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었어. (단편소설)
머나먼 하늘. 코스모스 가득한 작은 마을.
키 큰 코스모스가 찬 바람에 하늘거린다. 그 속에서 그녀가 보인다. 그녀는 치마를 팔랑거리며 코스모스 길을 거닌다. 멀리서 나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지만, 그녀는 나를 보지 못한다. 마치 누구도 나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하늘 아래 온전히 머리를 드러내는데 왜 보이지 않을까. 아직 투명한가. 언제쯤이면 색깔을 입을 수 있나. 그녀도 나를 보지 못한다. 수많은 이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나는 아는 사람 부류에 속하는데도. 아는 이들 중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채 그녀는 묵묵부답 제 길만 간다. 궁금하지도 않나. 나는 늘 여기 있다고 소식 전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차마 그러지 않는다. 왕왕 참지 못하고 목메어 불러보기도 하지만, 대답이 없다. 부르는데도 연습이 필요한 걸까. 목이 잠겨서 입 밖으로 당신 이름을 똑똑히 뱉어내기가 힘들어.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코스모스 들판만 보인다. 찬 바람이 불면 끝없이 쓸쓸해지는 마을. 그토록 외로운 안식처. 나는 처음 북천이라는 이름을 듣고 그러한 풍경을 연상했다. 왜 그런 상상을 했을까.
코스모스의 자줏빛 물감이 꽃밭을 덧칠한다. 계절이 익을수록 색상은 진해진다. 진해지다 못해 꽃이 시들 때까지 북천의 하늘에 바람이 분다. 우연히 만났지만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그이는 나를 봤으면서도 차마 알은척을 못 한다. 모른 척 지나치지만 우리는 이미 인사 나누었고 안부를 묻고 답한다. 참지 못하고 당신에게 묻는다. 저기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벌써 그렇게? 놀라워. 당신은 얼굴이 옛날 그대로 하나도. 어떻게 이다지도 같을 수가? 그런데 어디 그 얼굴이 진짜인지 한번 만져 봐도 될까? 이쪽으로 조금만 더 가까이.
늪에 빠졌다.
옴짝달싹 움직일 수가 없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빠져들고 옥죄어온다. 그녀는 어물쩍 입을 벌려서 천천히 나를 끌어들인다. 나는 뒤돌아 달아나려고 손톱으로 박박 바닥을 긁지만 무엇하나 걸리는 게 없다. 안간힘을 써 보지만 결실이 없다. 결국,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몸에 힘이 쭉 빠진다. 끌려간다. 거미줄에 말려서 들어간다. 슬며시 그녀를 보니, 순간 내가 잘못 본 것일까, 믿기지 않는다. 그녀가 미세하게 웃는 듯. 내가 죽어가는 게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마치 거미가 포식자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 같다. 당장은 미동도 없이 걱정스러운 얼굴의 페르소나, 모두 그리 보리라. 그러나 나는 안다. 특별한 구원이 없는 한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 테다.
지극히 특이한 놈이 스스로 특이하지 않다고 말하려다 더더욱 특이하게 변해서는 아직도 내가 특이하게 보이냐고 툭 던져 묻는다면 그녀는 어떤 대답을 할까. 나는 구렁이에게 씹히고 뜯겨 살점을 빼앗기다 자신을 죽이지만, 그 성질은 어디 가지 못하고 냉큼 구렁이에 빌붙어 놈의 살로 남았다. 그렇게 지금껏 존속되어 사라지지 못한다. 그래서 다짜고짜 너를 죽여 질겅질겅 씹지만 차마 삼키지 못하고 가슴에 묻었건만 이렇게 이런 모양의 꽃이 되어 만날 줄은 몰랐다. 깨달음은 늦게 왔지만 나는 거부했고 온전치 않지만, 세상 끝 냉정한 종결을 전부 감당해야 했다.
노을이 물드는 시각. 가로등이 켜지는 하늘.
그녀는 진주성 서장대에서 남강의 천수교를 내려다본다. 저녁나절 자전거를 타고 천수교를 지나던 나는 서장대를 올려다본다. 내려다보고 올려다본 시선이 마주치는데 그녀는 날 볼 수가 없고 나는 그녀를 보지 못한다. 서장대의 가로등이 오렌지빛으로 빛난다. 가로등은 그녀가 말할 때마다 반짝인다.
이 추운 곳에 나 혼자 내버려 두면 어떡하니?
그녀의 말이 들리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나는 무어라 대답하고 싶지만, 가슴속 뜨거운 게 올라와 아직 입을 열지 못한다. 너무도 기다리던 말이어서 그렇다. 가슴이 메어 온다. 나 역시 너를 기다린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내 말은 그녀에게 들리지 않는다. 그녀 앞에서만 내 목은 마르고 갈라져 말을 할 수가 없다.
요즘은 내 얼굴 보러 왜 안 오니?
서장대의 가로등은 처절히 외롭다며 운다. 그녀와 딱 한 번 진주성을 거닐 때 우리는 서장대에서 천수교를 내려다보았다. 나란히 난간에 올라 걸터앉아서 천수교의 가로등이 몇 개인가 세었다. 천수교 아래 남강물이 새카맣게 대비되어 여기서 삐끗하면 어둠 속에서 논개를 만날지도 모른다며, 내 손을 꼭 잡으라 일러두었다. 내 손을 꼭 잡은 그녀는 먼젓번의 나처럼 똑같이 말했다.
조금만 더 일찍 말하지.
지금은 늦었어.
키스를 하다가도 그녀는 속삭였다.
왜 작년에 말하지 않았어?
작년이 아니더라도 왜 지난달에 나타나지 않았어?
휴학을 왜 그리 빨리 한 거야?
말하며 눈물 흘렸고 그녀의 눈물은 내 뺨에 옮겨와 흐르다 입가에 머물더니 결국 짜디짠 바다가 되었다. 나는 가끔 바닷물을 마신다. 서장대를 올려다보며 꿀꺽꿀꺽 마신다. 소금물 때문에 내 목은 핏덩이 져서 녹아내린다. 오렌지색 물감이 서장대 주변을 북북 덧칠한다. 바닷물이 천수교 주변까지 침투하자 나는 서둘러 자전거를 돌려 망경동 둔치로 내려간다. 돌아가자.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망경동 둔치를 따라 달린다. 그러자 바닷물이 따라온다. 자꾸만 덧칠되어 붉게 타버린 진주성이 애타게 부르는데도 끝내 외면한 채 앞만 주시하며 달린다.
너는 죽었는데 왜 자꾸 나타나니? 내가 살던 동네는 너의 아파트와 가까웠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너의 아파트에서 아주 먼 곳으로 떠났다고 말하고 싶지만, 목이 메어 말하지 못한다. 바닷물에 옷깃이 젖을세라 나는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남강을 향해 내 말을 대신 전해 달라고 한다. 바람을 가르며 속으로 말한다. 이젠 일부러 찾아갈 일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세월이 지나고 나는 종종 찾아가 본다.
굳이 자전거 타기 힘든 그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