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규 칼럼-시대유감]‘민주’도 ‘공화’도 사라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 합의제 민주주의로 헌법 정신 되살려야
대한민국 헌법은 제1조 ①항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작금의 대한민국이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민주주의의 외형적·절차적 요소, 즉 선거, 정당, 의회, 법치 등 제도적 틀과 절차를 갖춘 형식적 민주주의는 이뤘으나, 갈등지수 세계 1위 국가라는 지표를 지닌 것에서 드러나듯 공화국이라 부르기엔 미흡하기만 하다.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의 정신이 온전히 실현되지 않고 있는 반쪽 국가인 것이다.
거기에다 그 반쪽인 민주주의조차 파국지경으로 치닫고 있는 적대적 진영정치에서 드러나듯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 민주주의는 ‘우리와 다른 이’와 함께 살며 서로 윈윈하는 공존의 예술(art)인데, 여의도 안에서의 민주주의에서는 상대를 궤멸시키고 우리만 홀로 살아보겠다는 기술(art)만 횡행하고 있다. 이렇게 갈라치기와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어 ‘기본’을 잃어버린 오도된 민주주의에 온 나라가 병들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대한민국은 헌법 제1조 ①항을 무색케 하는 ‘반헌법 국가’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마침 이런 민주공화국 위기 시국에 ‘한국공화협회준비위원회’가 지난 11월 17일 한국프레스센터 매화홀에서 <민주공화국의 적들, ‘개딸’과 ‘윤어게인’>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필자 역시 공감하기에 함께 하고 있지만, 언필칭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에서 ‘공화(共和)’를 꿈꾸는 이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날 참석자들은 “민주 대 반민주, 진보 대 보수로 진영간의 분열과 대립에 빠진 현 민주공화국의 위기와 정치양극화를 진단하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정책과 대안으로 ‘중도수렴의 공화주의 노선’을 정립하여 새로운 싱크탱크로서 희망을 찾고자 한다”고 밝혔다. 특히 “개화기 독립협회의 정신을 21세기 변화된 한국 상황에 맞게 공화협회로 계승하여 한국에 닥친 내우외환의 위기를 돌파하는 데 시민사회의 힘을 모으고, 좌우극단이 아닌 합리적 중도진영의 목소리를 적극 대변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공화’라는 같은 꿈을 그리며 모인 자리인데도 “어떻게 ‘윤어게인’을 민주공화국의 적으로 취급하느냐”는 항의가 있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적’이 2017년 대선 당시 이해찬 민주당 선대위원장이 외친 “보수 궤멸” 발언과 같은 군사적 적(enemy)이 아니라 공존의 정치적 경쟁자인 적수(adversary)임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해프닝이었다.
여의도에서 공화주의는 부활할 수 있을 것인가. 정치적으로 다른 진영을 궤멸시켜야 하는 적(enemy)이 아니라 공존의 정치적 경쟁자인 적수(adversary)로 여기며 합의제 민주주의를 국회에서부터 실현시킬 그런 날은 올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헌법으로 선포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가 유명무실의 허언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지난 11월 20일 국회에선 의미 있는 모임이 있었다. 우리나라 현대사를 관통하며 민주화와 정치개혁, 인간 회복 등에 평생을 헌신했던 ‘옥원 장을병 선생 16주기 추모 세미나’였다. 그날 장을병 선생의 생전 일화들을 참석자들이 나누었는데 특히 가슴을 울렸던 것이 정운찬 전 총리가 밝힌 에피소드였다. 1991년 시위 중 백골단 폭력진압에 희생된 성균관대 김귀정 학생 장례행렬이 진압경찰에 막히자 가장 뒤에서 행렬을 따르던 장을병 성균관대 총장이 직접 나서 경찰 지휘부와 협상 끝에 대치상황을 풀고 오히려 노제행렬을 경찰이 에스코트하게 했다는 것으로 “끈질긴 협상으로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다는 정치 철학을 배웠다”면서 “그의 그런 담대한 리더십이 다시 그리워지는 계절”이라고 정운찬 전 총리는 회고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함께 할 때 강연회에서 자주 뵙곤 했던 장을병, 어느 누구보다 독재권력에 항거하고 민주화운동에 앞장섰지만 이른바 적(adversary)과도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고 흔쾌히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그런 고매한 영혼과 통합 정신 지닌 정치 지도자가 정치양극화에 몸살 앓고 있는 이 시대에 그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