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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새우 아닌 고래” 라몬 파체코 파르도 교수

by 정중규

“한국은 새우 아닌 고래… 적극 의견 내고 타국과 마찰도 감수해야” 라몬 파체코 파르도 英 킹스칼리지런던 교수


라몬 파체코 파르도(45)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교수(국제정치학)는 지난 1일 본지 화상 인터뷰에서 “더 큰 힘에는 더 큰 책임이, 때로는 타국과의 마찰도 따르는 법”이라며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한국은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파르도 교수는 “한국은 경제·기술·국방·문화에서 명실상부한 ‘고래’”라며 이같이 말했다. 한국이 녹색 전환과 인공지능(AI) 규범 같은 글로벌 의제를 주도하며 개발도상국을 이끌어야 하고, 새 국제 질서를 향한 인류사적 격변 속에 특정한 ‘역할’과 ‘입장’을 요구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미·중 경쟁 속 한국의 노선에 대해선 “전략적 자율성과 미국과의 정렬(여러 정책에서 발을 맞추는 것)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며 한국이 자신의 역량을 통해 세계 질서에 건설적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고 했다.


라몬 파체코 파르도 영국 킹스칼리지 교수가 2023년 9월 7일 벨기에 브뤼셀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한국: 남과 북의 새로운 역사' 포럼에서 발언하고 있다. /브뤼셀(벨기에)=정철환 특파원



-어떤 점에서 한국을 더 이상 새우가 아닌 ‘고래’라고 볼 수 있나.


“많은 분야에서 그렇다. 한국은 세계 15대 경제국, 세계 10대 수출국이다. 구매력 평가 기준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대부분의 G7 국가와 비슷하고, 아시아 주요 경제국 가운데 평균 임금이 가장 높다. 기술 분야를 보면 반도체, 전기차, 전기 배터리, 친환경 해운, 바이오테크, 로봇 등 여러 부문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췄다. 국방 분야에선 세계 10대 군사 강국으로 꼽히고, 유럽·중동·동남아시아 전역에 주요 무기를 공급하고 있다. 계엄 사태 극복을 통해 민주주의 회복력을 보여줬다. 한국은 이제 아시아 최고의 문화 강국이다. 음악·영화·드라마·문학·요리·패션 등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문화를 가진 몇 안 되는 나라다.”


-그런 점에서 전 세계에 모범이 될 만한 ‘글로벌 국가’라고 할 수 있나.


“한국은 이미 나름의 방식으로 글로벌하다. 냉전 이후 ‘글로벌’이란 미국·서유럽의 민주주의·자유시장·자유주의적 가치·다문화주의를 따르는 걸 의미했지만, 이 개념은 최근 미국과 유럽 자체에서도 도전을 받고 있다. 한국은 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자유주의적 가치와 전통의 혼합, 일정 수준의 이민 개방을 결합한 모델이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 강화, 성소수자 권리 확대,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한 수용이 커지고, 직장 문화도 덜 경직적·위계적이 됐다. 지난 20년간 이민 인구 증가도 눈에 띈다. 유럽의 시각에서 한국은 점점 더 글로벌해지고 있다.”


-커진 역량만큼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이 영향력 없는 소국이라고 주장할 수 있던 시절은 지났다. 녹색 전환, AI 혁신과 규제 등에서 의견을 내고 규범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 또 성공적 발전 모델을 공유하고 개도국에 기술과 원조를 제공할 책무도 생겼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 전쟁, 중국·미얀마의 인권 문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과거엔 국제적 현안에 어떤 ‘입장’을 취하기를 요구받고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타국과의 마찰을 부른다. 그러나 이는 한국이 치러야 할 ‘관심의 비용’이자 강하고 영향력이 큰 국가가 감수해야 할 희생이다.”


-통일의 과제가 남아 있는 한국이 글로벌 리더 역할을 맡을 수 있나.


“독일의 교훈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통일 이후 독일은 유럽과 세계에서 더 중요해졌고, 안보 비용을 줄여 성장·복지에 재투자할 수 있었다. 통일은 나라를 더 크고 강력하게 만들며, 국방비를 다른 분야로 돌릴 기회를 준다. 다만 수십 년간의 분단은 서로 다른 세계관과 국가관을 만든다. 북한 주민의 ‘정신적 전환’을 지원하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 또 남북 소득 격차 때문에 인구 이동과 상대적 박탈감이 생길 것이다. 국가와 민간이 함께 북 주민의 경제적 잠재력을 낭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오늘날 동독 지역에서 보이는 불만이 재현될 수 있다.”


-김정은 체제는 언제까지 생존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붕괴할 거라고 예측하는 건 어리석다. 김씨 일가는 북한을 75년 넘게 통치했다. 다만 1990년대 소련, 2000년대 북아프리카의 사례처럼 예상 밖의 붕괴 사태는 언제든 올 수 있다. K팝·드라마에 대한 탄압은 북 주민이 한국을 동경하고 있고, 정권의 체제 선전에 더 이상 순응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한국은 어떤 전략적 입장을 취하고,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


“대화를 통해 한반도 안정과 북 정권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게 맞다고 본다. 제재가 완화되면 북 노동력의 제도권 편입도 검토할 수 있다. 동시에 군사적 억지력을 계속 구축해 무력 도발의 ‘상상’ 자체를 꺾어야만 한다. 북한 붕괴 시나리오에 대비해 북한 주민 관리, 엘리트의 반발 대응, 핵탄두 확보 등 현실적 계획을 마련하고, 이를 미국과 일본, 가능하다면 중·러와도 논의하되 통일의 주도권은 반드시 한국이 확보해야 한다.”


-트럼프 시대 한미 관계는 어떻게 가져가야 하나.


“미국 정책에 발을 맞추는 것과 자율성을 확대하는 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 더 이상 약소국이 아니고, 한미 동맹은 한국의 역량을 배가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반도체·배터리 기술, 수십억 달러의 투자, 미국 주도 구상에 대한 외교적 지원, 대만 유사시 필요한 기지와 조선소 등 미국에 필요한 자산을 갖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호주·캐나다·유럽·일본 등 비슷한 나라들과의 안보·경제·정치 네트워크를 촘촘히 해 자율성을 키워야 한다. 동시에 동남아·중동에서 영향력을 넓히면 미국 눈에 더 가치 있는 파트너가 된다.”


“한국, 아시아 최고 문화 강국” 지난달 30일 경기 용인 에버랜드 방문객들이 넷플릭스 드라마 ‘케이팝 데몬 헌터스’ 테마존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파르도 교수는 “한국은 이제 아시아 최고의 문화 강국”이라며 “음악·영화·드라마 등에서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문화를 가진 몇 안 되는 나라”라고 했다./뉴시스



-그렇다면 중국과의 관계는.


“한국은 이미 답을 낸 것 같다. 우호적 외교·교역·투자·관광은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가치관과 체제 등 구조적으로 한국은 미국과 더 가깝다. 국민 여론과 기업의 중국 투자 축소, 양국 간 영해·영공 긴장, 북 정권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감안하면 한국과 중국 간에 그 이상의 협력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한국이 기존 동맹을 넘어 EU·아세안·글로벌 사우스 등과 관계를 심화하려면.


“말이 아닌 행동이 중요하다. 외교·안보 당국은 전략 대화와 정보 공유·무기 지원에 나서고, 정부는 원조를, 기업은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가입 등 통상 확대도 필요하다. 지역별 수요에 맞춘 맞춤형 접근이 핵심이다. 문화는 국가별 차이를 넘어 한국이 표준화된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 분야다. 한류를 넘어 한국학, 언어·문학·음악 등 지원을 강화하면 인적 교류와 장기적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


-한국과 EU가 중국 의존을 줄이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데.


“과학 기술 분야의 공동 연구개발과 제조 분야의 공동 생산을 통해 양측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호라이즌 유럽(EU의 연구혁신 지원 프로그램)’의 한국 참여, 폴란드의 K2 전차 공동 생산 등이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한국행을 원하는 유럽 청년·엔지니어가 늘어나는 흐름도 공급망 협력 강화에 활용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정치적 극단주의와 사회 분열이 극심하다.


“한국은 그나마 다른 나라보다 나은 편이라고 본다. 체제·인종·영토 같은 근본 쟁점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격한 레토릭이 나올 수 있으나, 답은 법적 틀 안의 대화와 존중에 있다. 한국 같은 강한 민주주의에서 위에서 강요하는 단일성은 비현실적이기에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포용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당신이 보는 앞으로 80년, 한국의 비전은 무엇인가.


“한국은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만, 그 덕에 안주하지 않았다. ‘중국에 추월당한다’ ‘한류도 이제 정점이다’ 같은 서사가 반복됐지만, 현실은 달랐다. 앞으로는 여성·혼혈·성소수자·이주민을 아우르는 포용성을 넓히고, ‘선진국 따라잡기’가 아닌, 성숙하고 자신감 있는 한국에 맞는 정책과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 포용성은 한국이 계속 번영하기 위한 핵심이다.”



조선일보 파리 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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