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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대회를 다녀와서

25년 11월 9일

by 머피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예선 대진표를 보지 않았다.

그저 동료에게 묻길, 평소 아는 이름인지 아닌지의 여부만 전해 들었다. 차라리 모르는 이가 낫다. 모르는 이에게는 지더라도 몰랐던 점을 배울 수나 있지 않은가. 아는 이라면, 패하면 멋쩍은 웃음으로 애써 괜찮다는 표시를 해야 할 것이고 그런 반비례적 표현이 거듭될수록 어딘가 맑은 에너지가 고갈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탁구 오픈 대회라는 스포츠를 통해 어두운 에너지를 발산하고 맑은 에너지를 얻는다. 여기서 맑은 에너지란, 음식이나 정해진 생활 패턴으로는 섭취할 수 없는 청량한 비타민이다. 청량한 에너지는 안티 에이징 효과가 있어서 몸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러면 그간 누적된 어두운, 지치고 늙어가는 심신에 새 순이 돋는 것처럼 어린 세포는 반짝 기분 좋게 해 준다. 나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자신감도 든다.


"한 명 기권이니까 두 분이서 게임하시고 결과지 가져오세요."


아, 이 얼마나 청량한 기운 가득한 말이던가.

진행자가 건넨 결과지를 받아 들며 나는 물었다. "혹시 게임 중 오시는 건 아니겠죠?" "네, 확실히 기권했으니 안심하세요." 나는 발길도 가볍게 앞서갔다. 상대 선수는 양산에서 왔다. 양산 선수는 자기네 벤치에서 심판볼 분을 구해왔고 우리는 편히 게임을 치렀다. 예선 통과가 확정된 상태의 게임이라니 이보다 더 행복한 행복 탁구는 없을 것이다. 이기면 좋고 져도 2위다. 2위면 어떤가! 적어도 예탈보다는 백배 천배 낫지 않은가. 나는 새로운 라켓을 집어 들었다. 새 라켓에 경도 50도짜리 블랙 러버를 붙여왔다. 시험해 볼 좋은 기회. 결과부터 말하면 3대 1로 승리. 이겼지만 포핸드로 시원하게 드라이브를 걸어 득점한 게 없었다. 상대 양산 선수는 이제 막 7부에서 승급했다고 했다. 이래저래 쇼트와 랠리 플레이로 득점했지 호쾌한 드라이브가 없던 점 그게 좀 찜찜했다. 본선 1회전은 부전승.


본선 2회전


상대는 진주의 김선수.

일단 나보다 형이다. 평소 볼 때마다 꾸벅 인사를 잘했다. 뒷면이 숏핌플이다. 게임이 시작되고 롱핌플로 생각해 대응하니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커트 주고 쇼트로 툭 치니 네트행. 회전 주고 커트대니 붕 떠서 찬스볼. 지금 돌이켜보면 말 그대로 숏핌플로 생각해 호선을 높게 그리는 드라이브로 상대해야 했다. 심판 보던 김해의 최선수가 자꾸 내 얼굴을 봤다. 보면서 '왜 그리 못하나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김선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내리 2세트를 주고 3세트가 되었다. 어떻게든 한 세트라도 따내려 이를 악물었다. 겨우겨우 한 점씩 따라가던 찰나, 김선수가 외쳤다. "아이고 허리야! 기권! 기권!" 나는 어리둥절했다. 김선수는 허리를 붙잡으며 심판과 내게 "못하겠다, 기권!"이라며 서둘러 라켓, 타월, 물을 챙겼다. 심판 보던 김해 최선수가 "병원 가보셔야죠? 구급차 부를까요?"라고 물었지만 김선수는 "그럴 필요 없어요"하고는 부리나케 떠났다. 나와 심판은 눈이 마주쳐 '이게 무슨 일이야?' 하며 어리둥절했다.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길 가다 지폐를 주은 것 같은? 복권을 긁었는데 소액 당첨된 것 같은? 이렇게 올라가도 될는지 하는 염려도 동반되었다. 뭐 실력이 안되면 바로 떨어지겠지 했다.


본선 3회전


혹시나 해서 서브로 가져온 라켓을 꺼냈다. 평소 쓰던 라켓에 평소 쓰던 50도 짜리 블루 러버를 붙여 왔다.

상대는 진주의 박선수.

처음 보는 선수다. 진주의 꽤나 큰 구장 소속. 그래서 응원 인파가 많다. 나는 때마침 지나가던 우리 구장 소속 선수를 붙잡아 심판자리로 이끌었다. 그리 어려운 공 같지 않은데 미스를 남발하며 앞서다 잡히고 세트 스코어 2대 0으로 끌려갔다. 박선수는 스매싱이 명쾌했다. 때리기 어려운 공을 구석구석으로 잘도 때렸다. 드라이브성 스매싱을 드매싱이라고 하던가. 딱 그런 공격이었다. 스매싱처럼 빨라서 받기 어렵고 드라이브처럼 휘어져 코스를 갈랐다. 3세트부터 나는 멀찍이 물러나 수비에 치중했다. 박선수의 구장 사람들 응원소리가 점점 커졌다. 응원소리는 박선수에게 어쩌면 짐짝처럼 부담이 되어 짓누른 건지도 모른다. 내가 뒤에서 몇 개의 공격을 막아내니 스스로 미스를 범하기 시작했다. 어렵게 어렵게 5세트 11대 8로 승리했다.


본선 4회전


상대는 진주의 김선수.

듣기로 2 부수를 내려왔다고 했다. 그럼 4부였다가 6부로 내려온 거다. 그만큼 실력과 구력이 깊다는 거겠지. 나는 앞서다 잡히고 앞서다 잡히기를 반복, 5세트까지 갔다. 이 사람만 이기면 입상이다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여기서 패하면 얼마나 아까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구장 문 형과 서 형이 옆에서 응원해 주었다. 벤치도 봐주고 심판도 봐주었다. 든든했다. 이 게임만 이기면 입상이다 하는 순간 힘이 들어가고 긴장이 고조되었다. 무리한 공격은 하지 않았다. 안전하게 랠리만 이어가는 플레이. 그러니 앞서다가 잡히고 역전되고 상대의 강타가 꽂히면 고개 숙여 공주워 돌아와 고개 돌리면 문 형과 서 형이 급박한 표정으로 지금 뭐 하냐고 정신 차리라고 파이팅 넣어 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끄덕이며 알았다고 파이팅 하고 그제야 강타를 하나둘 때렸다. 그러다 마지막 듀스 원에서 상대의 헛스윙. 일순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러고는 일제히 환호. 얼떨결에 4강 입상. 형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상대 김 선수와 악수했다. 김 선수는 연신 땀을 닦는 와중에도 웃으며 축하해 주었다.


본선 5회전


상대는 진해의 배선수.

결국 서브를 받지 못해 패했다. 2대 0으로 지다 겨우 1세트 따내 3대 1로 장렬히 패. 배선수의 백서브와 포핸드 서브 모두 나는 파악하지 못했고 끝까지 헤매기만 했다. 백서브는 대체로 길게 흘러나오는데 커트처럼 보이면서 전진이고 전진처럼 보이는데 너클이었다. 커트처럼 보여서 들어 올리면 하늘로 붕 떠서 오버아웃되거나 찬스볼로 변했다. 전진이나 회전처럼 보여서 쇼트로 밀거나 어정쩡하게 받으면 네트로 처박혔다. 예술 같은 모션. 모션으로 상대를 속이는 서브 기술. 나는 그의 모션을 보면 안 되는 거였다. 공만 보면서 바운드 후 느리게 오는지 빠르게 오는지를 가늠해야 했다. 그러나 게임 중 그걸 판별하기는 힘들다. 배선수를 상대한 모든 이가 서브를 탔으리라. 서브 구질을 모른다면, 수비형 선수처럼 롱커트로 대응하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롱커트로 띄운 후, 저 뒤로 물러나 단 하나의 공격만 받으면 랠리로 접어든다. 어떻게든 랠리에서 승부하면 괜찮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이 결승에서 패하고 난 후, 또 다른 작전을 떠올렸다. 상대의 회전보다 더 강한 임팩트로 탑스핀을 걸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그저 넘기고 보자는 식의 리시브가 패인이었다. 어떤 서브라도 보다 강한 탑스핀으로 되돌려주면 내가 의도한 회전성으로 변해 호선을 높이 그려 위력 있게 넘어가지 않았을까. 그러면 상대가 공격 시 부담을 느끼지 않았을까. 정리하자면, 수비형 롱커트와 강한 탑스핀, 두 가지다.




개인전 입상 사진을 찍고 상장을 들고 오는데 허리가 아프다며 기권한 김선수를 만났다. 김선수가 "그게 뭐예요?"라고 묻길래 멋쩍게 "입상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 후 김선수가 자신의 팀 단체전에서 날고 기는 모습을 봤다. 아, 저것이구나 싶었다.


단체전을 위해 개인전은 몸풀기 용으로 이용해야 하는데 외려 개인전에 전념하는 바람에 단체전에서 체력이 모자라 용병 값을 하지 못했다. 결국 2회전 탈락.





이런 오픈 대회의 재미는 단체전에 있다.

단체전에서 야금야금 입상의 기쁨을 맛보며 승점을 최대한 적게 느리게 쌓아가야 하는데, 나는 엉뚱하게도 개인전으로 승점을 쌓고야 말았다. 실력의 상승보다 더 많이 쌓은 거 같다. 무려 9.9점. 이제 0.1점만 더해도 승급. 이제 입상 문턱에 스쳐도 승급이다. 개인전은 단순히 실력보다는, 대진운이 크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대진운이란, 탁구의 상대성이라는 문제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내가 평소 a에게 우세하고 이기는 게임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b에게 열세일 때, a가 b를 꺾어주고 토너먼트에서 만나면 나는 a를 이기고 올라가게 된다. 반대로 b를 만나면 그대로 탈락. 탁구는 사람마다 모두 장단점이 다르고 정파 사파 할 것 없이 같은 스타일이 하나도 없다. 개인전에서 우승한다고 하여도 그날 참가한 백여 명을 전부 이긴다는 게 아니다. 그저 내 전형, 상성에 맞는 이를 만났을 뿐 열세인 사람을 피해 간 점이 크다.


단체전은 더 웃긴 게 정말 실력이 차지하는 부분이 작다.

오직 대진표다. 대진표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다음으로 오더 싸움이다. 팀을 위해 뛴다는 점에서 단체전이 오픈 대회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오픈대회를 다니며 보는 관점이 개인전에서 단체전으로 옮겨왔다. 단체전에서 단체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마조마한 순간, 이겨내는 순간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대는 순간, 마지막 한 점을 따내는 순간의 희열이란, 청량하면서도 맑은 에너지 비타민을 수십 수백 알 삼키는 것처럼 짜릿하다.


이제 단체전을 위해 개인의 영달은 그만해야지 하면서도, 오늘의 경험 또한 구력 노트에 한 페이지를 차지했으리라. 산엔청 잘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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