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내가 한 이불을 덮었다. (단편소설)
이제 막 눈 뜨니 어둠 속 방안에 그녀와 나는 한 이불을 덮은 상태다.
어떻게 된 거지? 영문을 모르겠다. 눈을 깜빡깜빡 떴다. 꿈인가? 그토록 바랐던 그녀이기에 내가 꿈꾸는 건가? 믿을 수 없다. 네가 왜 내 앞에 있니? 스무 살의 박진감은 매번 가늠하는 것을 넘어서곤 한다지만. 예측할 수 없는 놀라움의 연속. 가슴이 두근거린다. 머리가 아프다. 지끈지끈 현실로 돌아오는 의식이 차차 주변을 인식한다. 어디 보자. 우리 둘만이 아냐. 저쪽 방에는 그녀의 단짝 여자 친구가 잠들어 있을 테고, 그래, 얼핏 새벽에 그 친구가 작은방으로 가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러나 기억은 여기까지, 이후는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어? 아아 어쩌지? 큰일이다. 그 친구가 어느 때고 깨어나 우리를 찾아도 이상하지 않을 터다. 여기 안방은 어둡고 문이 닫혔다. 게다가 남녀가 나란히 누운 상태. 남녀는 나와 그녀. 누가 문을 닫았을까. 누가 우리를. 한밤중 고요한 공간. 둘이서 한 이불. 그리고 잠이 들었네. 상황 파악이 끝났지만 갈등은 이제 겨우 시작. 대체 누가 이렇게 눕혔단 말인가. 누가 문을 닫았나. 만일 저쪽 방 친구가 이 장면을 지금 이 모양 이대로 발견한다면? 모두가 충격받을 테지. 그녀와 나의 남은 대학 생활은? 우리는 새내기고 지금은 고작 5월인데. 낙인이 찍히면 그것으로 끝이다.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까.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변할 타이밍. 잠깐! 아니다. 아니야. 그렇게 절망적으로만 판단할 상황이 아니다. 좀 더 과감히 생각해봐. 까짓 적당히 감수할 건 감수하고 모험도 걸어봐야지, 하는 생각이 꿈틀거린다. 세 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이 불쑥 떠오른다. 혹시 그중 하나가 아닐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스치자 돌연 두근거린다. 가슴이 뛴다. 이런 상황이 다시 오려나? 이성적으로 따지니 고민이 된다. 카드를 덮어? 질러?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서, 와중에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바람이 이어지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초조하다. 커튼 뒤로 파란 기운이 피어난다. 기회를 결코 그냥 보내선 안 돼. 주먹 쥔 손바닥에 땀이 고인다.
입학 전 예비소집, 처음 만난 날부터 마음에 담은 그녀. 친구들이 나더러 그녀가 마음에 든다며 도와 달라고 선수를 치는 바람에 차마 입장을 드러내지 못했다. 도와 달라는 말에 그녀의 단짝 친구를 만나 부수적으로 그녀와 가까워지기만 바랄 뿐. 그렇지만 그 이상 어쩌겠는가. 철부지였고 판단력은 아직 여물지 않았다.
띠링!
모니터 구석 메신저에서 쪽지 수신을 알린다. 제목을 보니 직원 워크숍을 간다는 내용이다. 무심히 그런가 보다 하고 클릭했다.
『하동 북천, 지역 축제 견학 프로그램』
그날 버스를 빌려 단체로 연수 간다고 했다. 북천? 나는 언뜻 심드렁하니 이번엔 가까운 데로 가네, 연수 끝나면 곧장 집으로 새 버릴까, 하고 단순히 봤다. 연수 일정을 받아보고 여기저기 검색하다가 북천의 자치단체 소개란 즈음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고는, 순간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정말일까? 대뜸 의심부터 들었다. 가만히 더듬어보았다. 누군가에게 들었던 얄팍한 정보. 진주 인근 경남이라더라. 얼핏 하동이라던데, 하는 기억의 조각이 되살아났다. 아스라이 어디서 누군지도 모르는 이에게 들었지만 어쩌면 정말 그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섬뜩하니 등에 한줄기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하필이면 북천이라니, 공교롭게도 이렇듯 이런 식으로 아무런 예고 없이 맞닥뜨리려나. 아마도 닥쳐올 그날 그 순간이 예견되어 나는 어쩌지, 어떡하지, 고민하다가 결국 글을 쓰기로 한다. 준비 없이 만난다면 또다시 같은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러면 또 후회의 그림자가 얼마나 길게 드리우려나, 두렵다. 그러면 어떤 준비를 할까. 이 물음에도 사고는 정지되었고 우선 어디서부터 어찌 시작되었나 더듬어보고자 한다.
한편 막상 만나면 어떤 느낌이 들까 싶어 나는 한동안 모니터를 응시한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다가 금세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오래 묵은 기억의 벽돌. 그 아래 바닥, 이물질을 박박 제거하고 가지런히 차곡차곡 쌓다가, 문득 맞은편에서 게슴츠레 보던 직원과 눈이 마주쳐 퍼뜩 고개 숙인다. 이놈의 일렁이는 눈빛, 들키면 곤란해.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일순 들지만, 아니라는 생각도 금방 뒤따른다. 나는 지금의 내가 나임을 한시라도 놓으면 안 된다고, 지난날의 나는 내가 아니라고 다시금 다짐해본다.
북천은 언젠가부터 양귀비와 코스모스 축제를 하는 곳이다. 나는 몇 해 전 코스모스 축제에 간 적이 있다. 땡볕에 천막은 부족해 보였으며 가을 날씨는 내내 더웠다. 축제장에는 코스모스 사이 지그재그로 길을 냈는데 사람들은 줄지어 다니며 길이 아닌 곳으로 꽃을 밟고 들어가 기어코 배경에 꽃만 나오게끔 사진 찍었다.
북천, 이름을 그대로 풀어보면 ‘북쪽의 하늘’인데. 짐작건대 어쩌면 단순히 머리 위 하늘이 아니라 북쪽의 하늘 위 다른 하늘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