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둘러싼 것들을 던져 버리고 싶다
갑자기 생활이 굴레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늘 벗어나기를 바랐다. 지금 여기 내가 딛고 서 있는 장소에서 벗어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서 말이다. 장소적인 조건을 벗어나면 나를 둘러싼 다른 것들도 함께 떨어져 나가리라는 기대를 하며 살았던 적이 있다. 그래서 춘천에서 여주로, 광명에서 도쿄로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사는 곳을 계속 바꾸어도 끊임없이 들르게 되는 마음의 고향인 홍대-합정 일대도 그렇고 단 한 번 여행했던 곳이지만 다시 찾아가리라 마음먹는 여행지도 있다. 뜨랑, 치앙마이, 돌로미티가 그랬다. 프라이빗한 해변가, 등불 밝힌 가로수가 늘어선 환상적인 거리, 시름을 잊게 만드는 광활한 산맥. 그곳에 다시 찾아가 보리라 다짐해보지만 현실은 마뜩잖다.
반복되는 매일을 ‘굴레’라고 느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다시 돌아올 곳이 있어야 여행도 즐겁다는 생각을 하기는 한다. 일어나서 출근하고 다시 퇴근하고 자고 다시 일어나서 출근하는 삶에는 대체 무엇이 부족하기에 자꾸만 허기가 지는 것일까 고민해봤다. 정해진 테두리 안에서만 생활하고 같은 동선으로만 움직이다 보니 새로움이 아무것도 없는 거다. 내 경험의 폭은 내가 서 있는 장소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무리 책을 읽고 영상을 찾아보고 주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아도 이 허기를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관심사를 벗어나는 이야기를 할 리 만무하고 너튜브나 뉴스 기사조차 이제는 내 흥미를 고려한답시고 매번 비슷한 콘텐츠만 추천한다. 이로써 내 테두리 안에 나는 완전히 갇히게 되었다.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타계할 방법은 내가 서 있는 장소를 바꾸고 만나는 사람을 바꾸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바로 여행이다! 아마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방금 읽던 에릭 와이너의 책에서 아침에 침대로부터 나를 끌어내는 것은 ‘활동’이지 알람시계가 아니라는 문구를 읽었다. 평일에는 그렇게도 침대에서 나오기가 싫은데 주말에는 번쩍 눈이 뜨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생활은 나에게 평일과도 같고 여행은 주말처럼 온전히 내게 주어지는 짧은 휴식이다. 생활은 귀찮고 나를 무기력에 빠뜨리지만 여행은 나를 침대에서 너무나도 쉽게 일으킨다. 결국은 관점의 문제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일상을 여행처럼 즐기기엔 너무 생활에 익숙해져 버렸다. 적어도 ‘집-직장-집’이라는 도돌이표에 작은 변주라도 주지 않으면 곧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아주 작은 일탈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평일 저녁 단 하루만 시간 내어 홍대 화실에 다녀보기로 한 것이다. 원래대로면 내일모레가 첫 수업인데, 인원 미달로 폐강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앞선다. 이 작은 시도마저 좌절되면 정말 폭발해 버릴까 봐 신청한 강의와는 무관하게 집에서 혼자 작게 그림을 끄적여보기도 한다. 어제는 그림을 그렸고 오늘처럼 그림이 영 내키지가 않으면 이렇게 키보드를 잡고 두드려보기도 한다. 이렇게 무언가 끄적여 보는 것이 여행에 대한 갈망을 조금이나마 덜어내줄까 싶어서. 내 무의식이 시켰는지 그림 강의도 신청하고 보니 <여행 스케치>라는 주제를 다루더라. 그리는 동안이나마 나를 둘러싼 것들을 던져버리거나, 모조리 잊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