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갈까 말까? (단편소설)
시간이 없어.
갈등과 기회라는 놈이 머릿속을 어지럽히지만, 내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된다. 곤히 자는 그녀. 앞머리가 웨이브 져 머리칼이 스르르 올라가 이마가 드러난다. 하얗고 동그란 얼굴. 갸름한 타원을 그려 동그람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이토록 가까이서 당신의 얼굴을 본 적 있을까. 아마도 그녀가 눈 감지 않는다면, 조심조심 호흡을 조절하지 않는다면 이처럼 그림 보듯 들여다볼 수 없을 터다.
너무 가까워. 거리라고 지칭하기에도, 틈새라는 말이 형성되기에도 어려운 간격.
너무 가까워서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구분할 수가 없어. 근데 굳이 구분이 필요할까. 하긴 구분이라는 건 분리를 의미하니 서로 그리워하고 지켜보는 것일 테지. 지금은 이다지 가까운 간격에 당신을 마주 보지만 언제 다시 이런 순간이 올지 모르니 더 간절해져. 간절하기에 그저 가만히 당신을 바라봐. 당신을 보는데만 온전히 시간을 채운다. 아마 그녀도 자신의 눈 감은 얼굴을 나만큼 세세히 본 적이 없으리라. 스무 살의 생기. 스무 살의 피부. 마냥 빛나는. 생에 가장 아름다운 시기. 문득 평화라는 말이 떠올라. 누구도 상대를 탓하지 않는.
일 초라는 시간이 분열되어 공중에서 낙하하는 이슬방울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눈앞에 멈춰 선 것만 같다. 눈 깜빡일 때마다 방울은 천천히 떨어진다. 마치 영상 재생 버튼 중 가장 느린 속도로 맞춰놓은 것처럼 세상은 일 초가 일 분으로 변해버린다. 그것도 잠시, 파란색 물감이 점점 덧칠되는 느낌. 그것은 칠할수록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밝아지는 물감이다. 까만색 도화지에 밝은 색을 더하고 팔레트에는 투명색만 더해져 색이 바뀔 때마다 새로이 각오한다.
잊지 않으리라, 아아 색이 묽어진다. 나중에는 원초적 색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을지도 몰라. 그러면 나는 그 색이 무엇이었을까 끝없이 거슬러 찾아가겠지. 하여 나는 그 장면을 각인한다. 가슴에 담는다. 줄곧 지켜보며 생각한다. 이러한 장면은 다시 오지 않는다. 분명하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또 보면서 든 직감. 이처럼 가까이서 다시 보지 못할 거라고. 다시는 볼 수 없다. 그 말을 반복하며 지금에 보다 충실하고자 되뇐다. 깜박깜박 눈 깜빡여 새로운 장면이 열릴 때 닫히고 열리는 시간마저 탄식을 부르고 하염없이 아쉬워한다. 소중하다. 지금이 목하 지금만이 오롯이.
지난밤 술을 마셨다. 그녀와 나는 거실에서 커다란 상에 수박을 썰어 먹었다. 그녀가 마침 좋은 술이 있다며 찬장에서 꺼낸 양주를 마셨다. 부모님이 멀리 볼 일 본다고 비운 사이 그녀는 친구를 불렀다. 그녀와 친구는 내게 연락했다. 그녀의 친구가 넌지시 부르라 재촉했다고 말해줬다. 이어서 내 삐삐에는 평소 외우고 있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번호가 찍혔고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의심하면서 전화를 하니 혹시나 했던 그녀가 받기에 나는 공중전화 앞에서 통화가 끝나자마자 양말도 신지 않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양말을 챙길 여유 따위는 없었다.
늘 바깥에서 지켜보며 애타게 그리워한 그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3층에 내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는 그녀가 사는 집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대문이 열렸다. 거의 동시에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맞이하였다. 순간 떳떳하다는 느낌에 놀라웠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아내가 기다리는 집에 들어가는 남편의 심정이 이러할까. 나는 남편이 아니다.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이럴까, 아니다. 나는 가족이 아니다. 채권자도 아니고 보험에 가입하라거나 교회를 다니라며 무턱대고 초인종을 누르는 낯선 이가 아니다. 놀라웠다.
운동화를 벗고 맨발로 그녀의 집 거실에 들어섰다. 우리는 급히 술을 마시고는 술주정을 했다. 설핏 그녀는 내가 좋다고 했다. 그녀의 친구는 그 시각 이미 술에 취하여 작은방으로 들어간 직후였다. 그녀의 친구는 왜 그리도 빨리 취했을까. 그래, 내가 그녀를 보는 눈빛을 보았을 테다. 무어라 말을 하다가 엎드려 뻗는데 그녀가 부축하여 작은방에 뉘었다. 그리고 그녀와 내가 단둘이 거실에 남았을 때 그녀는 내가 좋았다고 했던가, 좋다고 했는가, 과거형이라서 마냥 슬펐던, 그녀가 술을 엎질러 내 옷이 젖어 눅진한 촉감이 기억난다. 어떻게 말릴까, 벗을 수도 없고 그렇게 눅눅한 면 감촉 그대로 괜찮아, 하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 그러다 슬픔 같은 게 느껴진 거로 보아 나는 그 단어가 과거형이란 것을 선뜻 인정하지 못하여 내내 아쉬워하고 아파했다. 아팠을까? 아파했을까? 아직 그녀와 나, 단둘이 대화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정말 아팠을까. 아픔부터 왔을까. 그 분간이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내가 좋다고 한 건 분명했다. 설렜다. 때문에 자신감이 붙었다. 기회라고 여겼기에 더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은 생각에게 묻고 생각은 생각에게 대답한다. 그 대답을 듣고 나는 선택한다. 물어보고 이것이 최선이다, 라는 말을 듣고 또 듣기에 나는 다음 선택을 할 수 있다. 선택은 다음 생각으로 이어진다. 다음 생각은 그런 생각을 하는 내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나는 정당하다고 생각하기에 굳건히 다음 행동을 할 수 있다. 다음 행동을 하는 건 생각이 아니고 바로 나. 나는 생각을 하고 다음 행동을 한다. 갈등은 끝날 줄을 모른다.
문득 오른쪽 어깨가 아파온다.
어쩌겠는가. 상상과는 달리 현실이라는 장막이 한 번 더 재고하라, 그러며 가로막는다. 모험을 걸고 싶지만 또 여러 가지 걱정거리가 걸린다. 망설여진다. 간밤의 기억을 더듬는다. 술자리에서 내가 대답하길, 조금만 빨리 말하지, 너도 알다시피 나는 이미 네 친구와 커플이지 않느냐, 라고 말했다. 너의 친구는 바로 저기 작은방에서 자는 친구가 아니냐고, 이제 와서 어쩌겠냐고, 그런데 처음부터 너와 가까이 지내고 싶어서, 다가오는 네 친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차마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다. 커플? 정말 커플이었는지 모르겠다. 친구는 내게 고백했다.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귀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친하게 지내는. 좋아해 주니. 그게 고마우니. 친구가 먼저 좋아한다고 말했으니. 그리고 친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너니까. 개인과 개인보다 무리와 무리가 함께 다니는 문화. 신입생이니, 가까워지고 싶어서.
아슴푸레 기억의 명도가 밝아지자 나는 깊이 한숨 쉬며 후회한다. 여전히 의식은 질문하고 생각은 생각에게 대답한다. 아니다, 나는 남자다. 내가 새로이 다가갈 기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다. 만회해야 한다. 모든 걸 제자리로. 그냥 가만히 있으면 평생 자책만 남겠지. 지금 고백해야 한다고 부르르 각오한다. 실패하더라도 바로 지금 내 마음을 드러내야 해. 결론은 그뿐이다.
기회를 얻으려면 지금 시작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