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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중규 Aug 05. 2023

滄溪 林泳의 생애와 사상 Ⅱ / 정중규

동아시아학술원 인문한국(HK+)연구소/대동문화연구원 공동주최 학술대회

동아시아학술원 인문한국(HK+)연구소 / 대동문화연구원 공동주최 국내학술대회

滄溪 林泳의 생애와 사상 Ⅱ

2023.7.29. 오후1시30분. 성균관대학교 600주년기념관 6층 소향강의실

주최 : 성균관대학교ㆍ동아시아학술원 인문한국(HK+)연구소ㆍ대동문화연구원

동아시아학술원 인문한국(HK+)연구소 / 대동문화연구원 공동주최 국내학술대회

滄溪 林泳의 생애와 사상 Ⅱ

2023.7.29. 오후1시30분. 성균관대학교 600주년기념관 6층 소향강의실

주최 : 성균관대학교ㆍ동아시아학술원 인문한국(HK+)연구소ㆍ대동문화연구원


창계의 가계와 영향


임영(林泳, 1649~1696)은 조선 중기의 문인ㆍ학자로 자는 덕함(德涵). 호는 창계(滄溪), 나주를 본관으로 하고, 1649년 서울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사마시에 합격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헌을 지냈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에게 수학했으며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성립한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속해있었으나, 이기론에 있어서는 이이의 학설을 완전히 따르지 않고,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입장을 절충한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1665년 사마시, 1671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였고, 이조정랑·검상·부제학·대사헌·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694년에는 대사간·개성부유수를 거쳐 부제학·참판까지 역임했다.

송시열·송준길 같은 기호학파의 대가들을 스승으로 두었고, 이기론에 있어서는 이이의 '이기불상리'에는 찬성했다.

그러나 이기양발의 입장에서 영남학파인 이황의 설에 접근하면서, 이이의 학설은 '기발이승' 하나만으로 사단·칠정을 논한다고 문제를 제기하며 그의 '기발이승일도설'에는 반대했다.

문장에도 능했으며, 저서로는 ≪의승기(義勝記)≫, ≪창계집≫ 27권이 전해진다.

17세에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 1628~1669)에게 수학하기 시작한 후,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1631~1695),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과 평생을 가까운 사이로 보냈고,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 1638~1689),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 등과 교유하였다.

창계의 선대에는 비록 직계는 아니지만 임제(林悌, 1549~1587)와 같은 유명한 문인이 있고, 외가에는 외증조부 조희일과 그 동생인 조희진의 손자 조성기와 같은 뛰어난 인물이 있었다(이종범, 「滄溪 林泳의 學問과 政論」, 『韓國人物史硏究』 제9호, 한국인물사학회, 2008, pp.185~186.).

조성기에게는 앞서 언급한 대로 창계가 사상적으로 직접 영향 받은 점이 보이나, 임제와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창계가 「의승기」와 같은 작품을 짓는 데는 「화사(花史)」나 「수성지(愁城志)」와 같은 작품을 지은 임제에게서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한다.


일찍이 소설을 접한 창계


어린 시절 창계의 행적에 대해서는 17세기 소설사에서 일찍이 주목한 바 있다.

임형택이 창계의 연보에서, 창계가 여덟 살 때 누이들에게 여사고담을 읽어달라고 하여 듣다가 누이들이 귀찮아하며 스스로 읽지 못한다고 책망하자, 반절을 써달라고 하여 반나절 만에 언문을 깨쳤다는 기록을 인용하고, 당시 소설이 사대부의 규방에서 읽혔고 그것을 ‘여사고담’이라 불렀던 사실과, 이러한 여사고담, 곧 규방소설이 17세기 중반 이미 유행하고 있었던 현상을 밝힌 것이다(임형택, 앞의 논문, 1988, pp.118~119.).


16세까지의 근기학문(根基學問)과 심학에 눈뜸


창계는 생애를 통해 두 차례 수학기를 거쳤다.

1차는 8세에서 16세까지로 주로 부친의 임소(任所)를 따라 다니며 그곳 스승에게 배우거나 고향에서 조부께 가학(家學)을 전수받는 시기이다.

먼저 8세부터 13세 가을까지 부친의 임소인 은진에서 지내면서, 8세에는 과독(課讀)을 실행하며 『사략(史略)』을 읽어나갔고, 그 여가에 위와 같이 누이들에게 여사고담을 즐겨 들었다.

9세에는 『소학』, 『사서』 등을 읽었고, 10세에는 나주 회진을 왕래하며 계부(季父)의 자효당(慈孝堂)이라는 서당에서 거하기도 했고, 11세에 『대학』을 읽으며 그 여가에 『사문유취(事文類聚)』 한 질(帙)을 다 읽었다.

또 12세에는 은진에 유배 와 있던 이흥록(李興祿)에게 『서전(書傳)』과 『시전(詩傳)』을 배웠고, 그 해 여름에는 백씨(白氏)와 서울에 올라가 조현소(趙見素, 1610~1677)에게 독송(讀誦)과 제술(製述)을 배우기도 하였다.

13세 가을에 부친의 임기가 끝나 나주로 돌아와서부터 창계는 가학(家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숙조(叔祖)인 동리(東里) 임위(林㙔)에게 『주역(周易)』을 배우고, 14세에는 조부(祖父)가 회산 별업에 종형 임호(林濩)와 그를 불러 겨울동안 독서하게 한다.

이때 조부는 궁리수심(窮理修心)하는 학문을 깊이 할 것을 둘에게 바랐다.

창계는 그 후 여러 해 심리(心理)의 설(說)에 마음을 두었는데, 자신이 힘써 행하지는 않아 실천할 수 없었지만, 뜻이 없다고는 이를 수 없을 것이라 하였다.


이는 10여년이 지나 창계가 집안의 책을 보다가 그때 조부가 내려준 시를 보고는 회상하는 대목에서 나오는 고백이다(“蓋昔壬寅之歲, 王考在回山別業, 實召孫濩, 泳以侍, 仍使之讀書一冬. (중략) 方讀書時, 王考嘗下示一絶, 深以窮理修心之學, 有望於吾二人. (중략) 泳偶竊有意於心理之說, 雖行之不力, 不能實有諸己, 抑不可謂全無志焉. (중략) 今日適閱家中舊書, 忽得奉覩遺墨, 捧玩悲愴, 怳然不知涕之流落也.” 『창계집』 권1, 「敬次王考下示韻」 呈次韶濩從兄, 幷序.).


그 시에 대해서는 선행 연구에서 살핀 최재남이 다루었다(최재남, 앞의 논문, 2008, p.376.).

이러한 창계의 회상과 고백을 통해 그가 조부로부터 권면 받은 궁리수심의 학문에 깊이 마음을 두고 공부하다가 그를 바탕으로 마음에 대해 문학으로 형상화하고자 한 것이 16세에 「의승기」 창작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 보인다.

그 후 15세에는 역사서를 읽어가며 역사(歷史)와 인물(人物)과 사리(事理)에 대해 깊이 생각해가며 식견과 의취를 넓혀 갔다(이상 1차 수학기에 대해서는 『창계집』, 「滄溪先生年譜草」,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94, 附錄補, pp.633~635와 한국문집총간 159권, 1995, 해제 참조.)고 한다. 이 또한 「의승기」 창작에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19세에 문학에 대한 관점이 변하여 공부에 힘쓰다


2차는 17세에서 20세까지로 서울에 올라와 정관재에게 수학하며 「독서차록」과 「일록」 등을 기록하며 도문학(導問學) 공부에 집중하는 시기이다.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예기』, 『춘추』 등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점 등을 정리해 상세히 기록하며 자신의 사상을 정립해간다. 또한 박세채, 김창협 등과 활발히 교유하며 토론하였다.


이 시기 창계가 독서기록을 남긴 「일록」에 보면 18세에 『계곡집』을 접하였는데, 특히 그 속에 「신명사기」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한 후, 계곡이 신명씨가 성품이 교분하다고 한 점에 대해 지적하며 그렇지 않다(“谿有一文記神明舍, 以神明氏主人翁分爲二, 又曰神明氏性驕憤, 未是.” 『창계집』 권25,)고 언급한 부분이 있다. 여기서 「의승기」 창작 즈음의 상황을 볼 수 있다. 창계는 사장학에 매료되어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천군이나 신명사에 대한 기록을 다른 문인들의 문집을 볼 때 찾아 읽으며 계속해서 생각을 개진해 간 것이다.


그러나 창계는 19세 이후로는 문학에 대한 관점이 변화하는데, 이는 정관재에게 본격적인 수학기에 접어들면서 접하는 독서물이 달라진 데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일록」을 보면, “우연히 주자어류 논문을 교감하다가 당송문(唐宋文)을 취해보고는 마음에서 긴절히 힘쓸 일이 아님을 알았다[“偶閱語類論文卷, 仍取唐宋文觀之, 心知其非切務.” 『창계집』 권25, 「日錄」, 丁未.].”라고 고백하는 대목이 나온다.

주자학 관련 저술을 보는 것이 당송문과 같은 문학에 빠져 있는 것보다 더 힘써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듯 창계가 정관재에게 수학하던 19세 이후부터는 문학에 대한 관점이 바뀌어, 문학을 멀리하기 시작하며 학문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졸수재의 색욕(色欲)을 경계하란 가르침


그러다 창계가 26세에는 학문이 더 나아가지 않는 것에 한탄하기에 이르고, 그 즈음 졸수재 조성기를 방문하였다가 색욕을 경계하는 것을 학문하는 제일 급선무로 삼고, 명리에 명예를 훼손하는데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입신하는 제 일의로 삼으라는 이야기를 듣는다(“訪趙成卿叔語終晷, 以痛懲色欲, 爲爲學第一急務, 不動於名利毀譽, 爲立身第一義.” 『창계 집』 권25, 「日錄」, 甲寅.). 평소 존경하던 졸수재에게 이러한 얘기를 들은 창계는 당시 학문과 입신에 관해 고민하던 자신의 뜻을 더욱 굳히게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32세에 벼슬에 나가며 갈등을 느끼다


창계 생애 중 16세에 「의승기」를 통해 드러냈던 마음[心]의 중요함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때는 37세 이후이다.


그 사이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은 창계 32세 때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숙종 6)으로 남인이 몰각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창계도 기회를 얻어 벼슬길에 나서게 되는 일이다.

창계는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처음에는 사양하였다가(이우성, 『한국고전의 발견』, 한길사, 2000, p.306.) 결국 정언을 거쳐 부수찬, 이조 좌랑, 35세에 이조정랑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그해 모친상을 당하고,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면서 부여 용담 소림촌으로 이주하고 더 이상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길을 택하게 된다.


이처럼 창계는 사환기(仕宦期)에 실제 벼슬을 거부한 행적을 남겼다(김광순, 앞의 논문, 1986, pp.44~45;『숙종실록』, 숙종 22년 병자(1696,강희 35), 2월 6일(임진), 전 참판 임영의 졸기 참고.).

창계가 관직에 진출하여 조정에서 활동할 시기에는 남인과 서인, 또 노론과 소론이 대립, 분열하는 당쟁의 와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노소간의 대립이 심하였음은 창계 사후 문집 간행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이다(최윤정, 『서계 박세당 문학의 연구』, 혜안, 2011, p.56 참조.).


이상을 통해 창계가 16세에 「의승기」를 창작하고 수학할 당시는 병자호란 직후 벼슬을 거부하였고, 이후에는 당쟁의 여파로 벼슬을 꺼리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되어 창계 또한 그러한 삶을 선택했음을 볼 수 있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 깊게 빠져든 심학


벼슬에서 물러난 후 창계는 다시 「일록」을 작성하며 독서하는 일에 전념한다.

이때 계곡이 「음부경해서(陰符經解序)」를 지은 것을 검토하며 『음부경』을 다시 읽어보고 그 의의를 평가하면서 마지막에 잡서(雜書)로 취급하고 경계해야 함을 강조하였다(“因檢谿谷集陰符經解序遂, 取架上陰符, 再三披閱而默誦之.(중략) 又必取雜書, 亦可戒也.” 『창계집』 권25, 「日錄」, 乙丑.).


창계는 이보다 앞서 계곡의 「신명사기」에서 ‘신명사’를 정의하는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계곡의 「신명사기」와 「음부경해서」 등에 대해 반응한 흔적을 보인 것은 이들이 창계가 관심 갖고 있던 마음(心)과 관련 있는 저술이기 때문인 듯하다.

그리고 지난날을 돌아보고 다음과 같은 글을 「일록」에 남겼다.


귀와 눈이 보고 들음, 손발이 운용함, 입이 말하고 침묵함, 몸의 동정이 모두 마음이 하는 바이니 모두 마땅히 그 비고 비지 않음을 살펴야 한다. 비었으면 본심이 있는 것이요, 비지 않았으면 비록 모두 마음이 하는 바라고 말하더라도 또한 본심의 작용을 회복하지 않은 것이다.

耳目之視聽, 手足之運用, 口之語默, 身之動靜, 皆心所爲. 皆當察其虛與不虛, 虛則本心存也, 不虛則雖曰皆心所爲, 亦非復本心之作用矣. 『창계집』 권25, 「日錄」, 丁卯.


벼슬에서 물러나 2년이 지난 39세에 기록한 「일록」의 한 부분이다.

이목구비의 움직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본심을 회복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창계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며 16세에 「의승기」를 지을 때의 의식과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창계의 생애 정리와 의승기를 짓게 된 연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창계의 「의승기」는 병자호란을 겪으며 17세기 중반 벼슬을 거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16세기 『심경부주』의 영향으로 심학(心學)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그로 인해 문학창작이 이루어져 17세기까지 이어지는 문단의 경향을 반영한 작품이다.


창계가 정관재에게 수학하면서 문학에 대한 관점이 바뀌기 시작하는 19세 이전의 시기, 곧 8세에 누이들과 언문 소설을 즐겨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고, 14세에 조부께 궁리수심지학(窮理修心之學)의 글을 깨치며 심리(心理)에 관심을 갖게 되고 사장학에 매료된 시기에 「의승기」를 창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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