했다. 멀리서 그가 책상 앞에 앉은 것을 보면 누구나 인정하곤 한다. 엄청난 공붓벌레라고. 놈은 움직이지도 않는다고. 움직이지 않다 보니까 책장이 넘어갈 줄도 모르고, 필기 역시 할 줄 몰랐다. 몇 시간이고 같은 페이지를 쳐다보았다.
어떤 시험을 준비하는지 모르지만, 반드시 합격할 거라고. 뭐라고? 십오 년째 도서관에 출근 중이라고? 그렇담 대체 어떤 시험이기에 시험은 저토록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을 십오 년째 떨어뜨리는 거야? 뭐라고? 내가 잘못 알았다고? 십오 년째 도서관에 출근하긴 하는데 공부를 위함이 아니라고? 그럼 뭐야? 어디 보자, 이게 무슨 책이야? 아니 이건 소설책이잖아? 그러고 보니 세 시간 전부터 페이지도 그대로네. 한 페이지씩 아예 달달 외우는 건가? 뭐라고? 눈을 자세히 보라고?
나는 가만히 심탁의 눈동자를 살폈다.
그의 눈동자는 옆자리 여자 무릎에 영롱히 꽂혀 있다. 찬찬히 보니 책은 그냥 펼쳐놓은 것뿐이고 대각선으로 고개를 표 나지 않을 만큼 틀어 눈동자는 모서리에 자리 잡아 여자의 무릎과 허벅지와 종아리만 탐닉하는 것이다. 아아, 그 여자는 뭔 죄란 말인가. 이제 막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세상이 철퇴로 막아놓은 관문을 뚫어보고자 당당히 정진을 시작하였건만, 옆에서 모기 같은 남자가 무연히 집요하게 오래도록 자신의 허벅지를 주시한다, 라고 알아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다시 도서관에 나올 수 있을까. 나는 걱정이 되었다. 저 멀리 내가 가까이 가며 그 눈빛을 살피자 순간 심탁의 눈이 나를 의식했다. 분명 나와 눈빛이 마주쳤는데도 심탁은 아닌 척, 어물쩍 반만년만에 첫 페이지를 넘기고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여자의 무릎 삼매경에 빠지기를 반복하였다. 무서운 인간이다. 대체로 만만하게 생겼는데 의외로 행동에는 어떤 강단이? 고집이, 모종의 신념이 배어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심탁은 도서관에 이십 대 때 들어와 이제 마흔을 바라본다고 했다.
언젠가 나는 도서관 한쪽에서 담배를 피우는 그에게 슬며시 다가가, 열심히 공부하시는군요, 근데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라고 물었다. 그는 나보다 딱 한 살이 더 많다고 대답했다.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나보다 어려 보였으니까. 아아 잠깐만요, 제 나이를 먼저 밝히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보다 한 살이 많은 거냐고 물으니 자기가 이미 다 알아봤다고 한다. 자신은 도서관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단다. 도서관에 나오는 사람도 다 안다고 덧붙인다. 저기 저 사람 보이지요? 저 사람 이번에 또 떨어졌어요. 저 사람은 나이가 몇인데 차는 뭐고 집은 어디고 꼭 일요일에 쉬어요. 교회도 안 다니면서. 저기 저 여자는 토요일이면 데이트를 즐기러 가요. 그리고 그쪽도 도서관 사람들에게 여차저차 정보를 캐치하여 당신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이미 나이를 알았고 지금 굳이 숫자로 거론하지는 않겠지만, 어쨌거나 결론은 자기가 형이라고 한다. 그의 눈빛은, 그런 자신을 존경하라는 듯, 함부로 자신의 눈길을 좇지 말라고, 비록 키는 작지만 올려다보라고 종용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를 형이라 부를 수 없었다. 주름 하나 없는 마흔 즈음의 남자. 피부도 깨끗하고 얼핏 보면 고등학교 1학년 즈음에서 성장이 멈춘 것만 같은 남자였기에, 차마 그리 부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심탁의 대표적 전략을 소개하자면,
그는 마음에 드는 여자를 도서관 옆자리에 두고 단순히 무릎만 탐닉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이른바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연출하는 것인데, 여자가 점심이나 저녁을 먹으러 도서관을 나와 교차로 앞에 서면, 재빨리 우회하여 준비된 자리, 즉 맞은편에 선다. 맞은편에서 그녀를 내내 노려보며 눈도 깜빡이지 않는다. 노려보는 이유는 시선을 맞추기 위함이란다. 드디어 신호등이 바뀌고 사람들은 길을 건넌다. 그녀가 이쪽에서 걸어갈 때 심탁은 저쪽에서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건넌다. 어쩌다 그녀는 어쩌다 보니 간혹 심탁과 눈이 마주친다. 그녀는 집에서 밥을 먹으며 생각할 터다. 아침에는 기분이 좋았는데 어찌하여 조금 전부터 정확히는 교차로를 건너왔을 때부터 갑자기 께름칙한 느낌이 들지? 왜 이렇게 밥맛이 없을까?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러나? 그렇게 그녀는 원인이 심탁의 눈빛임을 모르고 찝찝한 밥을 먹는다.
심탁은 그 짓을 그녀가 길을 건널 때마다 한다고 했다.
더러 바쁘다며 내가 부르는데 들은 척도 않고 내뺄 때는 바로 교차로를 건너기 위함이다. 때때로 심탁을 보면 다람쥐처럼 재빠르다. 누군가 심탁에게 물었다. 그 짓을 왜 하냐고? 그의 대답은, 자주 보면 정들잖아요, 였다. 생각해봐요. 그렇게 길 건너던 그녀가 어쩌다가 어라? 저 사람 어딘가 익숙하다? 아는 사람인가? 날 계속해서 쳐다보며 건너오네? 아리송 망설이다가 급기야 반은 실수로, 잠시 딴생각을 하는 바람에, 반은 본능적으로 그만 '까딱'하면서 목례를 하면, 이야기는 시작되는 겁니다. 여기서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아는 척 인사를 하는 목례란 이른바 눈인사라고 할 수 있다. 도서관에 오니 가니 익숙한 이를 만나면, 만나서 반갑지만, 다들 시간에 쫓겨 바쁘니 차마 대화를 개시하지는 못하지만, 당신네 안부는 다 이해하니 다음에 시험에 합격하거든 꼭 커피나 한잔해요, 그런 쌈박한 뜻이 담긴 인사다. 안녕!이라고 굳이 말하며 인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눈인사인데 즉 목례는 안녕!이라고 입을 열면 상대도 소리 내 대답을 하는 부담을 안기에, 또 애매하여 잘 모르겠을 때 대충 때우고 넘어가는 심플한 인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바로 그 인사를 그녀로부터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게 이 짓의 종합적인 이유라고 심탁은 대답하였다.
도서관에는 참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
복도를 오가며 마주치는 눈빛에서도 이미 아, 안녕하세요. 오늘은 얼굴이 좋네요. 어제 잠을 푹 주무셨나 봐요. 뭐 이따위의 대화를 나눈다. 그 따위의 대화가 세월 속에서 지속되면 어느샌가 아, 안녕. 오빠가 오늘 아침을 안 먹고 와서 지금 매점 가는 길이야. 뭐라고? 넌 두 그릇이나 뚝딱 비웠다고? 그러니까 살이 그렇게 찌지. 뭐?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않냐고? 도서관에서 오래 공부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그러고 있을 테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건 내가 지나친 것일까. 문득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말을 걸어주길 기다린 것인지도.
고개를 까딱,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거기서 발전하면 커피도 한잔, 술도 한잔, 마침내 인생도 한잔하지 않겠느냐는 논리란다.
기막힌 작전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