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청소 (충무공 김시민 장군)

꼬마가 빗질한 계단을 소녀가 오른다.

by 머피



아직 어두운 새벽.

삐삐 삐삐. 귓가를 파고드는 소리가 날카롭다. 꼬마는 벌떡 일어나 알람을 끈다. 어둠 속 곤히 자는 식구. 주섬주섬 옷을 입고 자전거를 탄다. 한겨울 매서운 바람을 뚫고 자전거가 삐걱삐걱 나아간다. 꼬마는 손이 시려 한 손씩 번갈아 호주머니에 넣는다. 한 손에 잡힌 자전거 핸들이 조마조마하다. 어쩔 수 없다. 손끝이 연신 얼었다가 녹는다. 훌쩍, 콧물이 기척도 없이 주르륵 샌다. 춥고 배고프다. 꼬마는 두리번 주위를 살핀다. 못내 허전한 가슴. 설핏 어둠 속 멀리 진주성 서문이 보이는 인사동 골목에 들어서자 자판기가 보인다. 다행이다, 하며 낡은 자판기 쪽으로 서두른다. 셔터문으로 잠긴 슈퍼 앞. 자판기 상단 조명이 엷지만 전기 흐르는 위잉~ 소리가 어쩐지 든든하다. 살아있는 기척. 아무도 없는 적막한 곳에서 오직 너만이 깨어있구나. 백 원과 오십 원짜리를 넣어 버튼을 콕 누른다. 달칵, 쪼르륵, 종이컵을 감싸 쥐자 온기가 전해진다. 따뜻하다. 사방은 차가운 것들로 가득한 세상. 호로록, 코코아 한잔이 시름을 달랜다. 인적이 없어 두려움이 몰아치는 와중 호호 불어가며 코코아를 마시니 조금씩 괜찮아진다. 조금씩 주변이 보인다.


아무도 없다.

부근에는 죽은 사람뿐. 적막한 기운이 감돈다. 저기요, 여기 살아있는 사람 있어요 외치듯 꼬마는 가쁜 숨을 쉰다. 살아있는 입술이 코코아를 한 모금 혀끝으로 골고루 훑어 맛을 음미한다. 두 모금 세 모금 달달한 기운이 들어가자 점점 기분이 좋아진다. 모두 잠든 시각. 겨울 새벽을 가르고 여기까지 왔다. 잠든 그들이 보지 못하는 길 위에 홀로 깨어있다. 그러나 혼자 주위 풍경을 독차지한 이 느낌은 무언가 깜짝 선물을 발견한 것만 같은 쾌감을 준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 이제 막 도착한 신문을 제일 먼저 집어 드는 감촉, 스르륵 신문을 넘길 때마다 그윽한 종이 냄새가 나. 처음 접은 자국은 언제까지고 남아 바탕이 될 것이다. 꼬마는 코코아를 마시며 인사동과 남성동 여러 갈래를 보며 새 자국을 만든다. 오늘만큼은 내가 개척자야. 내가 펼쳐본 데로 사람들은 이곳 풍경 속에서 오갈 것이다. 내가 지나간 길 위에 사람들이 뒤따라 지날 것이다. 까까머리 꼬마는 겨울방학 중, 방학 계획표에 박힌 인쇄물을 보고 딱 하루, 조기청소를 위해 진주성 가는 길이다.


꼬마는 빗자루를 들고 진주성 서문에 자전거를 세운다. 높다란 돌계단을 따라 덜레덜레 오르니 어렴풋이 호국사와 창렬사가 나란히 보인다. 어디였더라? 헷갈린다. 나 혼자 왔나? 꼬마가 설마 날짜를 잘못 봤나 의심하고 있는 중 어딘가 쓱싹쓱싹 소리가 난다. 아직 어두운데 시커먼 그림자들이 빗질을 한다. 그들이 누군지 친구인지 선배인지 분간되지 않지만 일단 따라서 빗질한다. 꼬마는 겨울방학 중 하루, 바람이 매서운 새벽, 아무도 책망하지 않는데 경건한 빗질에 열중한다. 어느새 등에 땀이 난다. 꼬마는 왜 갑자기 경건한 사람이 되었는지 생각해보지만 갸우뚱 자신이 빗질한 건지, 빗질을 하는 조그만 녀석이 가만히 따지고 보니 자신인지 헷갈린다. 성곽을 따라 서장대까지 이르는 널찍한 계단을 청소하고 동이 터 올 무렵 창렬사 경내에 줄 맞춰 선다. 학년별 반별로 서서 돌아보니 비로소 친구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너 언제 왔냐? 나? 벌써 와서 빗질하고 있었지. 빗질하느라 정신 차리고 보니 여기 이렇게 서 있네. 웃긴다. 학교에서는 맨날 건성으로 하던 놈이. 웬일이래. 하기사, 너무 추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기왕 나온 거 빗질이라도 열심히 해야지. 휴우 다행이다, 아무도 없길래 난 오늘이 아닌 줄 알았단 말이야. 어느새 선생님도 학생 대열에 끼어 스님의 목탁 소리를 듣는다. 새해에 새로운 기운을 얻어 새롭게 출발하자는 뜻에서 학생들은 창렬사와 호국사 주변에서 새해 조기청소를 했다.




진주성에는 두 개 법정동이 동서에 걸쳐 있다.

진주교에서 촉석루로 향하는 촉석문에서 공북문을 기준으로 동쪽이 본성동이며, 서쪽은 남성동이다. 행정동으로는 성북동 하나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성북은 아마도 성을 포함해 성의 북쪽을 가리키는 지명이 아닐까 싶다. 성북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행정 편의적 이름이다. 본성동은 진주 시내 한 축을 담당하는 오래된 땅이고 남성동은 진주성 대부분을 담는 굳건한 땅이다. 진주성은 이를테면 본성과 남성이 합쳐져 성성동이랄까. 성을 거치기에 성성동은 성스럽게 성을 내포하고 성 뒤에 성을 가리키는 역할이라 법정 명에 성이 들어가게 되었음이라, 지금에야 본성이 본성이고 남성이 남성임을 이름 따라 알면서 돌이켜보지만, 최근까지 나는 그 이름의 연유를 모르고 살았다.


우리 어디 가서 뽀뽀할까?

어디 분위기 좋은데 없나? 한때 진주 시내에서 데이트하던 이들이 향하는 마지막 관문은 대개 진주성이었다. 어물쩍 성문을 통과해 들어서면 거기가 곧 본성이고 본성에서 본성을 드러내 본능적으로 껴안고 키스를 하니 진주성은 외지고 때때로 외지지 않은 특별한 장소였다. 남성동 서문으로 나서면 인사동 신안동으로 나가게 된다. 본성동은 상업 지역이고 남성동은 인사동, 신안동의 주택지역과 맞닿은 입구다. 서문이나 공북문으로 들어가 진주교 쪽 시내로 통하는 곳까지 성은 길고 넓게 펼쳐져 있다. 남강을 우측에 두고 쭉 걸으면 시외버스터미널이 나오고 터미널에서는 수많은 관광객이 진주성으로 향한다. 진주성과 터미널 사잇길이 동서로 이어진다면 남강과 비봉산은 남북으로 마주 본다. 동서와 남북이 열십자로 교차하는 땅, 즉 시내 한가운데는 현재 공사 중이다. 일단 관광객이 제일 먼저 향하는 곳, 진주성 안으로 가볼까? 그러면 지금 진주성은 어떤 곳인가. 해 질 녘 일찍 끼니를 해결한 주민들이 부지런히 걸어 다닌다. 성곽 따라 오르막 내리막이 아기자기 연결되어 산책하기에 적당하다. 가로등도 예전보다 개수가 많아져 밝아졌다. 저녁이면 커플이 성곽을 따라 속삭이고, 아침이면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그늘막에 앉아 푸르른 잎사귀를 푸르도록 지켜본다. 낮이면 박물관에서 진주대첩 영상을 시청하고 의암에서 사진을 찍는다. 옛사람들은 이러한 풍경을 보며 풍경 속 나를 보고 풍경 밖 넋을 보며 풍경 안 한을 떠올린다. 한은 남강을 따라 유유히 흐른다. 아득한 그 날부터 마르지 않고 지금도 다채로이 흐른다. 한은 다양한 형태로 띄워지고 빛나며 물결을 따라간다. 밤이면 진주성 외벽을 따라 붉은 등이 켜진다. 불그스름한 진주성을 보면서 매일 밤 시민들은 겸허한 눈빛이 되어 운동한다. 사람들은 가지각색 걷기와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즐긴다. 남강을 따라 진주성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강물 속 한의 흐름을 따라 걷고 타고 본다.




얼마전 진주에 없던 동네가 생겨났다.

언덕을 깎아 다진 땅에 법정 명을 공모하여서 결국 새 동네는 충무공이란 이름을 받게 되었고 남강 지류 영천강변에 자리하게 되었으니 충무공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남강과 함께 흐르게 되었다. 충무공동으로 연결되는 새 다리에는 '김시민 대교'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대교에서는 진주성이 멀리 있어 보이지 않는다. 내가 김시민 대교를 건널때마다 대교는 말하는 것 같다. 진주성의 소식을 알려달라고. 어떻게 되었느냐고.

그 옛날 충무공이 잠든 날 백성들은 엎드려 눈물을 뿌렸다. 적이 알면 안 된다 하여 슬퍼하지 말라, 고 했던 충무공의 말을 뒤로하고 앞다퉈 곡 하던 눈물, 눈물이 모여 남강으로 흘러들었다. 김시민 대교의 조명은 빨갛다가 파랗고 초록이다가 보라로 변한다. 내게 그 풍경은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고개 들면 바람이 분다.

바람은 김시민 대교를 건너 진주성으로 달린다. 밤마다 진주성은 남강에 붉게 드리워 충무공을 부르고 목소리는 강물을 타 흐른다. 서장대 위 깃발이 펄럭인다. 깃발을 잡고 선 이가 성 너머를 지켜본다. 가로등이 켜지자 지켜보는 이의 눈도 반짝인다. 남성동에서 본성동까지 성곽을 따라 붉은 조명이 잇따라 켜진다. 장군은 서른아홉의 나이로 죽어서 충무공 시호를 받았다. 충무공은 장수로서 최고 영예스러운 시호다. 김시민 장군은 충무공으로서 길이 이름을 남겼다. 나는 김시민 대교 앞 충무공동에 살면서 그의 일생을 생각해보곤 한다.


강물은 진주성 소식을 담아 흘러서 여기 김시민 장군에게 전한다.

당신을 기억한다고.

적의 총탄이 그의 이마에 박혔다. 들리면 말해보라고. 그러자 어딘가 나지막이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지켜냈소이다. 백성을 아끼고 보호하여, 목숨 걸어 사랑했음이오. 이에 나는 마땅히 충무공 시호를 받았소이다.

그가 충무에 대해 말한다.

그러면 충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럼에도 나는 충무(忠武)에 대해 묻는다.

내 몸이 위태로워도 위를 받드는 것이 충이요, 쳐들어오는 적의 창을 꺾어 치욕을 막는 것이 무이다.

그는 의식 없이 몇 날을 누워 있다가 절명했다. 적은 총집결 하여 진주로 모여들었다. 이후 몇몇은 승산 없는 승부라 하고 몸을 피했다. 충무공이 없는 진주성에서 진주 성민 6만은 스러져갔다.

진주성에 남은 흔적.


그날 참상을 떠올릴 때면 진주성 남쪽에서 지켜보다가 묵묵히 지나온 강이 바로 당신이구나, 한다.




짙은 하늘, 꼬마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마치 충무공이 칼을 비껴 잡은 것처럼 빗자루를 힘주어 쥔다.

조기 청소 후 목탁 소리를 듣는 학생과 선생님이 정열 한다. 두런두런 차분히 스님의 설명이 이어진다. 수북한 죽음. 창렬사 지붕 위로 동이 터 온다. 서서히 주변이 밝아진다.


어느덧 햇볕이 진주성 내 곳곳 남김없이 쬔다.







*전국통일문예작품 한국문인협회이사장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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