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정통’ 법관으로 평가받지만 여성과 장애인 문제에 비교적 진보적 판결을 내려온 이균용(61)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22일 윤석열 대통령에 의해 차기 대법원장 후보로 지명됐다.
법원 내부에서는 현 김명수(64) 대법원장에 이은 파격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대법관을 지내지 않은 법관이 대법원장으로 연속 지명돼서다. 대법원장 임기는 6년이다. 문재인 정권에서 임명된 후 진보적 색채가 짙어 정치적 편향 논란을 빚은 김명수 대법원장은 다음달 24일 임기 만료로 퇴임한다.
이 대법원장 후보는 법원 내에서 평생 재판 업무와 연구만 한 대표적인 보수 정통 법관으로 평가받는다. 법원 내 엘리트 판사들의 연구모임인 민사판례연구회 출신이다.
그는 2016년 투레트증후군(틱장애)을 앓는 장애인의 장애인등록을 거부한 행정처분이 차별에 해당하니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그해 ‘장애인 인권 디딤돌 판결’로 선정됐다.
2013년에는 배우 신은경씨와 병원의 민사 분쟁에서 연예인의 퍼블리시티권(초상사용권)을 인정하는 실무상 기준을 제시해 주목을 받았다.
이 후보는 일반적으로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지만 주관과 소신이 뚜렷한 인물로 알려졌다. 한 동료 법관은 인선 발표 후 “이 후보자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언행에 거침이 없는 스타일”이라고 언론에 말했다.
2021년 대전고법원장 취임 때는 “사법에 대한 신뢰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법원이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등 재판의 권위와 신뢰가 무너졌다”고 말했다. 당시 거짓말 해명 논란에 휩싸인 김명수 대법원장을 겨냥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이 후보는 보수 진영논리나 이념과 무관하게 법리에 따른 판결을 내렸다고 평가받은 사례가 적지 않다. 시위 도중 경찰의 살수차 진압으로 숨진 고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과 관련해 2019년 2심 재판에서 1심과 달리 구은수 전 서울지방경찰청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또 2020년에는 내란 선동 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이 일부 혐의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것에 대해 형사보상금(무죄판결이 확정된 경우 재판 당사자가 쓴 비용을 국가가 보상해주는 것)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그의 판결은 장애인이나 여성 쪽에 상당히 진보적 시각을 갖고 사회적 약자 신장에 앞장선 측면이 있다”며 “법리에 기초한 판결이라서 강한 보수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도 보수 정도가 아니겠느냐는 인식이다.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은 인선 발표 브리핑에서 “이 부장판사는 1990년 서울민사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부산, 광주, 인천 등 전국 각급 법원에서 판사와 부장판사로 재직하였고 대법원 재판연구관도 두 번이나 역임하는 등 32년간 오로지 재판과 연구에만 매진해온 정통 법관”이라고 평가했다.
김 실장은 “이 부장판사는 40여 편의 논문과 판례 평석 등을 발간하는 등 실력을 겸비했고, 서울남부법원장 대전고법원장 등 기관장을 거쳐 행정능력도 검증된 바 있다”면서 “그간의 재판 경험을 통해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원칙과 정의 상식에 기반해 사법부를 이끌어나갈 대법원장으로 적임자라고 판단한다”고 소개했다.
이 후보는 일본 게이오대에서 연수해 일본 법조인과 교류가 많은 지일파로도 꼽힌다. 일본 등 해외 법제에 대한 지식이 해박해 법원 내 비교 사법의 대가로 꼽힌다.
이 후보는 윤 대통령의 서울대 법대 1년 후배지만, 윤 대통령이 검사장으로 발탁된 이후로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7월 윤석열 정부의 첫 대법관 후보로 추천된 적 있다. 당시 이 후보와 함께 대법관 후보에 올랐던 오석준 제주지법원장이 대법관이 됐다.
대법원장은 국회 인사청문회와 본회의 임명동의안 표결(재적 과반 출석에 과반 찬성)을 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정치적으로 한쪽으로 두드러지게 치우치지 않고, 재판 업무만 해온데다 고액 수임료나 전관예우 논란이 있을 수 있는 로펌 근무 경력도 없어 야당인 민주당이 크게 반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사례는 없다.
윤 대통령은 대법원장 인선을 하면서 이른바 ‘사법부 정상화’ 실천 의지와 역량을 우선 기준으로 판단했다고 알려졌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임명한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이후 법원 내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이 요직에 발탁되고 판결의 정치 편향 논란까지 불거지면서 ‘법원의 정치화’ 시비가 계속돼 왔다.
이 후보가 임명되면 윤석열 정부 출범 후 네 번째로 임명되는 대법관이 된다. 13명으로 구성된 대법원 전원합의체(법원행정처장 제외) 대법관의 성향은 중도·보수 8명, 진보 5명 구도가 된다. 윤 대통령 임기 중엔 대법원장을 포함해 총 대법관 13명이 교체된다.
이균용 후보는 경남 함안 출신으로 부산 중앙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고 사법시험 26회(사법연수원 16기)다. 배우자 김희련씨와 1남1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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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명되는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의 '투렛증후군' 판결
재조명되는 이 후보자의 장애문제 친화적 판결
처음으로 심한 '틱' 증상을 장애로 판시
정부의 장애인복지법 개정으로 이어져
22일 차기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된 이균용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내린 과거의 판결들이 언론에 재조명되고 있다. 이 후보자는 특히 여성 및 장애인 관련 재판에서 약자에게 비교적 친화적 판결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대통령실이 22일 인선 배경을 설명할 때 언급한 ‘투렛증후군’ 판결이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이 후보자는 2016년 서울고법 행정2부 부장판사 때 투렛증후군을 법적 장애인으로 인정해야 한다며 1심을 뒤집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2019년 10월 대법원에서도 그대로 유지됐다. 정부는 이에 따라 2021년 4월 장애인복지법 시행령을 개정해 투렛증후군을 장애 유형에 포함시켰다.
이 후보자의 판결은 2017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매년 뽑는 ‘장애인인권 디딤돌 판결’로 선정됐다.
‘뚜렛 증후군(Tourette’s Disorder)’이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특정한 동작(운동틱)이나 음성(음성틱)을 반복하는 ‘틱(tic)’장애가 1년 이상 지속되는 것으로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는 일종의 신경계 질환이다. 주로 7세 전후의 어린 나이에 나타나 성인이 되어가며 증상이 호전된다. 1만 명 중에 4~5명 정도 발병하고 남자가 3배쯤 많은데 유전이 강하다. 1885년에 처음으로 이 증상을 의학계에 보고한 프랑스 신경과 의사 이름을 딴 병이다.
경기 양평군에 사는 A군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10년이 넘도록 투렛증후군으로 인해 일상 및 사회생활에 제약을 받아왔다.
그의 부모는 2015년 양평군에 장애인 등록을 신청했지만 양평군은 ‘투렛증후군이 장애인복지법에서 정한 장애에 해당하지 않는다’면서 신청을 반려했다.
A씨 부모는 양평군수를 상대로 “장애인 등록거부 처분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냈다. 그러나 1심은 “한정된 재원을 가진 국가가 장애인 생활안정의 필요성과 그 재정의 허용한도를 감안해 일정한 종류와 기준에 해당하는 장애인을 장애인복지법의 적용 대상으로 삼아 우선적으로 보호하도록 한 것이 평등원칙에 위반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양평군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2심을 맡은 이 후보자는 1심 판결을 뒤집었다. 그는 “장애인복지법 시행령에 틱 장애는 그 정도의 경중을 묻지 않고 이를 규정하지 않아 장애인으로 등록할 수 있는 방법이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다. 합리적인 이유 없이 장애인으로서 불합리한 차별을 받고 있다고 인정된다”며 “이는 헌법의 평등규정에 위반돼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당시 장애인복지법 시행령에는 투렛증후군 규정이 없어 장애 진단서를 발급받을 수 없었다. 이 후보자는 “행정입법의 부작위(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로 인해 이씨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장애인으로서 불합리한 차별을 받고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도 2019년 10월 “일상생활에 상당한 제약이 있는 투렛증후군 환자의 장애등록 신청을 거부한 것은 헌법의 평등원칙에 위배된다. 가장 유사한 규정을 적용해 장애 판정을 할 필요가 있다”며 이 후보자의 판결을 유지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법을 개정해 투렛증후군의 장애등록을 허용했다. 당시 보건복지부는 “이번 사례처럼 앞으로 법령에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질환이라도 장애로 판정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키로 했다”며 “장애로 인해 보호가 필요한 국민이 관련 규정으로 인해 좌절하는 일이 없도록 제도 개선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막상 현실에서는 투렛증후군이 장애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지적이 장애인 단체를 중심으로 계속 제기되고 있다.
투렛증후군으로 장애를 인정받아 장애인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보려면 2년 이상 지속적인 치료 기록이 있어야 한다는 장애 정도 판정 기준 때문이다. 투렛증후군은 약물 효과가 크지 않고 부작용 때문에 치료를 중단하는 경우가 많아 2년간의 지속적 치료라는 기준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투렛증후군 진료 환자 수는 한 해 1만 명 정도로 매년 증가하는데도 장애인으로 등록된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복지부는 지속적인 치료에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기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장애 심사 기회를 폭넓게 보장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장애등록절차에서 장애인이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는 전문가의 참여를 보장하는 등 적극적인 법 집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