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전화

빠져든 순간 (단편소설)

by 머피


공중전화의 작은 화면에 빨간색 숫자 ‘5,000’이 선명하다.

긴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가 간다. 덜컥! “여보세요.” 중년 여성의 목소리다. 신속하게 수화기를 내려 통화를 끊으려다 대뜸 그녀의 이름을 대고 바꿔 달라 말했다. 멀리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기다렸다. 이번엔 그녀의 목소리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구세요? 혹시?” 뚜뚜뚜! 내가 끊은 것이 아니다. 그녀의 ‘여보세요’ 목소리가 이어질 때부터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여보세요’ 한 번에 천 원꼴이다. 빨간색 숫자는 어느새 제로가 되고 통화는 자동으로 끊겼다. 나는 입 열어 목소리를 내려다가 그 줄어드는 숫자가 기막혀 끝내 밖으로 내보내지 못했다.


군에 입대하고 먼지 같은 시간이 지나 고독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면 그녀를 떠올렸다. 훈련이 힘에 겨우면 그녀를 생각했다. 그러다 목소리라도 한번 들었으면, 하고 그녀가 유학 갔다던 캐나다로 전화를 걸었다. 이제 막 일병 딱지를 뗀 날, 새벽에 불침번을 서고 잠들기 전 지하 공중전화 앞으로 내려갔다. ‘여보세요’라는 목소리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종종 그녀를 찾았지만, 그녀 앞에 나타나지는 않았다. 이미 끝났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녀가 새로운 곳으로 떠난 것처럼 나는 새로운 사람과 만났고 당시 유행이던 지나간 책장은 다시 읽지 않는다는 관념에 충실히 따랐다. 그럼에도 벤치에 계속 앉아서 기다리곤 했다. 어쩌면 지독히도 배타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저지른 행동에 나는 이미 용서받지 못하고 회복하지 못할 상처를 남겼고 안았다. 다시금 이어가더라도 더 깊은 상처만 남길 뿐 새 살은 차오르지 못한다. 관념은 고집을 낳았고 고집은 신념이 되어 나를 옭아매었다. 그렇게 마음은 낙화하여 그저 유수에 몸을 기대었으니 그렇게 세월과 함께 늙으며 흘렀다.




며칠 전 그 아파트에 가보았다.

어느덧 아파트는 낡았고 벤치 위로 덩굴이 무성하여 앉을 수 없었다. 벤치는 자신이 얼마나 오래도록 버티었는지 내게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내가 다가가 나 왔다며 손으로 툭 건드리는데 마치 모래성이 무너지듯 부서져 흘러내렸다. 그리고 덩그러니 세월의 자태를 끄집어 놓았다. 오래된 벤치. 오래전 그날 내가 앉았던 나무판 다섯 개중 세 개가 비어 있었다. 그나마 남은 두 개도 엉성했다. 자세히 살피면 그들 두 개마저 바르르 떨고 있으리라.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아. 곧 부서진다, 지금이라도 봤으니 됐어, 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나 말고도 벤치가 기다리는 이 있다면 그를 기다리느라 녀석은 버티는 것일 터다. 초록의 물감이 나무 벤치를 덧칠하고 있었다. 수없이 덧칠되어 벤치는 초록과 어둠에 가까운 색으로 진하다. 초록과 검정 사이는 오래된 색. 오래된 색은 두렵다. 두려워서 쉬 앉지를 못한다. 벤치는 오래된 초록에 점령당했다.


아파트 정면 앞 작은 빌라의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골목.

그곳에서 첫 키스를 나누었다. 골목 사이 한쪽 벽으로 그녀를 밀어 세우고, 실제 민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등이 벽으로 향하게끔 유도했다. 시내에서 데이트하고 진주성 동문으로 들어가 서장대를 거쳐 그녀의 아파트까지 걸어왔다. 긴 여정에 많은 대화를 했다. 깜깜한 밤. 마른 입술로. 그녀의 입술이 벌어져 구렁이는 용을 만났다. 둘은 몸을 꼬거나 교차로 제압하고 제압당하며 서로의 존재를 위해 땀 흘렸다. 구렁이는 용을 만나, 마치 자신도 용이 된 것처럼 움직였다. 어쩌면 기회는 지금뿐일지도. 숙주를 위해 본래 소임이 아님에도 용이 된 것처럼 부여된 의식을 충실히도 이행하였다. 구렁이는 처음 용을 만나 그 비늘의 감촉을 잊지 못했다. 자신의 몸뚱이가 용의 비늘에 갈기갈기 찢어지는도 모르고. 구백구십구 번 솟아오르다 마침내 단 한 번 구름 위 용을 보았다.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그녀가 부재한 벽에다 손대고 이따금씩 오래도록 서 있었다. 서서 그녀와의 거리가 이쯤이었나, 가늠하고 떠올렸다. 아파트 상가 샛길로 보이는 벤치를 본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계단 입구에 그녀가 보일 것만 같다. 그러나 이제 시간이 지나고 어쩌다 그 아파트 곁을 지나쳐도 그때의 감정은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구렁이는 용을 잊었다. 마침내 그녀를 떠나보냈다고 비웠다고 여겼다. 언제부턴가 왜 예전의 감정이 되살아나지 않나 의아했다. 그동안 내가 보지 못한 곳. 북천에 이르러 어쩌다 발 앞에 놓인 길. 어렴풋이 그 시절 기억을 떠올려본다.




붉은 햇빛이 길게 늘어져 찌릿 얼굴에 와 닿았다.

눈이 부셨다. 평소 같으면 이마에 손 대 빛을 가리겠지만 그냥 두었다. 여느 때의 강렬한 빛이 아니라 곧 넘어갈 가녀린 빛. 눈 감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는 맞은편 태양을 향해 걸어가려다 주춤주춤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다가오는 풍경을 가만히 보았다. 그녀는 맞은편 저쪽에서 해를 등지고 걸어왔다. 주변의 노랑 광선이 섬세하게 구석구석을 찌르며 오로라 역할을 하고 오롯이 그녀만을 주목하게 했다. 내 곁에는 친구들이 함께하고 그녀도 옆에 동기생들과 무리 지었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그녀와 나의 시선은 마치 자석처럼, 이끌리듯 마주치고 서로 눈빛은 햇빛의 붉은 바탕 속에서 그 일부가 된 듯 멈춰 깜빡이지 못했다. 그녀 역시 줄곧 나를 보며 왔다. 한 번쯤은 다른 곳으로 돌아볼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여느 때의 얼굴이 아니라 곧 넘어갈 가녀린 빛이 찍어준 모습이기 때문일까.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전처럼 마냥 기다린다고 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야. 세상에 오직 그녀와 나만 존재하는 듯. 주변 풍경은 모두 아늑한 이불이 되어 우리를 감쌌다. 늦은 오후의 끝. 햇빛의 마지막은 잠시간 강렬하고 포근하다. 빛은 마지막이 되어서야 급히 얼굴 부분 미처 닿지 못했던 곳까지 다가와 훅~ 고백의 숨결을 불어넣고는 날아가버렸다. 따뜻하다. 술 마신 듯 빛에 취했다. 제법 눈이 부실 법도 한데 눈동자는 확장되어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을 보듯 고정되었다. 그렇게 코앞에 마주칠 때까지 서로 시선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와 그녀는 서로에게 지켜볼 수 있는 간격을 고려할 때 가장 가까운 거리에 도착했다. 거리는 가까울수록 마법을 일으킨다. 옆으로 마주 서서 걸음을 멈췄다. 서로의 얼굴을 지그시 보았다.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을 각인하듯 한참 말이 없다. 그만! 이내 햇빛의 꼬리마저 사라지고 해 질 녘 회색 물감이 투명하게 덧칠되기 시작한다. 팔레트의 물감이 붓에 매달리려 몽글거린다. 한없이 밝던 얼굴에 두어 번 칠하니 점차 짙어지고 어두워진다. 결국 무어라 말을 건넨 거 같은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우연히 마주쳐 서로를 의식하고 바라보다 더 말하지 못하는. 어쩌다 그런 상황이 발생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얼굴을 말없이 오래 보면 오해를 산다. 다른 친구는 그녀가 마음에 든다며 내게 도와달라고 했다. 내가 그녀와 친한 것처럼 보였나 보다. 같은 대학 친구. 그러니 주변에서는 살아오는 동안 마냥 떠들고 이런저런 말들을 지껄인다.



자연스레 내 귀에 여러 정보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