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를 말합니다
-왜 피곤하지. 다 무거워. 그냥 생산적인 건 다 안 하고 싶다!
얼마전 이런 말을 했다. 지난해부터 격주에 한 번, 책모임을 하고 있는데 이 날은 일주년 모임을 하는 날이었다.
"그래? 그럼 놀아! 누가 수지 못 놀게 해!"
친구의 반응 뒤로 나는 '생산적이지 않은 하루를 추구하는 브이로그'를 찍겠다며 선언을 했다. 그래. 가볍게, 생산적이지 않게, 자기계발 하지 않는 일상 말이야. 재미를 찾고 싶다고? 좋아. 그런데 자기계발 안 하는 거... 정말 맞지?
나는 그와 나 사이 녹화 중인 카메라를 두고 말했다.
"...내 브이로그는 모순이 컨셉이야!"
자기계발의 일종일 수 있는 '책 모임'에 와서 어떤 내용을 찍겠다고 구상한 브이로그 컨셉을 설파하고, 심지어 지금 또 한 번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여전히 생산적인 일에 뛰어들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말한다. 나의 추구미는 '느슨하고도 생산적이지 않은' 하루라고. 자기계발의 강박에서 벗어나겠다고 말이다.
1. 배경은 이러하다. 최근 들어 하나, 둘 구독해둔 뉴스레터가 쌓여, 읽지 않은 메일이 몇천개를 넘겼고, 일년치 선 결제한 유료 콘텐츠, 읽지 않은 책이 나날이 늘어갔다. 일 잘 하는 법, 자동화, 트렌드 레포트. 양질의 내용과 유익한 주제 여부와 상관없이 범람하는 정보에 피로감이 늘어갔다. 읽을 기력이 없다. 타인의 글에만 무심해지나 했더니, 내 글을 바라보는 심정도 비슷했다. 힘에 부친다.
2. 누군가에게 인스타그램은 긴 글을 남기는 채널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인스타그램 대다수 게시글은 4~5문단이 넘는다. 주로 한 주, 한 달을 회고하는 글. 좋은 공간이나 콘텐츠를 발견하거든 '나만의 인사이트'를 요점 정리해두곤 한다. 그러다보니 작성하는데 1~2시간은 물론, 세시간 이상씩 소요되기도 한다. 주로 현 시점은 멀찍이 앞서가 있고 SNS 속 타임 라인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며 각기 담아야 할 말을 넘치게 머금는다. 숨 가쁜 콘텐츠가 나온다. 마치 강약-중간약 리드미컬한 조합 대신 강강강 최대치의 볼륨을 뿜어내는 글. 이러니 '내 손을 거쳐 나온 글'을 포함해 성장을 얘기하는 콘텐츠가 '강강강' 울림으로 다가왔다.
3. 2년차 프리워커 기획자. 회사 밖에서 독립 생활을 하는 기획자라면, 동일한 시간에도 더 나은 생산성을 발휘해야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주기적인 회고와 피드백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나에겐 퇴사 후 충분한 포트폴리오가 없었고,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SNS에 '일 하는 모습'이나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했는지'를 자주 노출하지도 않았다. (이제서야 말하자면, 외부에 자유로이 일에 대해 표현하기 어려운 분위기도 한몫 했고)
때문에 "저는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인스타그램이나 브런치 같은 창구에 '일하는 사람 OOO'의 비중을 늘리고 싶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장기 프로젝트가 되어버린 일, 중도에 엎어진 몇몇 프로젝트로 인해 여전히 아웃풋이 부족했다. 이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럼에도 나는 무슨 마음으로 이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고,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증명하는 것이었다. 나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성장 가속 구간을 간절히 기다리면서.
4. 기획자의 글을 쓰자. 포트폴리오를 만들자. 이 과정을 콘텐츠로 발행하자.
그렇게 포부를 가진 후 어떻게 됐냐고? 3년 전 공방 창업 과정을 담은 영상 한 편을 어렵게 완성 했다. 커리어 연대기를 담은 영상을 만들겠다며 목차를 먼저 짜고, 계획했던 이 시리즈. 세 달 째 두번째 영상을 만들지 않았다. 컷편집만 해두었던 영상은 대략 5시간이 넘었는데 스크립트 수정만 반복하다가 결국 잠정 보류.
5. 무엇이 문제였는지 안다. 나의 똥고집. 2년 전, 1년 전, 반년 전... 그리고 지금. 모든 과정을 서사대로 기록하고 싶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과 '일단 해'를 외치는 이들 앞에서 어설픈 완벽주의를 외치며 각종 핑계를 대며 미룬 탓이다. 입만 가볍고 몸은 무겁다. 나의 체중은 1g도 달라지지 않았거늘, 팔다리에서 느껴지는 버거움은 상상의 무게였다. 보이지 않는 초조함과 불안감, 비교의식이 불어나 생긴 무거움.
6. 이럴 때 멱살을 잡고 끌어줄 강제성이 필요하다. 아주 작은 무언가라도 하게 해줄 그런 채찍질. 지난 3월, 나는 '크리에이터 북클럽'이라는 강제성을 샀다. -크리에이터 북클럽은 '오키로북스'라는 서점에서 진행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북클럽이다- 한달간, 나는 멈춰버린 유튜브 채널에 반드시 '브이로그'를 올리는 것이 목표였다. 다음과 같은 컨셉을 추리고 만들고 싶은 콘텐츠를 줄줄이 적어내기 시작했다.
"자기계발은 피곤하고, 평범한 브이로그는 지루한 이들을 위한 생산적 도파민 브이로그"
7. '브이로그'는 미래의 시청자를 위한 콘텐츠이기 전, 나를 위한 강력한 나침반이기도 했다. 3년 동안 올리지 않은 유튜브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마음 먹은 뒤, 오래전 영상을 보았다. 촌스러운 얼굴이 부끄러워 비공개 처리를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앳된 모습 사이로 그 시절 고민이 있었다. '이땐 이렇게 한 고비를 넘었구나', '여전히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구나.' 때론 '지금의 나보다 n년 전 내가 더 낫네' 하는 생각까지.
나는 원인을 알듯 말듯한 피로감을 호소하며 '생산적이지 않은 하루를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얼마안가 자기계발과 다르지 않은 행동들을 해댈 것이다. 천성을 거스르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몇 주 뒤, 이 영상을 보며 '아 나 열심히 살지 않기로 했지' 하고 [강강강] 모드를 잠깐이라도 내려놓겠지. 수년 뒤, '나, 여전히 이러고 있네'하며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위로를 받을지도 모르지. 이런 모순 투성이 영상이 쌓이다 보면, 문득 그 허술한 다짐 안에 나다운 얼굴을 발견할거라 기대해봐도 좋지 않을까?
8. 브이로그의 주요 키워드를 뽑아보자. '완벽하지 않은', '생산적 도파민', 그리고 '무해함'이다. 물론 '생산적인 하루를 추구한다' 말한 것처럼, 되고 싶은 내 모습에 가까운 표현이다. 조바심이 나고, 스스로를 못살게 굴 때마다 "선생님 가셔야 할 길이 그 방향이 아닙니다" 또 다른 자아가 뒷덜미를 잡아줄 수 있는 역할만 해줘도 충분하다. 내가 정한 콘텐츠 규칙이 있다.
- (나와 시청자 모두에게)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행동을 촉구하지 않는다.
- 예뻐 보이기 위한 부담감, 감성 브이로그의 때깔에 매달리지 않는다.
- 완벽한 모습, 완벽한 영상이 목적이 아니다. 행동하는데 의의가 있다.
- (나와 시청자 모두에게) 애쓰는 모습에서 '가능성'을 봐주고 '응원'해주자.
다시 말하자면 질투나 열등감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지양하고, 피로감이 쌓이는 과잉인풋도 지양한다. 언제든 그만할 수 있다. 그만하는 것조차 콘텐츠일 수 있다. 서사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모든 걸 순서대로 만들 필요는 없다. 날 것을 공개해야 한다는 민망함, 완벽하지 않다는 불안함에서 해방되자. 마지막으로, 나의 이야기도 타인의 사례도 어느 하나 '정답'을 규정지을 수 없다는 걸 잊지 말자. 상처주는 콘텐츠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9. 이러한 흐름을 정리해서 나온 결론이 '생산적이지 않은 하루를 살고 싶은 이수지'의 이야기다. 최근 어떤 인풋도 소화하기 싫을 만큼 쉽게 피로가 쌓이고, 일과 일상의 분리가 안 되는. 태어나길 책임감과 일 중독 증상을 보이는 사람의 이야기. '나 스스로를 즐겁게 만들 줄 아는 것'의 소중함을 체감하고, 의도적으로 일 외의 것들을 하고 싶다고 외쳐 본다.
이렇게 첫번째로 올린 영상에서 이런 모습을 담았다.
- 취미 생활조차 '잘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노트필기를 하는 나
- 하루에 독서, 기획, 콘텐츠 제작 스터디에 참여하는 나
- 자기계발 파업하겠다 반복적으로 외치면서 스스로 '모순'임을 알고 있는 나
10. 한 주에 한, 두개의 글 쓰는 시간을 갖고, 주기적으로 하는 운동과 책 읽는 모임이 있는 것으로도 '자기계발 파업'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사실 내가 하고 싶은 건 놀고 싶다는 마음보다, '완벽주의 강박'에서 '파업'하는 것이다. 효율성과 성장이란 단어를 종일 달고 살았던 나로부터 해방. 그래서 '딴 짓'을 지향할 것이다. 딴 짓만 하진 않지만, 삶에서 딴 짓의 파이를 넓혀가보려고 한다. 무용한 것들로 하루를 채우고, 이전이라면 하지 않았을 일에 기꺼이 시간을 할애하는 날이 모여 조금은 다른 색깔로 삶을 물들이고 싶다.
'아무것도 안 할거야'라면서 뻔뻔하게 '이것까지만 하고'라며 얼마나 많은 번복을 할지도 지켜봐주면 좋겠다. 100번 중 한 번의 여유라도 강강강강약이 되는 순간도 의미는 있으니까. 그렇게 작고 작은 숨구멍부터 틔워볼 생각이다. "나처럼 해봐요! 이렇게 살아보세요!"는 못 한다. 내가 못 보던 세계가 미세한 틈으로부터 확장되길 간절히 바란다. (나도 가봐야 알테니 몇 달, 몇 년 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나와 같은 슈퍼 욕심쟁이 예민러, 어설픈 완벽주의 인간, 스스로 '다능인'이라 불러도 될 지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은근히 재밌을 반전 드라마. 그 모순 안에서 '생산적 도파민'을 찾아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