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이일수록 정치와 종교 이야기는 피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 생각이 다른 친구와의 대화는 논쟁으로, 논쟁은 말싸움으로 이어지면서 감정이 상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내 의견에 동의해 주지 않는 친구에게 실망하고, ‘내가 왜 이런 애를 만나고 있나?’라는 자괴감으로 괴롭다. 그렇다고 절교하기는 그렇고, 계속 만나자니 또 말싸움을 할 것같고, 참 고민이다. 그래서 그런 친구와는 말싸움을 할 만한 주제는 피하게 된다. 과연 그것이 능사일까? 예술가들도 우리처럼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을 했는데, 크게 두 종류의 해법을 선택했었다. 우선 괴테와 베토벤의 선택은 속은 편한데, 뒷맛은 씁쓸했다.
생각이 달랐던 괴테와 베토벤
1812년 7월 19일, 괴테와 베토벤은 유럽의 왕과 귀족들의 여름 휴양지인 테플리츠Teplitz에서 처음 만났다. 상대의 작품을 존중하며 서로 호감을 품었던 그들의 첫 만남은 산책이었고, 며칠 후에 베토벤이 괴테에게 피아노 연주를 해줬다. 괴테는 다른 도시에 머물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토벤을 강한 집중력과 대단한 에너지를 가진 예술가라며, 심지어 그런 내면적 깊이가 남다른 예술가는 본 적이 없다며 경탄했다. 하지만 두 번에 걸친 첫 만남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상대를 향한 존경심이 무너지는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괴테 선생은 궁정의 공기를 너무 즐긴 것 같소. 시인치고는 너무 많이 마셔버린 거요. 정말이지 대가의 우스운 짓거리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거요. 시인이, 나라의 첫째 스승으로 여겨져야 할 시인이 이런 미미한 빛에 다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니요.”
자신의 악보출판업자에게 보낸 편지에 썼듯이, 그 사건으로 베토벤은 괴테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 영웅으로 떠받들던 괴테의 ‘우스운 짓거리’는 무엇일까? 이 사건의 내막은 둘의 만남을 주선한 시인이자 극작가인 베티나에 의해 알려졌다. 괴테와 베토벤이 함께 산책하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 황제와 신하들이 다가왔다. 이때 베토벤이 괴테에게 말한다.
“그냥 제 팔을 붙잡고 가만히 계시지요. 길을 비켜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저들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괴테는 길옆으로 비켜서서 모자를 벗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에 베토벤은 몹시 심하게 화를 내며,
“저는 선생님을 존경하고 크게 여기기에 오히려 저들의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런데 선생님은 저들에게 너무 많은 예의를 차리시네요!”
절교하는 게 속은 편하다
신분제 사회에서 왕이 행차하면, 길가에 비켜서서 고개 숙여 예를 갖춰야 했다. 괴테가 아무리 예술가로 위대해도 백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행동을 했을 뿐이다. 이를 두고 베토벤은 괴테가 황제에게 너무 굽신거린다고 생각했고, 괴테는 베토벤이 예절을 무시한다고 여겼다. 노시인은 젊은 베토벤의 불손한 태도에 경악했고, 그 이유를 청력상실로 인한 대인관계의 미숙함에서 찾았다. 하지만 베토벤은 인류의 정신을 이끌어가는 위대한 시인이, 한낱 신분제의 질서에 속박된 채 모두가 평등한 시대를 만들려 하지 않는 행동에 경악했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베토벤은 구시대의 예법보다 보편적인 인류애가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괴테의 입장에서는 베토벤이 예의를 지키지 않으니 평가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고(‘음악은 훌륭한데 사람은 좀 가깝게 지내기 어렵겠군’), 베토벤 입장에서 위대한 예술가 괴테가 18세기적 질서를 따르니 실망했다(‘작품은 위대한데 예술가로서 자존심이나 역사 인식이 빈약한 옛날 사람이군’) 따라서 괴테는 베토벤이 예의 있길, 베토벤은 괴테가 시대의 선각자이길 바란 셈이다. 요즘으로 치면, 둘의 정치 성향이 너무나 달랐다. 괴테는 18세기의 세계관으로 19세기를 살아가던 보수, 베토벤은 황제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모든 국민이 평등한 공화정으로 살아가던 진보였다. 서로의 작품을 존중하더라도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니까, 강한 실망감을 느낀 채 그들은 절교를 해버렸다.
이런 면에서 괴테와 베토벤에게 소개하고 싶은 프랑스 화가들이 있다. 그들처럼 정치적인 견해와 관점은 완전히 달랐지만, 동료로서 잘 지냈던 마네와 모네, 르누아르다.
생각이 다르니까, 친구다 : 마네와 모네, 르누아르
1894년에 유대인 출신 프랑스 군인 드레퓌스가 군사정보를 빼돌려 독일대사관에 전달했다는 ‘드레퓌스 사건’이 터졌다. 파리의 독일 대사관에서 발견된 서류의 필체가 드레퓌스의 글씨체와 비슷하다는 것이 반역 행위에 대한 유일한 증거였다. 이런 허접한 증거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했고 헝가리 태생의 에스테라지 소령이 진범으로 지목됐다.
하지만 진실 따위에는 관심 없던 군 수뇌부는 서둘러 진상을 은폐하고 에스테라지를 무죄로 석방했고, 간첩으로 조작된 드레퓌스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1870년의 보불전쟁에서 독일에게 패했던 프랑스의 반독일정서가 깔려 있었다. 프랑스의 여론은 완전히 둘로 나뉘었다. 평소에 진보적인 공화주의자였던 마네와 모네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믿는 친드레퓌스파였고, 왕당파에 가까운 르누아르는 반뒤레퓌스파였다.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대립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가까운 친구이자 돈독한 동료로 허물없이 잘 지냈다. 서로의 그림 스타일이 달랐듯이, 생각의 다름도 넉넉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우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그림으로 남아있다.
셋이 같은 날 한 장소에서 완성한 그림들로서, 모네의 집에 마네가 놀러 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뒤늦게 르누아르가 합류해서 모네에게 물감과 캔버스를 빌려 그린 그림들이다. 르누아르와 마네는 그림을 모네에게 선물했다. 저마다의 특색이 도드라진 이 그림들은 힘든 시기를 함께 헤쳐 나갔던 우정으로 빛난다.
상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틈이 필요하다
기도하는 손 모양은 달라도 기도하는 마음은 같다. 기독교의 교리가 옳다면 가톨릭의 교리와 불교의 교리도 옳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이 좋은 정치인이라면, 내 친구가 지지하는 정치인도 그럴 수 있다. 옮음(좋음)의 건너편에는 틀림(나쁨)이 아니라, 또 다른 옳음(좋음)이 있을 수도 있다.
친구는 생각의 같음(교집합)과 다름(여집합)이 공존하는 존재다. 친구는 나와 같은 생각을 품기도 하지만 완전히 반대되는 생각도 갖고 있다. 그러니 어떤 문제에 관해 관점이 다를 때, 그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름은 틀림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상대가 나와 같은 생각이기를 바라듯이, 상대도 내가 그와 같은 생각이길 바란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작은 가시가 큰 칼이 되기도 한다. 친구는 만나기 어렵고, 좋은 친구를 잃지 않으려면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