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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먹셀로나 Jul 16. 2024

나는 서른이 넘어 유학을 시작했다.

서른살, 다시 시작하기 딱 좋은 나이.

나는 서른이 넘어 유학을 시작했다. 


20대 동안 오랫동안 해외에서 살고 일하는 꿈을 꿨지만 번번이 모든 기회가 좌절됐다. 그렇게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지내다 우연한 기회에 지원하게 된 대학원에 철컥 붙었다. 장학금까지 준다고 해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갑작스레 우당탕탕 준비해서 떠나가게 된 유학이었지만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고 생각하며 행복한 마음으로 스페인으로 떠나왔다. 


그렇게 꿈꾸던 유학이었지만 현실 앞에 마음이 무너지기 일쑤였다. 영어 시험 점수는 잘 받았지만 해외 살이를 해본적이 없어 스피킹이 서툴렀다. UX 디자인은 설계를 하고 나면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하는게 절반인데 머릿속에 꽉 찬 아이디어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조별과제를 할때 친구들은 내 설명을 듣다가 포기하고 결국 다른 결론을 내리곤 했다.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하다 마음이 무너져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서 한시간을 울었다.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이상하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직장생활을 하며 모았던 돈과 대출을 받았던 돈은 6개월이 지나니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장 다음달 월세를 내는 일이 걱정이었다. 공부를 하면서도 프리랜서 잡, 장학금 기회를 미친듯이 찾아야 했고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틈을 빽빽히 채워 일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모니터를 하도 들여다봐서 눈이 빨개진 나를 보며 친구들이 '너 괜찮아?' 하고 자주 물었다. 


그놈의 비자는 왜이렇게 사람을 서럽게 하는지.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통장 잔고를 채워 비자 연장을 겨우 신청했고, 6개월 연장하는 비자는 4개월이 다되어서 나오며 마음을 쫄리게 했다. 학생비자로는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 학생비자를 악용해서 8시간씩 근무를 시키면서 학생 최저임금을 주는 회사도 있었다. 비자가 없으니 스크리닝 인터뷰에서 걸러져 실력을 보여줄 기회조차 없었다. 


한국에서 이력서 쓰고 면접보는 것과 해외 취업의 길은 또 달라서 배우고 익히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거의 200개의 회사에 지원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면접을 하도 많이 떨어져서 갈아엎은 포트폴리오와 이력서가 몇 번인지 모르겠다. 진짜 가고 싶었던 스페인 회사 최종 면접에서 떨어져 그 예쁜 바르셀로네타 바닷가에 앉아 엉엉 울면서 소리도 질렀다. (코로나라 사람이 없어서 가능했던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집에 돌아가는 버스에서도 자주 울었는데, 웬 동양 여자애가 스페인 버스에 앉아서 우는 장면이 흔하지 않아서 그런지 기사 아저씨가 자꾸 쳐다봐서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울면서도 하루에 두번씩 다른 회사에 지원을 했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자니 더 불안했다. 그 와중에 한국에서 진짜 괜찮은 잡 오퍼도 받아 '먹셀로나님 한국으로 오세요 ㅠㅠ'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코로나로 지친 마음,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운 마음, 편리한 시스템과 익숙한 언어들이 그리워 아 한국으로 그냥 돌아갈까 생각도 여러번 했다. 하지만 내가 뭔가 이뤄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만 하고 돌아가자니 여기까지 온 길이 너무 아까웠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2년 후 크리스마스 이브날, 나는 최종 잡오퍼 세곳을 받았다. 세 곳의 회사에서 나를 데려가겠다고 경쟁하듯 연봉을 올려줬고 가장 높은 연봉, 가장 좋은 조건의 회사를 골라가게 되었다. 


인생이 마치 퍼즐과 같아서 지금은 그 한 조각의 의미를 몰라도, 한 조각씩 제 자리에 놓다보면 언젠가 그 그림이 어렴풋이 보이는 날이 오게 된다. 


다 지나고 돌아서 생각해보니 어렸을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잘 몰랐을때 유학을 왔더라면 이렇게까지 노력하지 않았을 것 같다. 또 당시에는 아버지가 돈을 잘 버실 때라서 지원도 지금보다 더 풍족하게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내 스스로 온전히 성취해낸 길은 아니었을 것이고, 이 수많은 노력의 매 순간마다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도 만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20대 동안 여러 직장 생활과 갈등을 겪으며 단단해진 내면도 이 모든 순간을 지나오는데 도움을 주었고, 그 길을 거쳐오면서 디자인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을 단단히 먹게 되었다


이 모든 순간을 돌아보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열리지 않는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다. 늦었다고 생각한 그 때가 가장 적기일 수도 있다. 아마 완전히 새로운 길이 열리기 위해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기다리고 있는 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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