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커

배경 사진만 찍고 돌아가려다가 (단편소설)

by 머피


익숙하다.

행여나 볼까 싶어 찾아왔던 아파트. 익숙한 정도로야 우리 집과 딱히 다를 게 없다. 다만 떨리느냐 안 떨리느냐의 차이. 제대 후 인격체는 새로운 자아를 형성하지 못하고 원세포의 명령에 따라 수없이 여길 거닐게 한다. 모습은 사라질지언정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구렁이는 다른 구렁이를 만났고 구렁이는 내게 색다른 관계를 선사한다. 그러한 관계에서 나는 정들고 정 떼며 졸업하고 취업하여 지내던 차, 주말을 맞아 진주로 내려왔다. 저녁을 먹고 무료함이라도 달래 보려 익숙한 곳으로 향하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로 와버렸다. 차는 알아서 아파트로 나를 데리고 갔다. 아파트 앞에 왔으니 적당한 곳에 주차하려 했다. 그리고 어둠 속 이쪽저쪽을 정답게 돌아보려 했다. 단지 그것뿐인데.


주변 모두 추억이 한가득 깃든. 아늑한 마음. 그리움은 어느새 추억으로 변했다. 추억에서 차츰 기억이 바스러지고 그러면 두근거림이 남을까.




어디로 가볼까?

베란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디로 가보려나. 나는 샤워하고 잠옷 차림으로 차에 사뿐 올랐다. 새로 산 차. 어디든 타이어가 푹신푹신 미끄러지듯 데려다 줄 테다. 타이어는 우직이 나를 보호한다. 굳이 내 발로 바닥을 짚지 않아도 모든 걸 대신한다. 나는 타이어의 마법에 빠져든다. 어디로든 타이어의 감촉 위에서 가벼이 움직인다. 도로의 방지턱마저 신속한 들숨 날숨으로 공기압을 조절하여 스윽 스무드하게 넘는다. 못 갈 곳이 없다. 망설임 없이 시동을 건다.


익숙한 그곳으로 간다.

아파트 정문 앞에서 나는 어둠에 의탁한 나머지 그만 아파트 안으로 과감히 들어간다. 경비실을 지나 아파트 입구 정면에 차를 세운다. 한동안 아파트 계단 입구를 주시한다. 만약 그녀가 아직 여기에 산다면 언제든 저기 입구에서 나올 것이다. 지금은 으레 만찬 후 산책 나올 시각. 어둠은 금세 짙게 깔린다. 눈에 띌까. 차가 흰색인 게 마음에 걸리지만 아무렴 선팅도 있는데 별문제 없으리라 여긴다. 더구나 복도에서 모른척했던 날로부터 몇 년 만에 들른 터. 그다지 거리낄 게 없다. 간격이 이만큼 벌어졌다고 멋대로 가늠한다. 다만 주차장에 빈자리가 없어 다른 차 꽁무니에 이중 주차한 것이 다소 걸릴 뿐. 고개 돌리니 벤치가 보인다. 한창 그녀를 만날 적에 저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기다리다 나타날 때면 어찌나 반가웠던지 그 떨리던 순간이 떠오른다. 벤치에 앉을 때마다 시선은 언제나 입구를 향했다. 다시 보자니 가슴 한쪽이 찌릿해진다.


동경하는 풍경.

혼자 무심코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그곳에 가면 마음이 편해진다. 눈에 담으면 안심이다, 하는 편안한 마음. 자기 전 맥주 한 캔이 달래주는. 커피 한 모금의 자각. 따뜻한 물 한 잔 축이고 눕듯이, 계절이 변할 때마다 어떤 모습이려나 궁금한 안부. 그렇게 계속 보다 보면 예전엔 저런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낡았구나, 변했구나, 변한 와중에 옛 모습이 조금이나마 남아있구나, 그때 나는 당신을 그토록 그리워했다, 그런데 지금은 변해 추억으로 간직하고, 기억조차 스멀스멀 연기가 되어 날아가. 그게 아쉬워 그냥 한 바퀴 돌아본다. 연기는 끊임없이 날아가고 날아간다. 그리도 무겁고 딱딱하고 거대했던 기억의 바위가 연기가 되어 소멸한다. 바위는 내가 움직일 때마다 여러 장기를 찌그러뜨렸다. 나는 감당하지 못하고 그것을 이고 지고 힘겨운 발걸음을 떼며 쓰러지고 감내하다가 이제 세월이 흘러 저쪽 끄트머리 꼬리쯤인가 불이 붙어 무게를 덜어내는 중이다. 하얀 연기는 드라이아이스 같다. 연기가 하늘에 이어지는 동안 그리움은 미세하지만 계속해서 휘발된다. 사라져 간다. 연기의 끝이 하늘에 다다라 점점 떠난다.




예전에 걸어올 때면 아파트 상가 옆 샛길로 벤치를 쳐다보기만 하고 다가가지 못했다.

가끔 시간 날 때 벤치가 시야에 들어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딴엔 벤치를 직접 본다는 것도 용기 낸 행동이었다. 왜 그리 움츠러들었나. 수축하고 수축하여 숨기만 바빴다. 아파트 정문이 보이는 빌라 골목에 머무르며 가만히 숨 죽였다. 밑에서부터 하나둘 층수를 세어가며 어디쯤인가 찾았다. 행여 베란다에 나와 빨래나 걷고 있지 않을까 망상에 헤맸다. 늘 멀찍이서 아파트 입구만 보고 돌아갔다. 만나지 못했지만 괜찮았다. 그것은 간식을 먹는 것과 같다. 간식을 먹다가 목이 메어 뭐 마실 것은 없나, 하고 냉장고를 쳐다보는 정도와 다를 바 없다. 냉장고를 쳐다본다고 해서 자동으로 문이 열려 음료수나 맥주가 내 손에 날아올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백번을 왔다면 한 번쯤 운수 좋은 날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천 번을 쳐다본다면 한 번쯤 음료수가 날아오겠지 했다. 볼 수 있다는 말은 멀리서 골목이나 사각지대에서 몰래 그녀를 지켜본다는 말이다. 몰래 숨어서. 스토커가 따로 있을까. 불쑥 내가 스토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무서운 존재. 무서움을 주기에 나는 아이 앞에 나타나면 안 되는 존재. 실체는 귀신이다. 망령이 되어 당신을 사랑하지만 차마 네 앞에 나타나지 못하는 야수. 밤에만 나다닐 수 있는 뱀파이어. 그림자만 먹고사는 괴물. 나는 이 아파트의 스토커다. 만나서 정답게 이야기했던 그 장소가 목적. 좀비처럼 찾아가 눈을 희번덕거린다. 나는 감히 조명 앞에 나서지 못하고 커튼 뒤에서 손만 내민다. 그녀가 지나가는 모습을 아슴푸레 볼 수 있다면 엄청난 에너지를 받아 생활에 활력이 넘칠 것만 같았다. 단순히 그런 기대만이 있었다. 이렇듯 떨리는 에너지만 받아가도 좋았다. 음료수는 직접 꺼내먹으면 그만이다. 뭔가를 기대하지 않던 나날이다.


놀라운 변화!

차를 아파트 입구에 당당히 주차한 것도 모자라 거기에 숨은 상태가 아니니. 이토록 가까이 머무는 것조차 처음이다. 이곳에 그녀가 여태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혼자 대단한 모험이라도 하는 양 가슴 떨려하는 게 웃긴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도 벌써 몇 해가 넘었다. 마주치더라도 바로 알아볼 수나 있을까. 나는 벤치에 앉기도 뭐해 차 안에서 커피만 홀짝였다. 주위에 만지작거릴 뭐가 없나 뒤적이다 문득 얼마 전 구입한 디지털카메라가 떠올랐다. 기왕에 온 거 아파트 입구나 한번 찍어보기로 했다. 오래전 그녀를 만날 때면 변함없이 고정된 배경만이 자리하였고 나는 미동 없이 바라보았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마저 늘 고정된 바탕화면이었다. 기다림 속 내겐 아주 작은 단위의 시간마저 아깝다. 그녀가 환히 웃으며 등장하던 그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고 싶었다. 단지 그 계단 입구를 찍고 싶었다. 다시 언제라도 나올 것만 같은 그곳.


사진만 찍고 돌아갈 요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