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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중규 Feb 05. 2021

산화한 불꽃 기자영과 시몬느 베이유

기억의 소환, 잠시 우정을 나누다 하늘나라로 떠나간 추억의 사람

기나긴 겨울밤은 아무래도 낮시간 보다 사색에 쉽게 잠겨들게 하는가. 요즘 교재 만드는 작업을 하다보면 자주 밤을 지새게 되는데, 자료 찾아 검색 하다 내 삶의 지나간 흔적들을 발견하곤 회한에 젖어들기도 한다. 문득 추억 어린 기억의 소환, 십여 년 전 인터넷으로 우정을 나누다 하늘나라로 떠나간 한 사람이 가슴으로 떠올랐다. 


▲ 명상센터 <자연의 집> 전경


기자영, 그녀를 만난 것은 단 두 번, 그것도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이루어졌다. 그러나 낯설음과 어색함이 전혀 없는 편안한 만남이었다. 그냥 있음 그 자체로 든든하고 한없이 좋은 사람. 그녀가 그러했다. 삶과 죽음 그 어떤 지경에서도 그러했다.


첫 만남은 그녀가 진도에 마련한 명상센터 <자연의 집>에서였다. 당시 나는 휠체어 타는 장애인당사자로 장애인사목에 뜻을 두고 천주교 수도원 입회를 앞두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세상에서 만나야 할 마지막 사람인양 애써 시간을 내어 차를 몰고 천안에서 진도까지 그 먼 길을 찾아갔다. 진도에서도 한참 깊숙한 귀성마을 '국립국악원' 맞은편에 위치한 황토흙집, 손수 설계해서 지인들의 도움으로 지었다는 그곳은 ‘고요 명상 교감, Meditation & Comunion’이라는 글이 새겨진 팻말만 들꽃처럼 나지막하게 심겨져 있을 뿐 주인의 마음처럼 대문도 없이 활짝 열려 있었다.


▲ 명상센터 <자연의 집> 팻말


목발을 짚고서 따스하게 포옹해주며 반갑게 맞아들인 그녀의 안방은 장작 보일러를 한 가운데로 통나무 기둥과 한지를 입혀 놓은 황토흙 바닥에 마련된 신비스런 공간이었다. 침대에 누운 채 그녀는 너른 창 밖 언덕에 철따라 피는 꽃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파노라마에 대해 언급하였다. 


문학소녀 같은 그녀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향토문화가 원형 그대로 살아있다는 진도의 자랑이며, 생활공동체와 이웃 이야기며, 무엇보다 명상과 깨달음에 대하여, 장작불의 따스한 기운으로 훈훈한 거실에서 그녀와 요안나 고모, 이웃들과 늦은 밤까지 식사와 전통차로 함께 한 담소시간은 이리도 아름다운 영혼들이 아직도 세상 곳곳에 있음을 확인한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들이었다.


▲ 명상센터 <자연의 집> 창가에서 바라본 풍경


불꽃의 여자, 시몬느 베이유를 떠올리며

장애로 인해 고통과 친해진 길벗을 만났음인가, 유난히 고통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기자영 그녀의 눈빛에서 시몬느 베이유의 얼굴이 겹쳐짐은 렘브란트의 분위기로 방안 가득 활활 타올랐던 화로 불빛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깊어가는 밤과 함께 대화가 무르익을수록 불꽃 여인 그녀가 바로 눈앞에 있는 듯 했다.



▲ 불꽃으로 산화한 불꽃 여인 시몬느 베이유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 1909~1943),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모든 걸 포기하고 여공으로 취직해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며 노동운동가로 살았다. 폐결핵에 걸렸을 때 충분한 영양섭취를 의사가 권유했지만 나치 치하의 프랑스 동포들에게 배급되는 식량 이상으로 먹는 것은 진실에 대한 거짓말이라며 끝내 거부하다가, 지병에다 영양실조로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그녀.


그리스도교 자체를 ‘고통에 관한 인식’이라고 표현하며 고통당하는 인류와의 연대감으로 불꽃처럼 자신을 태우고 간 그녀에게 “못이 파고드는 가운데도 그의 영혼이 하느님을 향해 있는 사람은 우주의 바로 그 중심에 못 박힌 자신을 발견한다. 그 중심은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것도 아닌 진정한 중심, 바로 하느님이다. 이러한 놀라운 차원 속에서 육신을 둘러싸고 있는 시간과 장소를 떠나지 않고도 영혼은 시간과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하느님의 현존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라는 고백은 자기증거였으리라.


그것은 기자영 그녀에게도 마찬가지.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세상을 더 넓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저는 몸이 아프고 나서 시야가 탁 트인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 넓은 세상이 보였습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도 아픈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아픔을 안다는 것은 존재를 좀더 온전하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치유의 힘은 거기에서 나옵니다. 아픈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서 맡은 역할은 치유가 아닐까 합니다.”라는 그녀의 글은 절절한 체험의 자기고백이었으리라.



▲ 생전 건강한 시절의 기자영 씨


미국 세도나 명상센터에서 암 환자들을 상담하는 일을 하다 다른 꿈을 찾아 귀국했지만 오히려 본인에게서 암을 발견하게 되고, 의사였던 그녀가 불치의 환자가 되어 끝내 오른쪽 골반과 다리마저 절단 당해야 했던 그녀. 


뜻밖의 말기 암 판정 소식이 그 동안 움켜쥐고 있던 세속의 짐들을 다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는 그녀의 고백처럼, 고통을 수반하는 수련과정을 통해 이미 한없이 정화된 내면과 순수의식의 지경에 도달해 있는 그녀의 참 편안하고 행복한 모습은 오히려 장애를 지닌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특히 투병생활에서 함께 하며 도움 주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분신으로 여겨진다는 놀라운 고백은 ‘자타(自他)의 분별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어디나 산과 바다 그리고 하늘이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산수화 같은 진도 일주에 나섰다. 굽이굽이 국도를 따라 찾아간 세방낙조 전망대에서 바라본 국립해상공원의 운치. 다도해의 섬들과 관련한 전설들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그녀의 자상한 마음과 운림산방 소치기념관과 진도역사관을 거쳐 향토주 홍주의 맛과 더불어 소풍 같은 하루여정을 마치고 떠나올 때 지극한 몸짓으로 작별인사를 해주던 그녀의 해맑은 눈길을 잊을 수 없다.


"그저 참! 고맙습니다. 행복하게 해주셔서요"


사실 그녀와의 인연은 7년이 넘었다. 2002년 포털사이트 다음에 내가 인터넷 카페 ‘어둠 속에 갇힌 불꽃’을 개설한지 불과 몇 달 뒤 leona라는 닉네임으로 가입한 그녀는 자주 마음의 흔적을 남기곤 했었다.

"방금 올려놓으신 사진을 보았습니다. 번개를 찍어 놓은 것요. 아리조나 사막 한 가운데에서 보았던 바로 그 광경이었어요. 까만 여름 밤, 사위는 조용하고 비도 오지 않는데, 저쪽 하늘엔 소리도 없이 번개가 춤추는 것이었어요. 너무나 놀랍고 기뻐서 눈물만 나왔는데, 오늘 그 느낌이 그대로 전해 오네요.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전해야 할지요. 그저 참! 고맙습니다. 행복하게 해주셔서요." (2002.10.11)

"어머니 태양 곁을 돌고 있는 별들을 봅니다. 어디에선가 이 별들에 대해 읽은 적이 있습니다. 태양 가장 가까이 있는 갓난아이별이 있고 나이가 들수록 점차로 바깥쪽의 궤도로 옮겨 간다구요. 우주선을 타고 우주 공간으로 나간 사람들은 별들이 생명체라는 것을 곧 알아차리게 된다는군요. 그런 눈으로 별들을 바라보면 색다른 느낌이 듭니다. 지구는 참 생동감 있어요. 청년이 느껴집니다. 내가 그 생명체의 일부라는 것. 그리고 나는 지구의 어떤 역할을 하는 세포일까?-를 묵상해 봅니다. 아... 끝이 없는 우주의 신비, 생명의 흐름... 호기심과 기대로 가슴 설렙니다." (2002.10.17)

"기도 모임을 가지며, 새삼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감각은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마음까지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의심하는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것 아닐까요? ‘믿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는 기도를 항상 반복하는 이웃들을 봅니다.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우선 각자 가지고 있는 감각을 회복하고 그 감각을 신뢰하는 것이구나 하는 걸 다시 깨닫게 됩니다. 사회 속에 떠도는 관념에 흠뻑 젖어, 외려 가슴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직관의 세계엔 눈길조차 두지 않은 우리가 아닌가요? 이제 가슴의 느낌을 따라 행동해 보아요. 때론 실패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앞서더라도 인생이 그리 길지 않으며 그 실패라는 것도 해볼만한 새로운 경험이라 여기며 눈 딱 감아 보아요. 나의 감각을 신뢰하게 되면, 그 때 신에 대한 믿음을 애써 간구하고 잡으려 할 필요가 없답니다. 그 감각은 깊은 뿌리에 닿아 있거든요. 신 혹은 하느님이라는." (2002.10.18)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일까? 이는 매우 쉬운 질문인 것 같으면서도 막상 답하려 하면 그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어쨌거나 우리 대부분은 선을 바란다. 그리고 악은 나쁜 것, 선은 좋은 것이라고 규정한다. 과연 그렇다. 살아가면서 좋은 것을 접하면 선이라 여기고 해가 되는 것을 접하면 악이라 여기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함정이 있다. 어떤 행위가 누구에게는 선으로 작용되는 반면 동시에 다른 이에게는 악으로 작용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행위를 가지고 선악을 따지는 것은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각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한 가지 이상 갖고 살아간다. 감정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은 늘 좋은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요인들을 희생한다. 진실마저도 왜곡하기 일쑤다. 예의를 중요시 하는 사람은 그것을 고수하느라 많은 불편한 관계를 감수하기도 한다. 명예를 중요시 하는 사람, 타인의 평가를 중요시하는 사람 등등... 각자의 잣대에 따라 선악의 정의도 각자 달리 한다. 그러하니 사람들의 잣대로 선악을 가른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선한 것, 즉 좋은 것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조화로움을 말한다. 어떤 존재에게나 유익하고 공평하며, 생생하게 살아있게 하는 상태. 하여, 선의 정점은 하느님이시다. 우주 만물을 잘 알고 다스리시는 존재이므로 우주의 조화로움을 경영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 영, 즉 성령에 접붙이는 것은 바로 우주의 조화로운 창조와 경영에 동참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선의 극치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올라가야 할 계단이 층층이 있다. 그것은 겹겹이 입고 있는 자아의 옷을 벗는 일이다. 자아의 옷을 많이 껴입고 있을수록 어둡고 악에 가깝다. 자아가 육체 안에 한정되어 있어 무기력, 수치심, 두려움, 슬픔, 미움과 분노 등의 감정을 끝없이 생산해 내며 자기의 세상을 황폐화시키고 고립시킨다. 자아의 옷이 얇을수록 긍정적인 감정과 생각들을 생산해 내고, 타인을 위한 언행을 하기가 수월해진다. 자아의 울타리가 넓어지면 자기와 동일시하는 타인 혹은 존재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자기와 동일시되는 존재를 자기만큼 사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자아의 테두리가 넓어져 사랑하는 대상의 범위가 클수록 지혜도 자라난다. 그 지혜로 인해 조화로움을 이루게 되니, 선함의 정점을 향해 가까워지는 것이다. 선악은 흑백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스펙트럼처럼 한없는 어두움에서부터 한없는 밝음으로 펼쳐져 있다. 우리는 그 스펙트럼 위 어느 지점에 서 있거나, 밝음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2002.12.05)


"희뿌연 하늘 덕분에 땅의 색깔은 더욱 진해 보입니다. 오전엔 침대에 누워 인터넷을 산책하며 이런 저런 생각과 느낌을 가져 보았습니다. 특히 마지막 남을 우리 영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혼의 크기와 맑기. 동양의 경전에서는 영혼의 단계를 일천계에서 구천계까지 그리고 완성의 단계까지 나눠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과연 그것은 일견 일리가 있기도 합니다.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육체에 가둬진 영혼에게서도 이미 그 단계의 차이를 엿볼 수 있으니까요. 내가 살아가면서 하는 행위의 동기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 속에 영혼의 크기와 밝기가 명확히 반영 되어 있습니다. 그 동기는 두려움인가? 분노인가? 명예욕인가? 용기인가? 사랑인가? 기쁨인가? 우리는 익어가고 있습니다." (2002.12.07)


그러다 그해 연말 ‘의식혁명’(http://cafe.daum.net/spiritrevolution)이란 인터넷카페를 만든다며 조언과 도움을 요청하고 또 불꽃카페를 모델로 삼고 있다며 고마움을 표시해 왔다. 카페 ‘의식혁명’을 의미 있는 공간으로 키워나가는 그녀의 애씀을 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말기 암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 감탄은 감동으로 변해갔다. 마침 그 당시 명상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라 그녀가 추천한 호킨스의 <의식혁명>에도 눈길을 주게 되었고, 그녀를 중심으로 도반들이 함께 하는 명상프로그램에도 몇 번 초대를 받았지만 먼 길이 엄두가 나지 않아 함께 하지는 못했다.


인터넷카페 '어둠 속에 갇힌 불꽃'과 '의식혁명'의 인연


▲ 말기 암 고통을 견디던 기자영 씨(사진 / 한상봉) 


그러다 2007년 처음으로 진도 <자연의 집> 방문 후 내 부탁에 기꺼이 호킨스의 ‘의식혁명’을 불꽃카페에다 4개월여에 걸쳐 옮기는 작업을 했는데 그것이 그녀가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이 되고 말았다. 2009년 6월 9일자로 그녀의 카페 '의식혁명'에서의 최종방문일은 멈추어 있다. 영구 회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문득 2002년 어느 날 그녀가 선물했던 자작시 ‘샛별’이 떠오른다.


나는 몰랐어요, 샛별!

와글와글 어지럽게 난무하는 태양빛 뒤에

당신이 조용히 걷고 계셨던 걸.

깜짝 놀랐어요. 

산허리 마침내 

제 빛깔을 내기 시작 할 때

거기서 당신 찬란한 눈동자로...


이제 뭇 별들 일어서요
용기내며.. 
당신 등불 밝혀 드셨군요 
찬란한 외로움으로. 
보여요, 가슴 한 가운데
환하게


당신이 산 너머
잠시 쉬러 가신데도
알아요, 일어선 별빛들 
그 속에 당신 비추이는 걸.


이제 알아요. 
별빛 다 잠들 때
당신 크신 발걸음
성큼 내달아 
등대불 다시 밝혀 드신다는 걸.


변하지 않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녀 자신 샛별로 영원히 지금도 우리 곁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부활이란 다름 아닌 남은 자들의 기억 속에 소중히 간직되는 것! 45년, 짧다면 짧은 생애를 아쉬워하면서도 오히려 많은 이들이 이승에서 그녀를 담담하게 보낼 수 있었던 까닭은 언젠가 남극세종기지에서 순직한 전재규 대원 추모글에서 그녀가 표현한 그 마음과 같으리라.

"그의 죽음이 아까워서 울었다. 그러나 가슴 한 켠에 희망이 피어오르는 건 왜일까? 가볍고 얕은 계산속에 영혼과 꿈을 팔아버리는 사람들로 바다를 이루고 있는 이 시대에 그는 신선하고 순결한 꿈을 심어 준다. 그의 목숨은 아쉽게도 사라져 갔지만 그의 생명은 많은 사람들 속에 부활해서 숨 쉬고 있을 것임을 믿는다. 우선 그는 내 가슴 속에서 살아났으니까."

죽음의 빛깔은 삶의 빛깔,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영원한 반향

“이 세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베풀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온유한 미소 때문에 우리 모두는 구원 받게 될 것이다.”라고 시몬느 베이유가 예언했던가. 구원의 빛살은 그렇게 온유하기만 하고 미소처럼 부드럽기만 하다. 시몬느 베이유는 다시 구원은 “기다림, 성실하고 주의 깊게 고요히, 마냥 모든 채찍을 인내로이 견디면서 흔들림이 없이 기다리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것은 바로 기자영 그녀의 삶, 그 아름다운 영혼의 빛이기도 하다. 사실 죽음의 빛깔은 삶의 빛깔,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영원한 반향이다. ‘바로 여기’의 이 모습이야말로 하느님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질 부활의 그 모습이니, 부활은 그토록 리얼리티한 것이다.



▲ 기자영 씨의 장례미사 


이제는 아련한 기억 속의 추억이 되어버린 2009년 8월 13일, 장례미사 후 그녀의 몸은 불꽃처럼 살다간 인생에 걸맞게 화장 되어 불꽃으로 산화하였다. 병고 속에서 이미 자유의 나래를 펼쳤던 그녀가 이제 이승과의 마지막 끈을 끊고서 새처럼 가볍게 날아오른 것이다. 그녀의 눈빛만큼이나 청명했던 그날의 하늘 저 위로 환한 미소가 비치는 듯, 아니 고승들의 열반 게송(偈頌)처럼 그녀가 미리 읊었던 글처럼 어디선가 기쁜 웃음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그 때
나는 껍데기를 벗고 
날개를 펼쳐 
창공을 향해 
치솟을 거요.


어쩌면 그 때
당신을 돌아 볼 여유가 
없을지 몰라.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이라.


다정(多情)도 추억도 모두 
누에 껍데기에 함께 벗어두고 
나는
수직상승 할거요.
기쁜 웃음 터뜨리며.
그러니, 서러워 마요.


당신에게 줄 것은
당신 속에 간직된 거룩함밖에 
없으니
그 찰나가 거울처럼
당신의 그것을 비추었으면 좋겠소. 
그 외에 
나는 아무 것도 남길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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