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5월 19일 히로시마에서 열린 G7 (선진 7개국) 정상회담에 참석한 데 이어 7월 11~12일 리투아니아에서 열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에도 2년 연속 참석할 예정이다. 국제사회가 대한민국을 강대국의 일원으로 대하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다.
여기엔 여야도 초당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김민수 국민의힘 대변인은 "대한민국은 심리적 G8 국가 반열에 올랐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박수현 국민소통수석이 2021년 6월 "한국이 명실상부 G8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고 했다. 한국의 G7 가입이 국가적 화두가 된 셈이다.
이런 시점에 서울대가 변화된 한국의 국력과 지위에 걸맞은 국가 전략을 제시하고 나섰다. 유홍림 서울대 총장이 학문 경계를 허물고 발족시킨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전략원(이하 전략원) 산하의 '세계 질서 변화와 한반도의 미래 클러스터'가 이달 초 완성한 첫 연차 보고서가 그것이다.
정치외교학부 손인주 교수(전략원 부원장)·이재준 선임 연구원 등 학자들과 실무 전문가들이 지난 1년간 30회 가까이 토론한 결과다. 다음 달 안에 공개될 보고서 초안을 입수해 내용과 쟁점을 짚어본다.
국가미래전략원, 도발적 보고서
"하드·소프트 파워 완비 강대국
중화사상 대신 개방국가 전환"
"북한 리스크 직시해야" 반론도
"주변 아닌 중심국 정체성 가져야"
"한국은 동아시아 주변국에서 세계의 중심국으로 도약했다"고 보고서는 단정한다. 초강대국(super power)은 아니지만 노무현 정부 때 중강국(middle power), 윤석열 정부 때 강대국(great power)으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G7 국가가 아니면서 5000만 이상 인구에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국가는 한국뿐이다. 세계 6위의 수출 대국이고 군사력도 2005년 14위에서 2023년 6위로 상승했다.
전략원 원장인 김병연 서울대 교수(경제학)는 "한국은 배터리·바이오·반도체 등 차세대 3대 산업에 대량 생산이 가능한 유일한 나라인 데다 방위산업과 한류로 대표되는 소프트파워도 막강해 강대국,그것도 초일류 강대국 지위를 인정받기 충분하다"고 했다. 따라서 한국은 '초일류 강대국'을 지향하면서 주변국 아닌 '중심국'으로 국가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고 보고서는 제안한다.
"초강대국 편승 전략은 그만"
보고서는 한국이 미·중·일·러 사이에서 주변국을 자처하며 초강대국 편승 전략으로 일관해왔다고 지적했다. 이 편승 전략의 요체는 '중화사상'인데 강대국이 된 지금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편승 전략 대신 '자유'의 원칙 아래 무역과 통상으로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개방 국가 전략으로 전환하라고 보고서는 제안했다.
선진국 추격형이었던 경제 전략도 선도형 혁신 모델로 전환을 촉구했다. 미·중 경쟁으로 중국에서 이탈한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연구·개발(R&D) 센터를 최소한 10개 유치하고, 인공지능과 방위·바이오 산업을 집중 육성하라고 보고서는 제안했다.
보고서는 중국의 미 해군 역내 진입 거부 전략으로 한국의 해양 안보가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한국은 미 해군과 훈련 범위를 확대하는 한편 탄도미사일 방어 체제 등 고도화된 미군의 무기 체계를 지원받아 해양 현상 유지에 전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호주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참여하면서 최첨단 핵 추진 잠수함(SSN)을 지원받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보고서는 또 한국이 세계 선박 10척 중 3척을 만드는 조선 대국인 만큼 미국의 군함 건조를 지원하는 대가로 첨단 기술을 지원받는 방안을 추진하라고 제안했다.
"인·태 해양 안보체 주도할 때"
한국은 또 인도·태평양에서 해양 안보 협의체 결성을 주도해야 한다고 보고서는 제안했다. 인도·미얀마·인도네시아·호주·베트남·필리핀 등 핵심 길목(choke point) 국가들과 합동 해상 훈련을 주기적으로 실시해 잠재적 위협 국가(중국)의 해상 통제 도발을 억지하는 게 골자다.
일본은 인도와 2016년~18년 매년 두 차례 해군 합동 훈련을 한 끝에 미국·일본·인도의 삼국 합동 훈련으로 발전시켰다.
보고서는 또 한국이 약소국 시절 체결한 비대칭적 동맹을 대칭적 동맹으로 전환하라고 주문했다. 미국과는 양자 외교, 유럽연합 및 일본과는 삼자 외교를 활용하고, 중국엔 소다자 외교를 구사하는 다층적 동심원 외교로 갈등 방지턱을 높이고 협력은 증진하는 방안을 검토하라는 것이다.
"강대국 전략, 60%만 맞아" 지적도
보고서가 제안한 한국의 강대국화엔 기대와 우려가 공존한다. 김경민 한양대 명예교수(정치학)는 "한국의 강대국화는 미국이 한·미·일 공조를 밀어붙이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이어 "한국이 상상 못 해온 국제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한국의 높아진 위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의 대중 견제가 확고해진 탓이기도 한 만큼 한국은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G7 가입을 추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G7 회원국은 글로벌 현안을 주무르는 권력과 위신을 누리지만 우크라이나 전쟁·대만 위기 등 갈등 이슈에서 한쪽 편을 들어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직 고위 외교관은 "윤석열 정부의 '자유·평화·번영에 기여하는 글로벌 중추 국가 구상'은 전략원 보고서가 제기한 강대국·중심국 전략과 맥락이 같다.
ODA(공적 개발 원조) 2배 증대와 윤 대통령의 나토 회의 연속 참석이 그 시금석"이라고 했다. 그는 그러나 "한국은 북한 위협에 중국 변수가 맞물려 자원을 역내에 집중 투입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며 "보고서의 '강대국' 전략은 60%만 맞는다"고 했다.
이 외교관의 말이다. "초강대국인 미국도 '두 개의 전쟁' 원칙을 포기하며 중동에서 발 빼고 아프리카는 버리다시피 했다. 중국도 '중국몽' 전략에 한계가 뚜렷하다. 국가 자원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한국도 달라진 국력에 맞는 글로벌 마인드를 갖되, 우선순위는 북한과 인도·태평양 전략에 둬야 한다. 항공모함 보유 등 너무 나간 시도를 하면 국가 자원 고갈을 자초한다."
국내 정치가 강대국화 지연시켜
김병연 전략원장도 "한국은 외교력의 60%를 소진하는 북한과 저출산 등 리스크를 극복해야 강대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김 원장은 "인구·경제 안보·탄소 중립 등 3대 변수를 꼭짓점으로 한 삼각형 정책 모델을 만들어 최적화한 대안을 도출할 계획"이라고 했다.
국내 정치 상황도 강대국화 지연 변수로 지적된다. 보고서는 "한국은 몸은 성인이지만 정신은 청소년에 머물러있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같은 과거 정체성에 갇혀 무원칙적 편승이나 균형 외교에 집착한다"고 평가했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도 "한국은 코로나 위기 때 국민의 자유를 저당 잡고 보건 안보를 추구한 나라로, 자유를 대하는 정신이 희미하다"며 "대외 지향적이고 자유 친화적인 '바른' 한국이 있는 한편, 세계의 흐름엔 관심 없고 남북관계·민족 등 좁은 관심사에만 집착하는 내향적 정치세력이 존재해 글로벌화에 부담이 크다"고 지적했다.
함재봉 한국학술원장은 "강대국의 또 다른 요건인 과학·문화적 성취 면에선 한국은 자격 미달"이라고 지적했다. 노벨상을 미국은 406회, 영국은 137회, 독일은 114회, 프랑스는 73회, 일본은 29회, 캐나다는 28회, 이탈리아는 21회 받았으나 한국은 단 1회, 그것도 과학 아닌 평화상을 탔을 뿐이란 것이다.
손인주 전략원 부원장은 "보고서 골자는 한국이 초일류 강대국을 지향할만큼 성장한 동시에 리스크나 취약점도 존재하는 상황을 직시하면서 30년 앞을 내다보는 중장기 전략을 추진하자는 화두를 던진 것"이라고 말했다.
“3·1 운동 지폐에 담고 제헌절을 공휴일로”
보고서는 강대국에 올라선 나라 위상과 동떨어진 대표적 사례로 국경절과 지폐 도안을 들었다. 보고서는 “대한민국 헌법 제정일보다 태곳적 고조선 건국일이 더 중요할 수는 없는 만큼 개천절 대신 제헌절을 공휴일로 지정하라”고 제안했다.
이어 화폐 초상화도 신사임당(오만원권), 세종대왕(만원권), 이이(오천원권), 이황(천원권), 이순신(100원 동전) 등 전원이 조선 전기 인물임을 지적했다.
게이오대 창설자인 후쿠자와 유키치(만 엔권), 여성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오천 엔권), 세균학자 노구치 히데요(천 엔권) 등 19~20세기 국가 근대화에 기여한 인물로 채워진 일본 지폐와 대조적이란 것이다.
보고서는 “광복 80년을 맞았는데도 역사 인식에 느슨한 합의조차 불가능해 조선 성리학 시대로 도피한 결과”라며 “진영 대립을 고려해 3·1 운동을 지폐에 담아 중화사상과 약소국 정체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