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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중규 Dec 30. 2022

내가 정치하는 이유 / 정중규

적대적 진영정치에서 합의제 민주주의 시대로

지난 7일 국회의사당 잔디광장 분수대 앞에서 성탄트리 점등식이 거행되었다.

갈등과 대립의 극단의 적대적 진영정치가 펼쳐지는 국회에도 화해와 일치의 성탄의 기운이 임하기를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진심으로 기도드렸다.

우리의 정치, 정치권을 둘러보면 정치를 ‘잘못 배운’ 정치인들로 넘쳐나고 있다.

헌법 제1조 1항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하듯이, 우리는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정치를 해야 하는 나라다.

민주주의 정치란 공존의 기술인데, 지금 우리 정치권에서는 민주주의 정치조차 상대를 궤멸시키는 기술인양 다들 여기고 있다.

그러다보니 거짓과 술수와 계략과 꼼수가 판을 치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목적 달성하려 덤비는 이전투구 현장이 되고 있다.

그런 적대적 진영정치 속에서 사회 전체도 심각하게 병들고 있다.

내가 처음 시민의 한 사람으로 정치를 함께 했을 땐 전두환 대통령의 제5공화국 시절이라 당연히 민주화가 목표였다.

1987년 6월시민항쟁이 지나고 장애인운동을 하다 진보정당에서 활동을 하면서는 사회진보가 그 목적이 되었다.

물론 그 때도 나는 무슨 정파에 속했다기보다는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 취약계층을 우선 대변하고 싶었기에 무슨 정파냐고 묻는다면 ‘민중파’라고 했었다.


그러다 우리 사회, 특히 정치에 깃든 고질병인 진영논리에 바탕한 사회분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고, 마침 2011년 ‘안철수 현상’을 만나게 되면서 내 정치의 궁극 목표, 곧 내가 정치하는 이유가 아예 사회통합이 되었던 것이다.

한반도를 네 겹으로 짓누르고 있는 적대적 공생관계

한반도에는 한민족을 옥죄는 적대적 공생관계가 4중으로 겹겹이 놓여있다고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다.


가장 밑의 층이 영호남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한 적대적 공생관계다.

밑바닥 서민들의 삶과는 전혀 무관하게(그것은 대구와 광주의 경제지수 GRDP가 전국 최하위인 것에서 드러난다), 윗자리 정치인들이 그를 악용해 반세기 넘게 정파적 사익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두 번째 적대적 공생관계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으로 대변되는 진보-보수 좌우간이다.

그 역시 이념과 진영에 매이지 않는 밑바닥 서민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최근에 와서 브라만 좌파(Brahmin left)와 상인 우파(merchant right)로 규정된 것에도 알 수 있듯이 둘 다 기득권 세력으로 이해관계에 있어선 한 몸이면서 겉으로만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적대적 공생관계가 남북 정권이다.

남한의 정권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정권안보를 위해 ‘북풍’이란 이름의 거래(보수정권의 경우 군사적 긴장조성의 대가를, 진보정권의 경우 평화 퍼포먼스의 대가를 지불했다)를 했었고, 남북 정권 모두 각기 북한의 인민과 남한의 민중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유용해 왔었다.

네 번째는 중국과 미국 사이의 적대적 공생관계다.

두 나라는 시진핑 주석과 트럼프-바이든 대통령 사이에서의 ‘무역 전쟁’을 비롯한 숙명적인 패권경쟁으로 인한 대립과 갈등에서 볼 수 있듯이 쉼 없이 으르렁거리지만 남북분단 유지 관련해선 그 이해가 일치하고 있다.


이 네 가지 한반도를 짓누르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죄다 해체하지 않고는 한민족의 구원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적대적 공생관계를 깨기 위해 영호남의 합리적 정치세력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바른미래당 창당에 함께 했지만, 정파간 이합집산 움직임 속에 그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두 번째 적대적 공생관계 해체해 달라는 민심의 갈망을 무엇보다 ‘안철수 현상’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른바 제3지대 정치실험이 민심의 그 갈망을 온전히 채워주지 못하고 있지만, 밑바닥 민심에선 그 꿈이 아직도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 꿈은 세 번째 적대적 공생관계 해체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꿈은 남한 민중만이 아니라 70년 넘게 김일성 집안에 의해 통치당하고 있는 북한 인민들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렇게 남북 정권간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해체 된다면 설사 남북통일까지는 아닐지라도 남북한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면서 네 번째 적대적 공생관계인 미국과 중국의 남북을 향한 정치군사적 압박도 약해지리라고 보는 것이다.

적대적 진영정치에서 합의제 민주주의 시대로

돌이켜보면 해방 후 미소냉전의 첨예한 대치점에 하필 한반도가 위치하게 되어 남북분단 시대가 열리면서 시작된 좌우진영 대립의 역사 70년,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전후 이른바 양민학살로 좌우 불문하고 희생당한 자만 수백만 명으로 밑바닥 민중들은 애초에 그 대치선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애꿎은 피해자요 희생자였을 뿐이었다.

이런 오래된 광기의 세월을 부질없이 겪으며 나온 밑바닥 민중의 각성이 사회통합에 대한 갈망으로, 구체적인 정치현상으로 처음 표출된 것이 10년 전 안철수 현상이었다.

물론 그 갈망은 그 꿈의 담지자 정치인 안철수와 그를 따르는 정치세력의 역량 부족과 견고한 양당체제 기득권에 막혀서 정치적으론 제대로 이뤄지진 못했다.

하지만 그런 몸부림 속에 사회통합이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고, 통합의 리더십이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자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요청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지난 2022년 대선에선 0.73%p차로 승패가 결정될만큼 적대적 진영정치가 최고조에 달해 사회의 갈등지수가 폭발 직전이었지만, 그럴수록 적대적 진영정치 폐단을 극복하자는 사회통합에 대한 갈망도 더욱 간절해져 결국 그 갈등과 대립을 넘어서는 ‘합의제 민주주의 시대’의 도래 가능성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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