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11월 23일
뱃속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우렁찬 기합소리.
2층 난간에서 깜짝 놀라 보니 멀리 건너편 진주시 소속 중년의 탁구인이 내는 함성. 한창 단체전 시합 중. 세트스코어 2대 2에서 5세트 듀스. 여기서 한점 먼저 뽑아 듀스 원. 그 긴박한 상황 속 단체팀을 위해 힘을 내자고 참을 수 없어 크게 소리 지르는 거다. 그 소리는, 용기를 내자, 여기서 정신 단디 차리야 한다, 부디 반드시 제발 이기고 싶다, 는 각오를 함유하고 있다. 오십 대 중후반의 남자. 어디에 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포효를 할 수 있으리. 나 아직 살아있으니 죽었다고 업신여기지 말라. 나 아직 힘 남아있으니 힘 빠졌다고 쉽게 보지 말라. 나 그리 쉽게 무너지는 남자 아니다 하는 의미까지도 내포한다. 이것이 바로 단체전의 묘미 아닌가 싶다. 창녕 체육관이 일순 기합소리로 가득 차 진동했던 순간, 잠시 딴 데 돌아보고 다시 보니 그 팀은 졌다고 한다. 이미 흔적도 보이지 않은 거로 보아 벌써 짐 싸 귀가했으리라. 한낮에 집에, 평소보다 일찍 간다는 것이 작은 위안이 되는 오후의 단체전 풍경.
나는 개인전에서 한 명이 빠진 행운을 안고 예선에 임했다. 원래 같은 조였던 창녕의 젊은 선수가 직전 김해대회에서 우승 & 승급하는 바람에 5부로 변경 배치, 빠지게 되었다. 창원의 조선수와 나는 가벼운 얼굴로 인사하고 심판 없이 게임했다. 2대 0으로 앞서다 2대 2로 잡혔다. 5세트에서 진땀 흘리다 겨우 승리했다. 이어서 벌어진 본선에서 나는 펜홀더 백서브에 혼쭐이 나 맥없이 패했다. 백서브가 너클과 회전이 번갈아 오는데 자신 있게 받지 못했다. 리시브가 흔들리니 쫓아가려야 갈 수가 없었다.
단체전 1회전에서 부전승
창원팀과 창녕팀이 붙어서 이기는 팀과 붙는다. 내심 창원팀이 이기길 바랐다. 창녕팀은 까다로운 이가 셋 보였고 창원팀은 둘 정도 보였다. 4인 단식 결과 2대 2가 되어 복식에 접어들었다. 두 팀은 막상막하였다. 복식에서 세트스코어 2대 2에서 5세트 듀스. 한 점을 뽑고 내주고 뽑고 내주길 반복하다 끝내 창원팀이 승리했다. 2층 난간에서 지켜보던 우리 팀은 환호하며 내려갔다.
단체전 2회전
상대는 창원팀. 그 팀의 에이스가 우리 팀 정선수를 잡았다. 그러나 창원팀의 선전은 여기까지. 우리 팀 김선수가 창원팀의 롱핌플 어르신을 만나 0대 2에서 뒤집어 3대 2로 승리했다. 또 우리 팀 홍선수가 5세트 박빙의 승부에서 창원팀 백선수를 이겼다. 4번 타자로 내가 상대팀 4번을 만나 세트스코어 2대 0으로 앞서다 3세트에서 10대 0이 되어 상대 선수의 서브 2개를 받지 않았다. 이윽고 가볍게 드라이브로 매조지었다.
단체전 3회전
상대는 또 다른 창원팀. 여기서 이기면 4강 입상이고 지면 8강 탈락. 그야말로 승부처였다. 누구 하나 입상 직전이라고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혹 부정 탈까 두려워서였다.
우리 팀 홍선수가 상대팀 에이스 5부를 만나 3대 1로 장렬히 패배했다. 그러나 우리 팀 김선수가 3대 1로 승리했고 정선수도 5세트에서 극적으로 승리했다. 8강전은 4개의 테이블에서 1번부터 4번까지 동시에 게임을 치렀다. 단체전에서 패배한 여러 팀들이 빠져나갔기에 체육관은 한산했다.
나는 가장 빨리 게임이 끝났다. 5부 펜홀더 무섭게 생긴 분을 만났다. 모호하고 의심스러운 액션으로 서브 모션을 취하길래 나는 되도록 커트보다는 임팩트를 넣어 쇼트로 리시브했다. 서브 구질을 알고서 받는 게 아니라 어차피 처음 만나는 상대, 그것도 펜홀더 고수의 서브에서, 모션이 크면 클수록 커트처럼 보이지만 결코 순수한 커트가 아니란 것을 안다. 다행히 이 리시브가 주효했고 되도록 긴 플레이로 호쾌하게 랠리 했기에 게임 상성이 맞았다. 무조건 공격적으로 밀고 나갔다. 심판도 상대팀 쪽 창원 분이어서 조금이라도 밀리면 그냥 끝날 것만 같아서 (멘탈과 기세가) 한순간도 내려놓을 수 없었다. 한방으로 제낄 수 있는 건 제꼈고 때릴 수 있는 건 마구 때렸다. 상대의 드라이브를 막을 수 있는 건 어떻게든 쫓아가 막았고 랠리로 이어갔다. 마지막 세트에서 듀스까지 갔지만 비교적 쉽게 3대 0으로 승리했다. 이때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상대 선수분이 놀란 얼굴로 바라보길래 그 시선이 의식되자 나도 나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끝나고 나니 팀원들이 입상이다~ 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내게 승급이라고 말해주었다. 9.9점에서 마지막 0.1점이 모자란 상태. 단체전 4강 입상으로 0.6을 확보했으니 당연 승급이었다. 어리둥절했다. 나는 아홉수에 걸려 자칫 1년 이상 걸리는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지난 대회 개인전 입상에 이어 곧장 단체전 입상으로 승급점수를 채우게 되었다.
단체전 4회전
상대는 진주의 또 다른 강팀. 우린 절대 못 이긴다면서 그저 대결의 의미만 두고 도전했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의 승리. 단체전 우승의 순간이었다. 진주의 그저 그런 실력의 각기 다른 구장 소속 4명이 모여 진주연합 A팀을 만들어 참가했다. 그저 참가에 의미를 두고 입상까지는 감히 생각하지 않았다. 타 지역에서 온 기라성 같은 팀들이 많았기에 여기서 뭘 할 수 있을까 하고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고만고만한 6부들이 모여 그 안에서 어떻게든 오더를 잘 짰다고 우리끼리 자화자찬했다.
일요일이라 여느 때 같으면 그냥 집으로 바이바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저녁때 진주에 도착했고 식당에 가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각기 다른 구장이지만 십시일반 사람들이 모여 축하해 주었다. 모두 저마다 다른 곳에서 운동하지만 같은 지역 사람들만의 끈끈한 뭔가가 있었다. 홍선수가 말했다. 단체전에서 이렇게 가슴이 뛸지 몰랐다고, 이런 벅찬 느낌은 처음이라고, 그간 개인전에만 충실했는데 이제 단체전만의 맛을 알 거 같아요, 라고.
줄곧 개인전으로만 승급점수를 쌓아 9.9점을 만들어두고 마지막 0.1점을 단체전 우승으로 채웠다. 창녕 단체전에 25팀이 참가해 우승점수는 1.25점이다. 여기서 나는 고작 0.1점만이 필요했던 거다. 마지막 0.1점을 채운 곳이 창녕이어서 나는 오랫동안 "창녕군수부 단체전 우승"으로 승급했다고 명명될 것이다. 막상 총 10점의 점수중 창녕에서는 0.1점 만을 얻은 것이라 다소 억울한 부분도 있다. 자칫 단체전으로 무임승차한 거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무렴 어떠랴. 무려 2년만의 승급이다. 8부에서 7부는 두 번의 대회로 산청에서 승급했고 7부에서 6부는 1년여 만에 남해에서 승급했다. 이제 6부에서 5부는 2년이 걸렸다. 다음 5부에서 4부는 가능할는지도 아리송하다. 이제 나이가 들어 신체가 노쇠화되는 시기. 체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움직임도 느려진다. 창녕대회가 끝나고 3일이 지났건만 몸살 때문에 아직 탁구장에 가보지도 못하고 있다. 어쩌면 여기까지 인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다만 나는 아직 대회에 꾸준히 도전할 마음이 변치 않았고 대회를 즐기는 마음 또한 굳건하다. 좋든 나쁘든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재미있게 때로는 스트레스가 확 풀리게 소리도 지르고 벽에 부닥쳐 무너지고 자빠지고 넘어져도 계속해서 궁리하여 도전할 것이다. 당장 나쁜 성적에 연연하기보다는 체력이 닿는 한 초보의 마음가짐으로 하나하나 구력을 쌓는다 여길 것이다. 한편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 하는 생각도 들지만, 반대로 이제야 도전할만한 위치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전에는 그런 두려움이 있었다. 예탈 하거나 단체전에서 밥값을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런데 술자리에서 듣기로, 다른 구장에 어떤 이가 4연속 예탈하는 와중에도 다음 대회에서는 무조건 승급할 거라고 다음 단체전에 자신의 자릴 비워 두라는 말. 실제 그의 동료들은 그의 실력을 잘 알기에 설령 그가 떨어진다 하더라도 언제든 그와 함께 할 준비가 되었다는 말. 그게 부러웠다. 무조건 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잘하면 좋지만 못한다고 해서 주눅 들 필요가 없다. 어떤 이는 대회를 치르고 일련의 과정을 수련이나 수행하는 과정이라 말하기도 한다. 처음에 나도 구력을 쌓는다 하는 것에 중점을 두니 수행이나 수련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와 돌이켜보니 이것은 수행, 수련의 범주를 벗어나 이를테면 추억 쌓기가 아닐까 싶다. 동료와 이야기하고 웃고 즐기는 시간. 그 속에는 지나간 대회 이야기가 대부분 차지한다. 구장에서 함께 운동한 이야기와 더불어 대회를 경험하고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시간. 그 속에 우리는 탁구라는 운동으로 환호하고 굵은 땀을 흘리며 뛰고 응원하고 격려한다. 그리고 맥주 한잔에 건배하며 오늘 같은 날 찐~하게 축하합니다 하고 인사 건넨다.
인사받는 입장.
감사한 입장.
고개숙여 인사 드립니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두 잘 잡아주신 덕입니다. 그동안 많이 가르쳐주신 관장님, 우리 구장, 진주 경남 탁구 선후배님들께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