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 미팅 (진주성 개천예술제)

니가 왜 거기서 나와?

by 머피



진주성 광장에서 반팅을 했다.

광장은 박물관 앞이다. 큰 계단식 객석이 무대를 앞에 두고 빙그르르 둘러싼다. 고등학생의 반팅. 반팅이란 뭘까. 여기서 팅은 앞에 '미'를 잃어버림에도 줄곧 만남을 의미한다. 반은 말 그대로 1반, 2반의 반이다. 반과 팅이 만나 이른바 반팅이 되는데 그것은 단체 미팅 중 하나로 잘 나가는 반의 잣대가 되기도 했는데.


유달리 한 해 꿇은 재수생들이 많았던 당시 아직 재수생과 재수생 아닌 학생의 간극이 클 때, 당찬 재수생 친구 하나가 교탁 앞에서 말했다. 이번 토요일 오후에 미팅이 있는데 먼저 지원자부터 받겠다, 손들어봐라, 했다. 아무도 손들지 않다가 재수생 친구가 쾅! 하고 교탁을 치며 부라리자 주뼛주뼛 손이 올라왔다. 너! 너도 손 들어. 너도, 너도! 우리 반에서 도합 스물일곱이 나왔고 여고에서도 맞춰서 스물일곱이 나왔다. 재수생이 말했다. 한 줄로 서봐. 일단 남자는 남자끼리 1번부터 27번까지 정했다. 남자 1번이 광장 중앙으로 나가면 여자 1번이 나와서 조우하는 식이다. 소위 짝짓기였다. 이쪽에서는 남학생 무리가, 저쪽에서는 여학생 무리가 서로를 지켜보았다. 무리 속에서 개인이 개인을 쳐다보지만, 서로의 번호를 알 길이 없었다. 네 번호가 뭐니? 물으면 반칙이라고 당찬 재수생이 막았다. 무조건 번호대로 짝이 정해진다. 번호는 임의로 정했다. 임의성의 문제. 그것은 공평을 부여하고 운명이라는 포장지를 두른다. 게다가 비밀이었다. 임의로 짝이 정해지니 임의로 정해진 짝과 평생을 함께하라. 아무리 애틋한 눈으로 서로를 갈망하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정해진 운명대로 순응하여라. 비록 평생이라는 단서가 달리지 않았지만 달린 것처럼 무서웠다. 나는 여학생 무리를 보면서 파악에 들어갔다. 딱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제발 쟤만 아니면 누구든 괜찮을 거라 기도했다. 왜 그런 기도를 했나. 나름 비장한 마음이었다. 모두 치마나 짧은 바지를 입었는데 걔만 긴 바지를 입었다. 그것도 블랙 기지 바지. 나는 까만 기지 바지가 싫었다. 기지 바지는 당찬 재수생이나 입는 바지였다. 나는 14번이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앞으로 나갔다. 떨렸다. 마음에 드는 이가 나오길 바라는 게 아니라 제발 아니길 바라는 이만 걸리지 않게 해 주소서, 하고 빌었다. 왜 그리 움츠러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두려운 느낌. 공교롭게도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여학생 무리에서 제발 움직이지 말라고 바랐던 아이가 나를 따라 움직였다. 정말이지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네가 왜 하필 14번이냐, 나는 내 번호 14번을 저주했다. 기어이 제발 걸리지 말라는 아이가 내 짝이 되었는데, 나는 세상이 다 무너지는 듯한 절망에 고개 들 수 없었다. 이것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바꿀 수 없는 사고, 운명, 전쟁, 참상이 아닐까. 원하지 않는데 함락되는, 어느 순간 다 내려놓아 절망이라는 감정을 깊이 배운. 나는 짝이 생겼지만, 내 땅이 아닌, 짝 아닌 여학생들을 아쉬운 눈길로 둘러보았다. 그러자 짝은 나에게 주어진 짝만 보고 다닐 것이지 왜 다른 이를 쳐다보냐며 벌써 아내라도 된 양 타박을 시작했다.


다행히 우리는 짝으로만 다니지 않았고 3대 3으로 다녔다.

우리뿐 아니라 여고생도 14번부터 16번까지, 처음 정해진 1대 1, 누가 뭐래도 내 짝은 바로 너라고 단정 짓던 짝이, 이제 누가 당신의 짝인지 모호한 3대 3 단체가 되었다. 어쩌면 자유로이 다시금 고를 수 있는 변수가 생긴 것일지도 몰랐다. 진주성 매점 테이블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고맙게도 누군가가 우리 다시 짝을 정하자, 라고 말하며 소지품 고르기를 하자고 했다. 이것은 주어진 번호보다 적극적인 쟁취가 아닌가. 막상 내가 고를 차례가 되어 물건을 쏘아보자 한 여학생이 그래, 그게 내 거야, 얼른 집어, 라고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의 파트너 16번을 찍었다. 16번 여학생은 인사동에 살았고 나는 신안동에 살았다. 인사동과 신안동 주민은 남성동 서문으로 나가야 한다. 나는 최초의 짝 14번을 냉정히 버렸다. 14번 너는 공북문으로 나가야 하지 않느냐, 혼자 가라, 그렇담 나는 인사동 주민을 데려다 주마, 같은 방향이니 같이 갈까 하면서 서문으로 나갔다. 서문에서 인사동 골동품 거리를 지나갈 즈음 16번 그녀와 나는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그리고 인사동 그녀 집 대문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초등학교 동창임을 알았고 이것도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운명론을 거론하기에 이르러 14번과 16번은 숫자상 꼭 들어맞지는 않지만, 편의상 얼마든지 같은 번호라 해도, 생각을 달리하면 2번의 어긋남이 아니라 고작 2번의 품 안에 있는 것이고, 번호는 기타 형편을 고려 않고 임의로 정해졌기에 이처럼 능동적으로 짝을 바꾸는 건 엑스세대 현대인의 너무도 당연한 권리가 아니겠느냐, 라고 해석 내리게 되었다. 마치 가까이 사는 주민들이 서로 간의 집을 막 바꾸어도 괜찮고 배우자를 바꾸어도, 나라를 바꾸어도, 사는 땅을 바꾸어도 괜찮다는 식이었다. 물론 순응에 비켜간 만남은 오래가지 않아서 우리는 초등학교 동창 하나를 각기 잃게 되었다. 박물관 앞 광장은 짝짓기 상흔으로 그곳을 지날 때마다 영원히 잿빛으로 상기되게 되었고 서문에서 인사동까지 늘 멀뚱했던 나 14번과 잔인한 여학생 16번을 만나는 아픔의 길이 되어버렸다. 애당초 내게 버림받은 여학생 14번은 훗날 내 친구의 배우자가 되어 간간이 소식 듣는 중이다. 그러고 보면 진주는 좁은 동네다. 엊그제 녀석 sns를 보니 집들이를 한다고 그러던데 연락이 오면 한번 가볼까 한다.




왜애앵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이어서 순찰차가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면서 진주성 안으로 진입한다. 순찰차에서 안내방송이 나왔다.


알려 드립니다. 진주성에 계신 시민 여러분들께서는 속히 성 밖으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8시 이후로는 진주성에 계실 수 없습니다.


진주성은 저녁 8시가 넘으면 우범지대로 변하였다. 8시 이후로는 산 사람이 머물 수 없고 죽은 자들만 머물 수 있다.


어서 나가 주세요. 거기 데이트하시는 분들, 이제 부모님이 계시는 곳으로 귀가하세요, 진주성은 8시 이후 통제됩니다. 거기 나무 뒤에 숨은 학생, 하나 둘 셋, 자아 세 명은 어서 나가주세요, 방금 움직인 네 번째 학생! 학생도 해당됩니다. 거기 촉석루 난간에 엎드린 분, 방금 모자 벗은 아저씨, 다 봤습니다, 지금 돌아보시는 분, 나 맞냐고 손가락 가리키는 분 모두 해당합니다. 어서 나가 주세요.


어두컴컴한 길이 많아서 진주성은 불량 학생들이 어슬렁거리던 대표적 명소였다.

저녁 8시가 되면 집에 가거나 숨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친구와 나란히 잔디밭에 엎드려 숨죽였다. 순찰차는 진주성 곳곳에 빛을 쏘며 지나갔다. 식은땀이 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불안에 떨며 버텼다. 마침내 순찰차는 순찰을 끝내고 성 밖으로 나갔다. 살아남았다. 밤의 진주성은 누구의 것일까. 산 자가 머물 수 없다고 했기에 나와 친구는 산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죽은 자도 아니었다. 걸리지 않은 자들은 여기저기 많았다. 네 번째 이후의 학생들도 무사했다. 걸리지 않고 통제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의 시간이 시작되는 시간. 저녁 8시. 살아남은 자들은 함께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데이트했다. 그들은 자유로이 다니며 진주성 내 나무와 길섶과 사당을 비틀비틀 거닐었다. 어두컴컴한 가로등 불. 은은한 빛 아래 날벌레가 무수히 달려들던 곳. 죽은 자 위에 놓인 길. 산 자가 평화로이 살다가 지나가는 곳. 성벽에 바짝 귀 기울이면 6만 성민의 고함이 새어 나온다.




매년 시월이면 예술제 전야제를 한다.

전야제의 하이라이트는 불꽃놀이다. 불꽃놀이는 저녁 8시에 한다. 불꽃놀이를 보려고 무려 1년을 꼬박 기다린다. 언젠가 불꽃놀이를 진주성 안에서 지켜보는데 머리 위에 파편이 떨어진 적이 있다. 퍼퍽! 이게 뭐야! 파편을 맞은 나는 놀라서 휘청거렸다. 그러다 파편을 주워 움켜쥐니 아직 따땃하니 온기가 남아있었다. 1592년 가을 진주성에서 충무공은 왜군을 향해 포를 쏘았다. 불꽃을 쏘는 소리가 펑펑! 났다. 따당 따당 조총을 쏘는 왜군 앞에서 충무공은 당당히 손짓하며 펑펑! 포를 날렸다. 이처럼 시원한 장면이 있었을까. 아무렴 그날의 파편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파편 조각을 손에 쥐자 몸이 떨렸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았다. 저 사람 파편 맞았어. 안 뜨겁나. 파편이 큰 거네. 부러워하는 시선들을 뒤로하고 나는 큼직한 파편을 곁에 있던 친구에게 주었는데 무언가 대단한 선물을 한 것 같은 전율이 일었다. 무척이나 감격해하는 친구를 보면서 나는 퍼뜩 죽은 이들을 떠올렸는데 죽은 이들의 얼굴을 몰라 그저 숫자만 헤아린 기억이 난다. 1번부터 27번.


남자 14번은 여자 16번을 넘본 것을 지금껏 여자 14번에게 길이길이 놀림받았다. 괜스레 넘본다고 생채기만 남긴 나날. 언젠가 친구와 진주성 아래 오솔길을 내려가 인공 다리를 건너는데 돌연 머리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펄럭였다. 그것은 거대한 날개였다. 믿기지 않았다. 평소 사람이 다니지 않는 절벽 아래 강변이기에 새는 몰랐을 터다. 바로 머리 위, 너무도 가까웠다. 펄럭 펄럭! 바람이 머리칼을 날렸다. 좌우로 날개를 펼치니 하늘에는 어둠이 드리웠고 펄럭이는 날갯짓 소리는 차라리 장엄하고 웅장했다. 왜 갑자기. 네가 왜 거기서. 거기에 사람이 있는 줄 몰랐던 새는 여느 때처럼 거기를 날았고 거기에 새가 있는 줄 몰랐던 우리는 새를 보고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랬구나. 잊고 살았다.


여기 봉황이 살았고 아직 날고 있다는 것을. 여기는 남강이 흐르는 진주의 중심, 진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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