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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Jul 13. 2020

말랑이 복숭아

집까지 배달해 준다고 말해버렸다.

                                                                                                   

산처럼 쌓였다.





복숭아를 팔아야 해. 

급하다고 한다. 애들 상태가 이미 절정이라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월요일부터 비가 온다고 해서 일요일 오후, 익은 건 모두 땄다고 한다. 저녁에 통화하길, 내일 카페에 홍보 글을 올려서 배달하자고 한다. 나도 그러마고 대답했다. 하지만 복숭아 품종은 말랑이 중의 말랑이, 황도 중 미황이다. 누르면 움푹 들어간다. 손으로 껍질을 살살 벗기면 결대로 스르륵 벗겨진다. 한입 베어 물 만큼 벗겨서 침을 꼴깍 삼키는데도 복숭아는 제 옷이 벗겨진 줄을 모른다. 표면에 한 방울 물기가 쪼르륵 미끄러진다. 아이보리 바탕에 반점처럼 짙은 부분은 당도가 축적된 표시다. 세상에 달콤함의 종류가 수백 가지라면 그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 않을까. 그래서 그 옛날 손오공 제천대성은 옥황상제의 복숭아를 죄다 따먹지 않았는가. 복숭아를 지키는 백려가 죽는지도 모르고, 무려 오백 년이나 돌산에 갇히게 한 바로 그 복숭아의 깊고 달콤한 맛이란. 아무튼 황도는 주말까지 뭉기적 미뤄온 수확이라 나무에 너무 오랫동안 달려 있었다. 다 익었거나 절정을 지나 위기이거나. 미황은 예상보다 빠르게 상하고 물러진다고 했다. 보통은 익기 전에 따 실온에 후숙 되는데, 이번은 따서 선별 포장 판매하고 소비자는 구입하여 하나하나 익을 때를 기다리는 텀, 바로 그 텀이 없었다. 절정 전 따서 절정에 먹게끔 하는 게 순리인데 안 되겠다 싶어서 집에 가보니 역시나 어둠 속에서 복숭아를 선별해 담고 있었다. 오늘 밤늦게라도 절정을 지나가는 애들을 판매해야 했다. 얘들은 이미 앞다퉈 절정을 달리는 중이다. 위기에 빠진 애들도 여럿 보였다. 빨리 팔아야 했다. 급한 대로 우리 동네 인터넷 카페에 홍보 글을 올렸다. 그러자 사겠다는 댓글이 하나둘 달렸다. 우리 동네에는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가 여럿 있다. 카페에는 대략 삼천여 명 입주민이 가입된 상태고 입주민들이 농산물 판매 글을 왕왕 등록해 팔기도 한다. 겨울철 딸기부터 시작하여, 고구마, 감자, 참외, 수박, 산딸기, 파프리카, 사과 등등 각종 과일에 채소까지. 저마다 입주민들의 부모님이 손수 농사지은 걸 수확하여 자녀들이 홍보 글을 올리고 배달을 한다. 댓글을 보면 주문 댓글과 마찬가지로 후기 댓글도 보이는데 내용은 정말 다채롭다. 맛있어요. 정말 신선해요. 양이 많아요. 아이가 좋아하네요.라는 것에 반해 썩은 게 있네요. 양이 시중보다 적어요. 배달이 늦어요, 처럼 악플이 달려 싸우거나 사과하기도 한다. 대체로 부모님이 농사지으면 입주민인 자녀가 판매하는 식. 마침내 그런 아우성에 나도 동참해야 할 때가 왔다.  




문제는 배송이다. 

배송은 대부분 아파트 단지 정문이나 후문에 20분씩 대기하면 주문자가 받으러 나오는 식이다. 1단지는 7시, 2단지 7시 20분. 판매자는 소형 트럭이나 밴을 이용해 상품을 가져온다. 약속된 시간과 장소에 입주민은 아파트 정문으로 나가서 받아온다. 정말 그러면 깔끔하다. 그러나 이 방식도 골치 아플 때가 있는데 주문을 하고 심지어 계좌이체까지 해놓고는 감감무소식인 주문자다. 이럴 땐 더 기다리다가 결국 현관 앞까지 배송을 해줘야 한다. 자칫 기다림이 길어지면 다음 아파트 단지로 가는 시간을 놓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현금거래만 할 수도 없다. 현금을 잘 쓰지 않는 요즘이다. 천 원짜리를 일일이 준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열에 여덟은 이체를 하고 둘은 현금을 주고받는다. 작년에 그런 경험을 했다. 이 방식처럼 각 아파트 단지에 약속을 정하고 나갔다. 복숭아를 받으러 나온 입주민 중 하나가 "복숭아 상태가 왜 이래요? 위기잖아요. 바꿔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함께 기다리던 입주민들이 너도나도 바꿔 달라고 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절정 전 전개 중인 애들로 죄다 바꿔 주었다. 이제 남은 물량은 절정과 위기뿐이었고 위기를 절정 인척, 절정을 절정 아닌 척해야 했지만, 이미 빨개진 얼굴, 노래진 얼굴을 감출 수는 없었다. 으레 바람직한 상품이란, 전개 중 풋풋한 애들과 절정에 이른 애들이 고루 섞여서 하나의 박스가 이루어지는데 그러면 소비자들도 절정인 애들부터 달콤하게 맛보고 풋풋한 애들이 빨개질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모두 절정이면 먹다가 몇몇 애들이 주인의 배부름을 야속해하며 위기에 빠져버리기도 한다. 이런 낭패를 방지하기 위해 나는 개별 배송을 택했다. 다소 힘들지언정 내 몸뚱이만 힘들고 말지, 하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러면 카페는 어떤 차별화가 작용할까? 같은 동네 입주민들을 상대하는 상품은 과일가게에서 파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나? 시중가 2만 5천 원 상당을 같은 입주민 카페에서는 2만 원 상당으로 판다. 그러면 입주민은 시중가보다 품질 좋고 양 많은 것을 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고, 판매자는 막연히 소매 고객을 기다리는 식이 아니라 일시에 판매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런 식으로 양쪽이 윈윈 하는 식인데, 누구 한 명 태클을 걸면 단체로 그 태클을 주시하게 된다. 인터넷 카페도 마찬가지다. 카페 글에 악플 하나가 달리면 다수의 관전자들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면 그 홍보는 망해버린다. 그래서 이번에는 개별 배송을 과감하게 택한 것이다. 



저녁 8시에 글을 올리고 9시까지 주문을 받았다. 주문은 15집 정도 들어왔다. 밤 9시에 차에 복숭아를 싣고 출발했다. 먼저 1단지에 갔다. 1단지는 9개 동이 있다. 아파트 입구에 차를 세우고 5킬로 박스 2개를 안고 해당 동까지 걸었다. 걸어서 현관 앞에 섰다. 해당 호수를 누르고 호출을 눌렀다. 문이 열리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대문 앞에 두고 내려왔다. 간단하다. 그러나 각 단지 해당 동 해당 현관 입구까지 찾는 게 문제였고 들고 가는 게 관건이었다. 일단 무거웠다. 아파트 동과 동 사이 거리도 제법 멀었다. 한 박스 배달하는데 이십 분은 족히 걸렸다. 땀이 비 오듯 흘렀고 핸드폰에는 계속하여 주문이 들어왔다. 왜 빨리 안 오냐는, 도대체 언제 올 거냐는, 입가에 침이 떨어진다는 연락이 빗발쳤다. 인터넷 카페 채팅창으로 일일이 답변을 달면서 헉헉거리며 뛰었다.  박스를 들고뛰었다. 평균 삼백 미터를 뛰어 입구 찾아 뺑뺑이를 돌았다. 간혹 호출을 눌러도 무소식이면 경비실에도 부탁하여 들어갔다. 그러다 어느새 밤 11시가 넘었고 경비실에서는 "11시 이후는 경비실 호출 불가입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오기에 이르렀다. 나는 왜 11시가 넘도록 이 짓을 하고 있는가. 온몸이 축축하게 젖었고 팔다리에는 모기가 무는데도 멍하니 핸드폰 화면만 쳐다보았다.



클레임이 들어왔다. 

'썩은 게 두 개나 있네요. 이 정도 퀄리티는 선물로도 많이 받거든요. 2만 5천 원이나 줬는데 이런 걸 주면 어떡해요. 대문 앞에 썩은 거 두 개 둘 테니 바꿔주세요. 아참, 현관 들어올 때 소리가 시끄러우니 누르지 말고 경비실에다 문 열어달라고 해서 들어오세요.' 수확하고 저녁시간에 바삐 선별하다 보니 흠집 난 것이 섞였다. 내가 흠집난 걸 상품에 넣으면 어떡해? 라고 말하니 '바보들, 흠집난 게 더 맛난 거야'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맛난 것보다 보이는 게 더 중요하단 말이야, 하고 소리쳤다. 젊은 새댁들은 맛보다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구, 맛이 떨어져도 예쁘게 생긴 걸로만 넣어, 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그러면 흠집난 건 보너스로 넣어줘'라고 말하길래 작년의 일을 들려주었다. 보너스로 넣어준 것이 상했거나 흠집이 난 바람에, 욕을 먹었다고 했다. 밤 12시 즈음 그 집에 다시 갔다. 말한 대로 경비실 호출을 눌렀다. 그러나 경비실에서는 응답이 없다. 난감했다. 안 그래도 만족하지 못해 기분 나빠하는데 야심한 시각 놀라게 하면 안 되겠다 싶어 발을 동동 굴렀다. 다행히 공동현관문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됐다 싶어 들어가 썩은 거 2개를 회수하고 2개가 아니라, 10개 정도 깨끗한 걸로 눟아두었다. 단 하나의 클레임도 조심해야 했다. 




이튿날, 퇴근하고 하루 동안 주문받은 걸 세어보았다. 많다. 전부 개별 배송이다. 나는 차 뒷좌석과 트렁크에 가득 복숭아 박스를 실었다. 밖에는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쓴 채 일일이 박스를 들고 걸어가 아파트 입구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는 열 시간이 경과하여도 힘들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과감하게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보자고 생각했다. 입구 차단기 앞에 정차하자 고맙게도 경비실에서 말없이 열어주었다. 아무래도 비가 오니까 그래, 네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하고 열어주신 것 같았다. 그렇게 지하주차장으로 진입하여 푯말을 살폈다. 차를 몰고 해당 동을 찾기란 쉬웠다. 신세계였다. 현관 호출을 누르고 올라가 배송하고 다시 내려와 차에 올랐다. 이렇게 하니 금방금방 배송할 수 있었다. 카페 댓글과 채팅창을 통해 맛있어요, 고마워요라는 글이 올라올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하룻저녁, 11시까지 곳곳에 배달 완료하였다.



이튿날, 차 문을 여는데 운전석에 커다란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손으로 휘휘 저으며 앉았다. 룸미러 뒤로 커다란 거미가 숨는 게 보였다. 녀석 복숭아를 따라왔구나. 핸드폰에 알림이 울릴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한다. 혹시 클레임이 들어왔을까. '복숭아 너무 맛나요, 또 주문하고 싶어요." 다행이다. 이제 일주일 뒤 딱딱이가 나온다고 한다. 양은 조생종 미황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 아아, 나는 다시금 배달 전선에 나서야 한다. 



연락이 왔다. 양이 많아서 새벽에 두 시간씩 수확까지 거들라고 한다. 일주일만 그러자고 한다. 불호령이 떨어진다. 고함소리에 놀라 그 옛날 옥황상제의 복숭아에서 한 방울 과즙이 떨어진다. 과즙은 구름이 된다. 비가 내린다. 달콤한 빗물이 대지를 흠뻑 적신다. 각종 양분을 복숭아나무가 빨아들인다. 과실이 성숙한다. 비가 그치면 햇살을 받아 당도가 올라간다. 당도가 올라가면 새와 고라니와 벌레가 달려든다. 얇은 포장지를 벗길 때마다 두근두근 떨린다. 먼저 침범했을까 싶어 겁이 난다. 침범되지 않은 복숭아가 눈앞에 있다. 칼로 살살 벗겨낸다. 먹기 좋게 썬다. 포크로 찍어 입에 넣는다. 씹기도 전 입안 가득 과즙이 팡팡 터진다. 몰랑한 식감에 상큼한 맛이 배어난다. 접시를 보니 벌써 다 먹었다. 양껏 먹지는 못하지만 해마다 이맘때 복숭아를 봐서 참 좋다. 아내는 알레르기가 있다. 그래서 내가 복숭아를 손으로 뽀득뽀득 문질러 씻어놓는다. 가끔 내가 손으로 씻어놓지 못하면, 아내가 고무장갑을 끼고 씻어서 깎는다. 그러면 온몸이 간지럽다고 벅벅 긁는다. 



가려워도 맛나요. 

딸아이가 잘도 먹는다. 오물오물 먹는 입을 보니 좋다. 여름은 복숭아의 계절. 근데 무사히 배달할 수 있을까. 복숭아는 때때로 부담스럽다. 복숭아를 전파하고 한 나무에서 나온 복숭아를 먹은 동네 사람들. 어쩌면 오 백 년 동안 돌산에 갇힐지도 모른다. 같은 죄를 범하였기에. 근두운을 타고 올라가 복숭아를 먹는다. 달콤하구나. 영원한 삶을 위해, 하나에 백 년씩, 아삭아삭, 와그작와그작, 냠냠 쩝쩝, 말랑말랑, 꿀꺽, 즐거움이 늘어나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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