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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Jan 30. 2024

사랑이 지나가면

삼십 대 초반 서울의 밤


그대 나를 보아도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서른두 살, 서울이었다.


퇴근길 저녁 홀로 거리를 서성거렸다. 어디로든 가고 싶은 마음 너무 커 감히 집으로 가지 못했다. 집에 가면 끝나버릴 것만 같았다. 퇴근길 작은 나만의 평화. 차마 그대에게 가지 못하는 나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가고 싶은 데 가지 못하는 상황. 내겐 그대라고 칭할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멀리 떠나온 낯선 공간. 내가 살던 지방 작은 도시에서의 추억은 삼십 대가 되면서 시대가 변하듯 옛 기억으로 묻혔다. 그렇다면 이제 내게 그대라고 부를 이는 누구인가. 타지에서의 외로움. 곧바로 집에 가지 못하는 마음. 서성거리는 발걸음. 차가운 밤공기. 잠시 휴식이 필요해. 그런 생각이 들 즈음 예상치 못한 장면에서 그대가 나타났다. 저 멀리서 당신이 걸어왔다. 이름은 묘진. 같은 회사 다른 부서의 여직원. 얼굴이 하얬고 큰 키에 단발이었다. 부드럽게 나긋나긋한 서울말투. 봤을 때부터 동경하던 여자. 나보다 한 살 어렸지만 직장 상사였다. 나는 아직 사회초년생이었고 그녀는 베테랑이었다. 나는 9층에서 근무했고 그녀는 8층 구매부에 있었다. 종종 구매부에 들를 때면 상냥하게 웃어주던 그녀. 웃음은 늘 친절했다. 친절한 미소에 나는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친절이 너무 다정해 어쩌면 상투적인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다가갈 수 없고 그저 우러러보는 대상. 누구에게나 친절했던 사람. 멀리서 훔쳐보는 달빛. 본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 저녁이 되어야만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가 낯선 서울땅에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가산디지털단지역 주변. 이 시간에 여기에 나타나? 나처럼 퇴근길을 헤매나? 알 수 없었다. 우연인가, 인연인가, 기회인가, 어찌해야 하는가. 본얼굴을 보여주려는 건가. 잠시간 딜레마에 빠져 지켜보는데 또각또각 점점 다가왔다. 아는 척을 해야 하나? 손을 들까? 인사를 할까? 날 알아보기나 할까? 1대 1은 처음인데? 어찌해야 할지 갈등하는데 내 곁을 막 지나쳐갔다. 그녀를 쭉 지켜보다가 바로 옆 지나 칠 때쯤 시야가 탁 풀렸다. 초점이 사라진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주 보지 못하고 그저 앞만 향해 앞을 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냥 지나쳐갔다. 아는 척하지 못했다. 그렇게도 따뜻하게 웃어주던 사람인데 밤이 되니 알아보지도 못하는구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 대상이 필요했다. 마음이 붕 떠 곧장 집으로 가지 못하던 나날. 살던 곳에서 너무나 먼 도시. 망망한 서울에서 나는 쉽사리 퇴근하지 못했다. 회사에 있다가 나서면 바다에 풍덩 빠져서 내 갈길을 잃었다. 지나간 사람. 지나간 사랑. 퇴근 시간이 되고 어둠이 밀려오면 그 사람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눈앞에 가끔 보는 사람으로 투영되었고 상투적인 8층의 그녀로 변해 있었다. 나는 구매부 묘진 씨를 선망 어린 눈으로 보았다. 이름처럼 묘한 사람. 내가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대일진대. 평일 아침 구매부에 남자동기를 만나는 척 훔쳐보던 당신. 괜스레 8층의 동기들과 친한 척하면서 커피 어때? 하고 나눈 인사, 눈빛 하나에 감동하던 그때.


'사랑이 지나가면'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서울 생활의 일부분, 저녁이 떠오른다. 저녁이면 외로웠다. 외로움은 낯선 추위처럼 내 몸을 휘감았다. 피부에 닭살이 돋아 으스스 떨리던 하늘. 온종일 갈 데가 없었지만 밤이 되면 비로소 갈길이 자유로웠다. 그래서 편안했다. 막연히 그녀를 떠올리며 터덜터덜 걸었다. 주차장에 차를 외면하고 가산디지털단지역 주변을 맴돌았다. 퇴근길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모른다.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를 만나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사랑일까? 갑자기 저쪽 골목에서 걸어오면 어떡하지? 아는 척해야 하나? 아니면 모른 척 지나쳐야 하나? 고민하며 서울 밤거리를 떠돌던 나. 삼십 대 초반의 나. 


늘 생각하던 그 사람, 막상 만나면 반가운 마음 들 테지만 결국 모른 척 지나칠 수밖에. 한숨 쉬면서 겨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외로움의 바다 심연에 빠져드는 몸. 어둡고 어두워 처절히 깜깜한 공간. 차갑고 차가워 얼음보다 서늘한 냉기. 그래서 낯설었던 그 시절 서울 생활. 살던 곳에서의 오래된 그 사람도 모르게 되었고 사는 곳에서의 새로운 그 사람도 모르게 되었다. 


이보다 더 깜깜할 수는 없다. 모처럼 그 사람 만났는데 모른 척 지나쳐가야 하는 세월이라니. 사랑이 지나가던 그때 그 마음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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