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휴지 줄까 하얀 휴지 줄까

파란 두려움 푸세식 화장실에서는

by 머피



보일까?

보면 안 되는데. 보이면 어떡하지. 공원 가는 길. 꼬마는 친구들과 줄지어 걸어간다. 길이 좁아 앞뒤로 서서. 야 빨리 좀 가. 왼쪽에 야트막한 야산. 커다란 나무가 드문드문. 경사진 곳에 그늘. 나무와 그늘이 만나 그림자를 만드는데 예의 그 나무. 옆으로 난 커다란 나뭇가지. 거기에 칭칭 감긴 파란 줄. 얇고 넓어서 바람에 하늘거린다. 줄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버둥거린다. 옷감인지 밧줄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왜 가지에 묶여 펄럭거리나. 소문에 의하면 어떤 여자가 죽었다고 했다. 그것도 목을 매달아. 처녀라고 했다. 비련의 여인이라서 아무도 보지 않는 야산에 숨어서 죽었다고 한다. 어떤 사연인지 모르지만 새벽이라고 했다. 어둡고 비탈진 곳. 높다란 나뭇가지에 어떻게 줄을 매었을까. 사람들이 시신을 떼어가고 줄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줄은 아무렇게나 남아서 움직인다. 쉬지 않고 날린다. 친구들과 꼬마에게 파란 줄은 공포의 대상. 처녀의 목을 쪼인 바로 그 줄. 여태 온기가 남았으려나. 줄이 휘날릴 때마다 여인의 목이 매달려 흔들리는 것만 같다. 그네를 타듯이. 파란 줄에 목이 대롱대롱. 바람에 나풀나풀 흔들리는 모양새. 여인의 축 늘어진 몸뚱이가 커다랗게 움직인다. 줄은 가늠한 것보다 크고 빠르게 날린다. 늘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니 어쩐지 징그럽다. 당장 여자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줄만 보여도 다 상상이 된다. 줄은 계속해서 흔들린다. 여전히 끊임없이 쉬지 않고. 누가 저 줄 좀 떼어주지. 아아 봐버렸어. 저 줄 봐봐. 무서워. 줄이 점점 빨리 흔들려. 에라 몰라 뛰어. 친구 하나가 뛰기 시작하자 줄줄이 뒤따라 뛴다. 야산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을 반쯤 감아 달린다. 누군가가 야 그만 됐어. 이제 안 보여할 때까지. 고개 숙여 달린다.




가파른 오르막 길.

공원에 도착했다. 안경 쓴 친구가 대뜸 배가 아프다고 했다. 공원 내 공중화장실로 갔다. 친구는 혼자 못 들어가겠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친구들과 꼬마는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갔다. 소변기가 네 칸 있고 뒤로는 칸막이가 네 칸. 오래된 푸세식 화장실. 나무로 만들어진 문. 문에는 엷게 하늘색 페인트가 칠해졌다. 군데군데 낡아서 표면이 거칠다. 문을 열자 끼익 소리가 났다. 안경 쓴 친구는 두 번째 칸에 들어갔다. 푸세식이라 그런지 칸칸마다 작은 창이 나 있다. 꼬마는 화장실에 온 김에 소변을 보았다. 다 보고 어쩌지 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야 니들 거기 있지? 나 무섭단 말이야. 대답 좀 해. 앞에서 기다리던 친구 하나가 응 여기 있어 걱정 마, 라고 했다. 그러자 안심된다는 듯 안경 쓴 친구가 주절거렸다. 윽 여기 냄새 지독해. 더러워. 몇백 년 묵은 것들이 발아래 가득해. 어떤 모양일까. 딱딱하겠지? 어두워. 잘 보이지도 않아. 야 니들 아직 거기 있지? 물어보자 기다리던 친구가 말했다. 그래 여기 문 앞에 있잖아. 걱정 말고 천천히 눠. 안경 쓴 친구는 그럼에도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야 정말 문 앞에 서 있어? 목소리가 좀 멀찍이서 들리는 것 같은데. 안 되겠다. 내가 문을 똑똑 두 번 두드릴 테니 너도 똑똑 두 번 두드려봐. 안경 쓴 친구가 문 안쪽에서 쪼그려 앉은 채 똑똑 노크했다. 이윽고 문밖에 기다리던 친구가 똑똑 두드리며 답했다. 그제야 안경 쓴 친구는 안도하고 볼일에 열중했다. 아 배 아파. 아까 너무 빨리 뛰었더니 속이 엉킨 거 같네. 정말 그 파란 줄 너무 싫어. 누가 좀 떼줬으면 좋겠는데. 야 거기 있어? 물으면서 다시 똑똑 두드렸다. 그러자 이번에도 똑똑 밖에서 확인해 주었다. 야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노크만 하지 말고. 안경 쓴 친구가 연신 말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잠깐의 정적. 안경 쓴 친구는 와락 겁이 나 문을 쾅쾅쾅 세게 두드렸다. 와중에 안경이 손등에 걸려 벗겨졌다. 야 거기 있어? 내 안경이 떨어졌어. 어디 갔지? 급해서 바닥을 더듬었다. 더듬는데 아까보다 조용하면서 간격이 느린 소리. 똑 똑 똑. 앞에 있구나 싶어 친구는 말했다. 야 휴지 좀 줘. 그러자 등 뒤에서 기묘한 말소리가 들렸다. 파란 휴지 줄까 하얀 휴지 줄까. 그때 안경이 손에 잡혔다. 장난치지 마. 재빨리 안경을 쓰고 돌아보는데 보이는 게 없었다. 어두웠다. 오래된 공중 화장실. 실내의 풍경이란. 찬찬히 보니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한줄기 빛. 기다란 빛이 창에서 화장실 모서리로 이어지고. 빛에는 먼지 알갱이가 둥둥. 어린아이 팔목만 한 굵기의 빛. 그 외는 전부 어둠. 타일은 여기저기 깨지고 검정이 묻었다. 친구는 순간 신비로운 정경에 취해 눈을 뗄 수 없었다. 빛이 들어오는구나. 빛이 오는데도 여전히 어두워. 다시 소리가 울렸다. 파란 휴지 줄까 하얀 휴지 줄까. 그때 파란 줄이 보였다. 야산 나무에 걸려있어야 할 파란 줄이 창에서 내려와 변기까지 걸쳐져 있다. 마침내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고 정신이 번쩍. 친구는 바지도 올리지 못하고 후다닥 뛰어나왔다. 나오는데 문 앞에 있어야 할 친구는 물론이고 아무도 없다. 어디 갔지? 뛰쳐나온 친구는 마구 소리 질렀다. 아악 귀신이다! 파란 목줄이다! 그러자 화장실 건물 뒤켠에 모여있던 친구들은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안경 쓴 친구는 그런 친구들을 보고 너네 봤어? 파란 줄. 야 바보, 그거 우리가 말한 거야. 그러자 안경 쓴 친구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파란 휴지 그거 말고. 내가 있던 문에 노크는 누가 해준 거야? 그러자 꼬마가 대답했다. 아무도 없었어. 내가 마지막으로 나왔는데. 우리 다 여기 뒤쪽 화장실 밖에 있었단 말이야. 안경 쓴 친구는 중얼거렸다. 그럼 파란 줄은.




이번만큼은 정말 안 봐야지.

안 볼 거야. 해거름에 더욱 어두워진 길. 공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반드시 가야 하고 통과해야 하는. 그리고 볼 수밖에 없는. 꼬마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서 걸었다. 친구들 모두 그리 걸었다. 그마저도 불안하여 손으로 오른쪽을 가렸다. 자 나온다. 여기야 막아. 보지 마. 누군가 소리치자 저마다 고개 돌리고 손으로 가린다. 됐어? 지나갔어? 꼬마가 물었다. 맨 앞에서 가는 친구가 말했다. 아직이야. 조금 더 가야 돼. 친구들은 조금 더를 버티면서 걸었다. 얼마큼이 조금 더일까. 얼마나 더 가면 됐다고 이제 지나갔다는 말이 나올까. 내 다리 내 걸음으로 직접 걸어야 하는 길. 꼬마는 무서웠다. 차에 타거나 업혀 가거나. 그런 게 아니라 몸소 발을 움직여 거쳐가야 하는 게 두렵다. 발을 디딘 여기. 옆에 저기에서. 나뭇가지에서 지켜보리라. 지켜보는 눈. 시선은 우리가 나타난 처음부터 본다. 보면서 최대한 가까이 지날 때까지. 그리고 멀리 등 뒤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겠지. 문득 등 뒤 어깨가 간지럽다. 귀신의 눈빛이 닿은 느낌. 간지럽지만 차마 긁지를 못한다. 긁으면 귀신이 휘릭 날아와 어깨에 걸터앉을 것만 같아서. 너는 내가 보는 걸 아는구나 할까 봐. 날 알아봤구나 하면서 올 것만 같다. 다 왔어. 이제 괜찮아. 눈 떠. 누군가의 말에 꼬마는 눈을 떴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이럴 수가. 그곳은 나뭇가지 바로 코앞. 정면이다. 눈앞에 찬란히 나부끼는 줄. 파랗다. 파란 줄이 나뭇가지 여기저기 불규칙적으로 아무렇게 매달려서. 얼기설기 휘날린다. 깃발이 펄럭이는 것처럼. 미친놈 거짓말이네. 꼬마를 향해 날아든다. 멈춰서 동공이 커지도록 세세히 본다. 매달린 사람. 아무렇게나 몸뚱이가 흔들리고 얼굴마저 파랗다. 흐느끼는 동작. 여인의 슬픔. 울면서 나무에 줄을 매다는 광경. 어떤 사연일까. 두 손 모아 기도하고. 한동안 눈 감았다가. 눈을 떠 목에 줄 매다는 손짓.


뭐해? 친구가 꼬마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가자. 그만 봐. 그제야 정신이 들어 머리를 부르르 떨었다. 내가 지금 뭐하지? 분별이 가지 않았다. 어쨌거나 친구의 뒤를 따랐다. 어딘가 홀린 것처럼 보였던 순간. 꼬마는 등 뒤에 간지럼을 느끼며 걸었다. 가는데 골목에서 안경 쓴 친구가 동생과 함께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꼬마는 뜨악하여 물었다. 너 언제 집에 갔어? 지금 공원에서 오는 길 내 뒤에 있었잖아. 무슨 소리야? 나 오늘 안 갔는데? 하루 종일 집에 있었어. 엄마가 아파서. 동생 돌봐야 했거든. 안경 쓴 친구는 꼬마에게 자신의 뒤를 보라고 했다. 녀석의 뒤로 어린 동생과 아픈 엄마가 보였다. 꼬마는 놀랐다. 분명 같이 다녀왔는데. 화장실에 들어간 건 누구란 말인가. 파란 휴지 줄까 하얀 휴지 줄까 물었을 때 대답한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며칠이 지났을까?

언젠가 안경 쓴 친구가 말해주었다. 꿈속에서인가. 너희들이랑 공원에 화장실에 간 기억이 나. 거기서 누군가 파란 휴지 줄까 하얀 휴지 줄까 하는데 내가 놀라서 뛰쳐나온 거. 근데 그건 분명 꿈이었어. 난 그 날 종일 집에 있었으니까. 잠에서 깨어 집에 있는데 누군가 내 방 문을 계속 똑똑 두드리는 거야. 엄마인가 했는데 주무시고 계셨지. 동생인가 했는데 동생은 아직 젖먹이야. 아무튼 그 소리 때문에 나와서 노는데 니들이 오더라고.


어느 날부터 그 길을 지나는데 파란 줄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걷어버렸나. 누가 치웠는지 모르지만. 또 어느 날은 파란 줄이 달렸던 나무도 헷갈렸다. 어느 나무던가. 그리고 또 어느 날부터는 그 길마저 아리송해졌다.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야산. 새 길이 뚫리고 새 건물이 들어섰다.


어디에 매여 있을까? 궁금하지만 눈 가리던 이물.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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