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아파트 정문이다. 두근두근 지켜보는 마음. 위 쪽에 복음병원과 교대가 있고 아래쪽에는 천수교가 기다린다.
진주의 서쪽, 서쪽의 중심, 서진주는 곧 신안동이다.
신안동은 여러 법정동과 맞닿아있다. 오른쪽은 나불천 복개도로를 기준으로 인사동과 경계하고 머리 위로는 이현동과 접한다. 전통적 주거 밀집 지역인 이현동과 맞닿은 신안동의 대표적 경계는 공설운동장과 석갑산이다. 공설운동장은 언젠가부터 유구한 집합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지금은 충무공동 종합운동장에 그 위상을 넘겨주었다.) 나는 출입구에 다가가 셔터 너머를 보며 축구 시합과 큰 행사를 치르던 운동장을 떠올려보지만, 트랙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이제는 주말 등산객들이 버스를 타거나 내리는 정류장의 기능만 남았다. 서진주 사람들은 공설운동장에서 버스를 타고 산으로 간다. 그마저도 공설운동장의 커다란 주차장만 사용한다. 그러면 운동장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죽은 척 눈을 감고 있지만 덩그러니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산다. 아직도 숨 쉬는지 잔디에 손을 대 가늠하고 싶지만, 셔터가 가로막아 들어갈 수가 없다.
석갑산은 신안동과 이현동에서 출발하는데 등산로를 따라 얽히고 섞여 길을 놓고 보면 구분할 수 없지만 가는 사람을 보면 얼마간 구분이 가능하기도 하다. 대개 등산복이 번쩍이면 신안동 사람이고 허름하니 평상복 차림이면 이현동 사람이다, 라고 하면 작금의 이현동 사람들이 어리둥절할 것인데 으음, 이 말을 어찌 마무리할지 한참 고민하는 중 저쪽 평거동과 판문동 사람들이 여기 나도 있소, 라고 외치는 통에 나는 휴우, 안심한다. 이를테면 전통과 모던의 차이랄까. 이현동은 처음부터 진주 서북쪽의 중심지였고 신안동은 뒤늦게 나타나 진주 서쪽 아래위 전반을 두루 차지하는 새로운 강자다.
신안동에서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어느새 아버지보다 키가 크게 되었다.
청년 골격이 대강 자리 잡을 즈음 나는 거울 앞에 서서, 낯선 얼굴을 거듭 보면서 이게 정말 나인가, 하고 미지와의 조우를 실감했다. 마치 복제인간이 처음 자신을 인지하는 것처럼 낯설었다. 거울 속 얼굴은 하얗게 빛났다. 아직 아이의 피부 결이라 여드름도 없이 뽀송뽀송했다. 나는 세수를 하고 무얼 바를까 두리번거리다가 엄마가 쓰던 투명 알로에 크림을 손가락 한마디 정도 들어내 발랐다. 피부는 미끈거리고 촉촉했다. 이제 갓 만들어진 피부. 상처도 없고 점도 없고 기미도 없고 주름 하나 없이 착색되지 않은 눈밭. 아무도 밟지 않은 새벽. 어쩌면 생에 다시없을 청초함이 배어 있을 단 한 순간. 그래? 그런가? 그러면?
때가 왔다. 그럼 나가보실까?
한없이 순결한 나는 집 밖으로 나가 도롯가에 선다. 누구를 만나도 좋고 누구든 마주 보면 사랑에 빠질 상태. 복제인간은 햇볕마저 신기하다는 듯 화사하게 미소짓는다. 길 건너 버스정류장에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일순 왁자지껄하다. 조용한 도로. 버스를 기다리던 여학생들은 내 얼굴을 보고 손가락을 가리키더니 이내 입을 가리며 키득거린다. 저들이 왜 나를 보고 웃나. 혹시 아는 사람인가 싶어 물끄러미 쳐다본다. 여학생들은 내 또래다. 중학생이거나 고등학생이거나 혹은 대학생이거나. 나의 등 뒤 풍경을 보고 웃는지 머리 위 구름을 보는지 달리 돌려보지만 그게 아니다. 공연히 나를 보고 웃는다. 처음이다. 내가 웃기다거나 웃길만한 동작을 하지 않고 그저 얼굴만 드러내는데 그것만으로 여학생을 웃긴다는 게 어떤 것인지 지금으로선 막연하지만. 얼굴에 덧발라진 알로에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 금방 만들어져서 적당히 조정하지 못한 어색한 동작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로 등 뒤나 머리 위 다른 환경적 요소 때문일지 나는 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다. 다만 내 착각적 우월한 자신감이 태초에 딱 한 번만 주어지리라, 하는 신의 계시에 따라 딱 요맘때가 그 시기가 아닌가 하는 짐작이 되긴 하는데, 거참 뭐라 달리 형언할 수 없는 장면에 이토록 오랫동안 잊지도 않고 기억하는 것은 아마도 신안동이라는 모던한 동네의 특성 때문이 아닐까 어림해본다. 그러한 변화의 땅에서 변화의 얼굴에 대해 조금씩 적응하는데. 나는 일단 그들에게 반짝이는 눈으로 반짝이는 미소를 3점슛 쏘듯 쏘아 주었다.
괜스레 들떠 두근거린다. 진주에서 가장 예쁜 여고생을 찾는 방법이 있다면?
갓 고등학생이 된 아이들의 가슴이 마구 뛴다. 무엇 때문에 뛰는지 알 수 없지만, 이것은 생후 처음 느껴보는 설렘이란 건 분명하다. 봄이다. 개학했고 열일곱이 시작되니,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뛴다. 주체할 수 없다. 드디어 어디선가 운명적인 만남이 가까이 온다. 운명적인 만남은 어떻게 전개될까. 만남은 영원히 추억으로 남을 테고 슬프거나 기쁘거나 아름답거나 어쨌든 아련한 이야기가 시작될 것은 분명하다. 강렬한 사랑에 맞닥뜨릴 때다. 설렘을 제어 할 수 없다. 운명이 나를 보는 시선이 어떠할지 몹시 궁금하다. 새 학기가 시작된 어느 봄날. 벚꽃이 퐁퐁 터지던 오후. 드리블 돌파가 특기인 친구가 문득 음악실 자리에서 일어나 피아노 쪽으로 간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잠시간 숨을 가다듬는다. 피아노를 칠 줄 아나? 나는 번잡스러운 시간 속에서 녀석을 주시한다. 곧 그는 렛잇비 전주를 능숙하게 피아노로 친다. 도도 솔솔 라라 솔파레. 귀에 익숙한 선율. 피아노 소리가 은은하다. 울림은 금세 아이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음악실 전체에 잔잔하니 울려 퍼진다. 드라마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비극적인 결말에 벌써 눈물이 흐르는 듯. 그 아름다운 선율에 모든 아이가 멍하니 여기저기 투명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아이들의 눈에는 어떤 게 보일까. 이제 아이가 아닌 시선. 내가 보는 그것을 보는 걸까. 나 또한 멍하니 어떤 것을 보는데 분명한 건 가슴 뛰는 일이 곧 벌어지리란 것이었다. 봄의 싱그러운 기운에 꽃망울이 버티지 못하고 터지듯, 아이들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한 친구가 자신이 졸업한 남녀공학 중학교 졸업앨범을 들고 왔다. 그러자 다른 친구도 친구의 친구를 통해 그해 여자 중학교 졸업앨범을 죄다 구해 교실에 가져왔다. 반 친구들은 진주에서 가장 예쁜 여학생을 찾고자 들여다보았다. 누가 가장 예쁜가. 투표하자. 사람 따라 취향이나 보는 눈이 다르겠지만 우리 반 50명의 친구가 이구동성으로 찍은 여학생이 있었다. 진주여중 졸업생, 이름은 서현정. 사진을 보니 눈이 똘망하고 볼은 적당히 통통하며 작은 얼굴에 단정한 커트 머리다. 친구들은 운명을 기다리지 않았다. 반에서 내가 제일 잘나가, 하는 친구들은 앨범의 끄트머리에서 전화번호와 주소를 캐취했고 방과 후 그녀가 사는 신안동 현대아파트로 모여들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1학년 때부터 야간 자율학습이 있었는데 이렇듯 졸업앨범 사진 하나로 교실 한쪽이 쑹덩 야자를 빼먹었다. 사랑에 빠진 녀석들은 대략 십여 명이었다. 반 친구 전부가 일편단심 찍었으니 전부 사랑에 빠졌지만 사랑은 운명이거나 기다림이다, 하는 이들을 빼고 사랑은 투쟁이니 쟁취니 어떻든 행동으로 옮긴 이만 십여 명이란 말이다. 졸업앨범 예닐곱 권에서 가장 예쁜 여학생을 향해 대시하려면, 나름 자신의 수준도 뒷받침되거나 무기가 있어야 할진대 녀석들은 아직 시련의 아픔을 당해보지 않았다. 내가 나를 모르는 복제인간인 시기. 이제 철부지 어릴 때와 다르다. 키는 거의 다 컸고 얼굴은 하얘졌다. 나 정도면야 준수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 빠진 녀석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도전했고 고백하고 어필했다. 친구의 친구를 통해 두어다리 건너 누군가 고급 정보를 흘렸다. 서현정이 농구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석갑산은 진양호를 곁에 두고 세로로 길게 숙호산과 판문산 사이에 걸쳐진 산이다.
새해 첫날이면 떡국 먹기 행사를 하고 그 외 많은 날 서진주 사람들의 포근한 산책로가 되어준다. 산책이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겼다. 아침 먹고 갈데가 없어 가고 점심 먹고 동네 마실 삼아 나간다. 저녁 먹고 계절을 느끼러 가고 야식 먹고 별 보러 오른다. 석갑산 흙땅은 가벼운 등산로와 휴식과 쉼터가 되기에 서진주 사람들의 정서적 토대가 된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석갑산 정상 부근 낡은 농구장에서 농구 연습을 했다. 농구대는 하나였다. 땡볕에 연습은 이른바 지옥 훈련이었다.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외인(外人)으로서 외로이 슛 연습을 했다. 당시 소위 잘나가는 친구들의 귀족 스포츠는 농구였다. 지금으로 치면 경마나 요트, 골프 정도랄까. 농구가 왜 귀족 스포츠였는지는 기준을 엉뚱한 데 두었기 때문이다. 잘나가는 친구는 농구를 했고 못 나가는 친구는 축구를 했다. 여기서 잘나가는 친구란, 오롯이 여고생을 만나거나 아는 정도를 말한다. 아는 여고생이 있거나 여고 근처에 살거나 여고와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되면 잘나가는 친구에 속했다. 잘나가는 친구들은 일부러 여고 운동장에 들어가 농구를 했다. 우리 학교에도 농구장이 있었지만, 학교 농구장은 점심때 실력을 연마하는 장일 뿐. 여기서 베스트 파이브에 들어가야 여고에 갈 자격이 주어졌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실력을 뽐내는 농구 게임은 여고 운동장에서 벌어졌다. 우리 학교 대표와 다른 학교 대표는 서로에게 일말의 연관도 없는 여고 운동장에서 만나 농구를 했다. 진주의 진주고와 대아고가 농구 시합을 한대. 그래? 어디서 한대? 이번 주 토요일 진주여고에서 한다는데? 왜 자기들 학교를 두고 진주여고에서 해? 몰라, 여고에서 해야 골이 잘 들어간다나 어쨌다나. 진주고와 동명고는 삼현여고에서 농구를 했고 진주고와 명신고는 제일여고에서 농구를 했다. 여고생들은 응원하는 학교의 남학생들을 위해 기꺼이 손수건과 음료수를 들고 찾아왔다. 더러 마땅치 않을 때는 여중에서도 했고 대학교에서도 했다. 만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나름 농구를 알고 NBA를 보면서 농구 보는 눈이 뜨인 여고생들은 열광했다. 고등학생의 거친 숨소리와 화려한 개인기에 환호했다. 두두두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돌파하는 드리블에 여고생들은 소리쳤다. "7번 화이팅!" "21번 멋져요." "10번 오빠 힘내세요." "3번에게 패스!" 그 말에 3번은 패스를 받아 단번에 파고들어 날아올랐다. 3번은 키가 작았지만 단단했다. 얼굴은 하얬고 쌍꺼풀이 짙었다. 공중에서 그는 수비를 피해 더블 클러치로 슛했고 공은 림을 팽그르르 돌면서 골인되었다. 그가 불끈 소리 없이 주먹을 움켜쥐자 지켜보는 여고생들은 가슴을 움켜잡았다.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가까이서 처음 본 땀방울에 흙먼지 내음에 여고생들의 가슴도 쿵쾅쿵쾅 두근거렸다.
저녁 시간.
신안동 현대아파트 앞에서 우리는 반 동창회를 하듯 만났다. 너도 왔냐. 뭐 하려고 왔냐. 어, 그냥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그래? 나도 볼 일이 있어서 왔지. 혹시 서현정 보려고 왔냐? 앗? 어떻게 알았어? 실은 앨범 보고 너무 예뻐서 실물로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더라고. 엥? 넌 또 웬일이냐? 옷 갈아입고 왔네. 어라, 머리에는 뭘 발랐길래 이렇게 반짝반짝하냐? 저기 봐, 역시 3번 저놈도 왔네. 우와 대체 몇 명이나 온 거야? 우리 반에 야자 너무 많이 빠진 거 같은데, 샘한테 들키겠다. 버스 타고 온 녀석, 자전거 타고 온 녀석, 헐레벌떡 뛰어온 녀석까지 신안동에 오는 길은 가지각색이었다. 나는 집이 같은 신안동이라 밥 먹고 알로에까지 한껏 바르고 자전거를 타고 왔다. 렛잇비를 피아노로 치던 녀석 3번이 유독 눈에 띄었다. 객관적으로 녀석이 가장 승산이 높아 보였다. 헤어젤로 짧은 머리를 반듯하게 빗어 올리고 하얀 셔츠를 입었다. 거기다 중학교도 남녀공학 출신이라 또래 여학생을 봐도 개의치 않는 자연스러움도 갖췄다. 그에 반해 나는 까마득한 변두리 구석 남자 중학교 출신이라 그런지 멀리서 여학생 얼굴만 봐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쉬 얼굴이 빨개지는 애송이였다. 녀석의 눈빛이 반짝이며 현대아파트 정문을 주시했다. 놈이 자신감 충만한 표정으로 살짝 웃는데 뾰족한 송곳니가 반짝거렸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뒤에 떨어져 지켜봤다. 그저 그녀의 존재를, 마치 티브이서 보던 연예인을 실물로 영접하는 것처럼 조마조마 기다렸다.
점심시간.
점심을 먹고 친구들이랑 농구를 했다. 5교시를 알리는 종이 울린다. 우리 반은 음악실로 모였다. 피아노 반주가 들린다. 왁자지껄 아이들이 떠든다. 가벼이 장난친다. 시시한 이야길 주고받는다. 그 속에서 3번 녀석은 다시금 피아노에 집중한다. 렛잇비 전주가 이어지다 기어이 노래를 부른다. 렛잇비를 처음 들은 게 아니지만 처음 들은 것만 같았다. 농구를 하다 흘린 땀방울이 등에 잔뜩 배였다가 서서히 증발하여 공기 중에 떠오르는 가운데, 녀석의 눈썹 아래 쌍꺼풀진 눈에서 땀인지 방울인지가 보인다. 나는 서현정의 눈을 보았다고 녀석에게 말해주었다. 그녀에게 말 걸어 주소도 알아냈다고 했다. 거기다 편지도 주고받는다고 벌써 세 통이나 받았다고 자랑했다. 언젠가 녀석이 하얀 카라티를 입고서 자전거로 우리 집 앞을 지나던 밤. 그는 내게 말했다. “나, 오늘 키스하러 간다.” 키스하는 상대가 서현정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지칭하는지 자세히 물어보지 못했다.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분명 상실감이었다. 내가 벌써 세 통이나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했지만, 녀석은 키스라니. 나는 생각했다. 키스하려면 최소한 하얀 카라티를 입어야 하는구나.
진주에 와서 맨 처음 살았던 상봉동과 봉곡동에서 벗어나 중학생 때부터 나는 신안동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이현동에 접한 북쪽 신안동에서 살았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이현동이라는 땟국물마저 벗고 평거동에 접한 남쪽 신안동에서 살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동네 이름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나는 점점 으스대기 시작하였다. 다시 정리해본다. 맨 먼저 상봉동에 살았다. 상봉동은 유곡동과 함께하고 봉곡동과 마주한다. 유곡동은 산골 경사진 달동네이고 봉곡동은 전통으로 따지면 일이 등을 다툴 정도로 옛시내의 근간을 이루는 동네다. 이현동은 진주 서북쪽의 끝으로 버스 종점이며 산청으로 빠지는 변두리다. 결론적으로 나는 상봉동에 살면서 유곡동에 넘어가 놀았고 봉곡동에 살면서 상봉동 교도소 언저리에서 놀았다. 그렇게 전형적인 진주 분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북쪽 신안동에 살면서 이현동으로 가 놀았고 신안동의 남쪽 강변 새 동네에서 살면서 비로소 상봉동, 봉곡동, 유곡동, 이현동이라는 어쩌면 구질구질한 어린 티를 말끔히 벗게 되었다. 사람의 생을 어린이, 청년기, 어른이라고 삼분한다면 어린이에서 청년기로 때마침 접어든 것이다. 북쪽 신안동과 남쪽 신안동은 그런 차이를 보여준다. 내가 옮겨온 것처럼 당시 진주의 남쪽 신안동은 미지의 평거동 쪽으로 차츰 세력을 확장하는데 그러고 보니 나는 신안동과 함께 성장한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든다. 신안동은 영원한 동반자인 평거동과는 나란히 신(新) 주거지역을 양분하는데, 진주사는 사람 중 신안동과 평거동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터이다. 심지어 어떨 때는 집 주소마저도 신안동인지 평거동인지 헷갈릴 때도 있을 정도다. 나는 이현동에 접한 신안동에서 살았고 평거동에 접한 신안동에서도 살았으며 누가 봐도 확실한 진양호 아래 평거동에서도 살았다. 아직 신안동에서만 살 때는 평거동이 타인의 지역, 타인의 동네로만 인식되었는데 막상 평거동에서 살다 보니 이곳이 우리 동네인지 남의 동네인지 구별이 되지 않게 되었다. 비단 내가 살지 않았더라도 워낙에 왕래가 잦기에 이제는 우리 동네, 남의 동네 구별이 가지 않는다. 언젠가 어릴 적 한 번이라도 눈길을 주고 마음을 줘 땅을 밟은 곳마다 당시의 정서가 반영되어 다시 돌아볼 때는 가슴에서 아련한 뭔가가 솟구치는데 어디든 ‘아, 여기가 내 동네구나’ 하는 반가운 마음이 든다.
나는 신안동 현대아파트 앞에서 3번 친구가 연주하던 렛잇비를 듣는다.
건널목 앞 신호등을 보면서 그녀를 떠올리고 열일곱의 내가 되어 타박타박 신안동 길을 걷는다. 나는 알로에를 바르고 그녀를 만났다. 알로에 냄새에 그녀는 “네 얼굴에 나는 향이 좋아”라고 말하며 다가왔다. 나는 내 어깨에 기댄 그녀에게 혹시 최근에 누군가와 키스를 하지 않았니, 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찌릿찌릿한 노래. 렛잇비를 치던 녀석의 짙은 눈빛을 나는 잊지 못한다. 한 사람만 만나는 게 당연한가. 이러한 명제를 입 밖에 꺼내는 순간 나는 더없이 촌스러운 놈이 될까봐 감히 물어보지 못했다. 열일곱의 봄. 십여 명이 승부를 걸고 설렘을 담아 사랑을 고백하는데, 너를 만난 그 장면이 이토록 강렬한데, 언제까지고 남아있는데, 만남은 그렇지를 못하고, 그렇지 못한 지속에 안타깝지만 안타까워하는 자체가 촌스러운, 나는 쉬는 시간 화장실에 달려가 담배 피우는 녀석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며 체념을 배웠고 세상을 엿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말해주었다. 3번은 현대아파트에서 무작정 기다리다 지켜보는 친구들을 하나씩 따돌리고 엘리베이터까지 드리블하듯 따라 탔다. 나는 렛잇비를 들으며 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때 녀석의 눈이 반짝이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녀석이 뭉그적 그녀를 지켜보자 그녀는 난감하다는 눈으로 말했다.
"미안해,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신안동 신안현대아파트로 가는 건널목, 두근거리는 느낌을 지금의 나는 모른다. 얼마나 밝고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기대되는지 지금의 나는 잘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