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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먹셀로나 Jul 29. 2024

말하지 않으면 모르니까요.

좋은 어른이 되어가는 중인 삼십대 사춘기. 

나는 예민하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자라면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누르고 자제하고 숨길줄 알아야 어른스러운 거라고 배웠다. 내 생각과 감정이 억누른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서로의 디테일을 챙기는 것이 익숙했다. 서로의 표정과 몸짓, 행동을 보고 자연스레 다른사람의 불편한 감정을 알아채곤 했다. 저 사람도 나처럼 마음에 숨기고 있는 것이 있을테니까, 그걸 표현하지 않더라도 서로 알아차리는게 '센스'였다. 나는 '알잘딱깔센'이 되기위해 애썼다. 


그렇게 삼십년간 정립된 나의 '어른스러움'이었는데, 스페인에 오니 180도 다른 문화와 대화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너는 뭘 좋아해?' 를 서로 묻고 그 중간을 찾아가며 의사 소통을 한다면, 스페인에서는 '나는 이걸 좋아해'를 서로 이야기하며 중간 지점을 찾아간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얘기하는게 쉽지 않았다. 아이도 어른도 모두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했다. 모두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 자기의 취향을 이야기 하다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다른사람들의 취향을 기억하게 되었다. 나는 저 사람이 좋아하는 것들을 기억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제안했는데, 저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제안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게 되어버렸다. 


남편네 집에서 종종 점심을 먹는다. 그때마다 어머니가 잔뜩 요리를 해주시는데 남편의 동생이 '나는 치즈 싫어' 하고 얘기한다. 또 남편의 사촌동생도 '저는 오트밀크 싫어요' 하고 이야기 한다. 반찬 투정을 한다기보다는 본인들이 싫어하고 못먹는 음식들에 대해서 참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한국 같았으면 어머니가 요리해주셨는데 저렇게 싫다고 얘기하는게 예의없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어머니도 아무렇지 않다. '아 오트밀크가 싫으면 다른 우유를 먹으면 돼지. 너는 치즈 싫으면 피자는 먹지마' 하고 넘어가신다. 


나는 유당불내증이 있다. 평소에는 괜찮지만 유제품이 들어간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탈이 난다. 어머니가 해준 음식을 가리는게 예의가 아닌 것같아 별말 안하고 넘어갔는데, 한번은 점심을 먹다가 뱃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몇번이나 화장실에 들락거리며 식은땀을 흘렸더니, 어머니가 물으셔서 남편이 나에게 유당불내증이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시며 '왜 말을 안했냐'고 하셨다. 앞으로는 'sin lactosa' (락토프리) 우유를 사오겠다고 하시고, 나중에 집에 돌아오고 나서도 남편에게 연락을 하셔서 '먹셀이 괜찮냐'고 물어보셨다. 


그때 깨달았다. 아, 이곳에서는 내가 불편한것과 내가 좋아하는것을 먼저 이야기 해주는게 오히려 배려일 수 있겠구나 하고. 무작정 참기보다 내 생각과 감정을 잘 전달할 수 있는게 진짜 어른스러운거라고. 다시 생각하니 한국에서 지냈기 때문에 상대방을 깊이 배려하는 법을 배웠고, 스페인에 와서 나를 건강히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셈인 거다. 아마 내가 오늘 깨달은 건 진짜 어른스러운 사람이 되어가기 위한 과정이고 이건 스페인이나 한국이나 상관없이 중요한 일일거라고 생각했다. 


삼십대 중반이 되었지만 스페인에 오고 반대로 뒤집힌 문화를 만나면서 사춘기를 다시 겪는 것 같다. 부디 내가 이 시간들을 건강히 잘 지내고 스페인의 건강히 표현하는 점과 한국의 배려하는 점을 잘 담은 멋진 어른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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