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중간한 재능도 사랑할 수 있나요?

by 쑥라떼


1. 안 입는 원피스를 버릴까 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재봉틀을 꺼냈다. 장바구니에 묵혀 두고 있던 북커버를 만들자. 짬짬이 만들어야지 했던 마음과 다르게 앉은자리에서 네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잡은 재봉틀의 감촉이 낯설다. 제멋대로인 땀을 뜯고 박길 반복하다가 얼추 머릿속에 그려둔 모습이 나왔다. 90프로쯤? 완성도로 보면 70점 정도 되려나.


2. 굳이 멀쩡한 옷을 뜯어서 어설픈 북커버를 만드는 일. 눈으로 보이는 효율에 한해 말하자면, 대체로 물건은 만들어진 것을 사는 편이 합리적이다. 물론 장인의 작품, 전문가가 만든 맞춤 상품이 아닌 오늘처럼 취미로 만든 나의 '북커버'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다만 이 어설픈 북커버에는 이야기가 있다. 원피스였던 시간이 있고, 투덜대면서 실을 뜯고 박길 반복했던 순간이 있다. '이런 모양의 북커버가 있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실현했으니 이제 나의 상상은 '가정(if)'이라는 폴더에서 '경험 (what&how)'폴더로 이동한다. 어중간한 결과물을 들고 어중간한 만족감과 재미를 느끼면서 갈무리한다. 판매할 제품도, 나의 본업도 아니라 그런지 더 완벽하게 만들겠다는 욕심을 내지 않았다. 어중간한 게 싫지 않다.


3. 걸핏하면 완벽주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내가 어중간해도 괜찮은 게 있다니!
소위 말하는 '애매한 재능'을 대할 때, 나는 꽤 유연하고 헐렁한 기준을 잡는다.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의 문제라면 해결책을 찾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도 해결이 어렵다면 '이쯤에서 그만'이다. 어설픈 대로 둬도 별 타격이 없다.


4. 졸업 후 대학 시절보다 더 자주 재봉틀을 만졌다. (참고: 나는 의류디자인을 복수 전공했고, 12년 전 학생 할인을 받아 부라더 미싱을 샀다) 예쁜 천을 보면 무작정 사두고, 손으로 만드는 무언가를 좋아했다. 그렇다고 이 일을 업으로 할 생각은 없다. '디자이너'를 꿈꾼 적도 없고, 개발할 만큼의 재능도 없다고 생각한다. 종종 환기될 정도의 작업이면 충분하다.


5. 두 번째 퇴사 후 2년간 터프팅 공방을 운영했다. 내가 '터프팅' 공예를 하면서 깨달은 것. 나는 오랜 시간과 섬세함을 요하는 수작업이 맞지 않다.


얼마 전, 지인에게 '기와 장인' 이야기를 들었다. 기와는 작은 지푸라기 같은 불순물만 들어가도 구멍이 생겨 빗물이 스미면 깨져버릴 수 있다. 때문에 흙 반죽부터 검수까지, 가장 세심한 기술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가지각색의 공예 안에서도 세밀한 반복과 집중이 필요한 분야가 있다. 예를 들면, 라탄, 비즈 공예. 이런 공예 작품은 한 올이 뒤틀리면 와르르 지나온 길을 모두 풀어내 원점으로 가야 한다.


지나고 보면, 터프팅은 내 직성과 어울렸다. 넓은 프레임을 자유롭게 오가며 리드미컬한 속도감 위에 즉흥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작업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공예를 만났던 건 운이 아니라 타고난 상성처럼 이끌린 건 아닐까. 그렇다면 내게 '터프팅 잘하는 재주'가 있었을까. 타고난 능력뿐 아니라 훈련에 의해 획득한 능력도 '재능'이라 불린다니, 그런 걸로 하자.


6. 나에겐 몇 가지 어중간한 재능이 있다. 어린 시절 흑백 만화 속 주인공의 머리색, 옷차림을 상상하며 색칠 공부를 하듯 포토샵을 알게 됐고, 성인이 된 후 그 시절 '럭셔리타운'과 '장미가족 태그교실'을 보며 배운 잔재주를 '덕질'하는데 써먹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지하철 광고물을 디자인하고, 나아가 굿즈, 영상콘텐츠를 만들었다. 무언가 '하고 싶다', '좋아한다'는 마음으로 포토샵, 일러스트같은 편집 능력을 하나씩 획득했다. 딱 머릿 속에 있는 걸 그럴 듯하게 구현하는 정도의 능력이었다.


7. 어설프게나마 해본 일이 또 어느 순간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다. 내가 빼다 먹은 경험이 뭐가 있었나 지난 기록을 뒤져보았다.

a. 세계관 덕후는 세계관을 만들어
내가 계속해서 지키고 싶은 본질 '내러티브'라는 씨앗은 언제 심겼을까. 아마도 뮤직비디오 해석 영상을 만들던 대학 시절일 것이다. K-POP 세계관을 좋아했다. 앨범 아트, 안무, 뮤직비디오에 녹아든 콘셉트를 해석하고, 영상을 만들었다. 최근 여행용품 브랜드 '호롤로'의 리브랜딩을 진행하며 캐릭터 스토리를 잡고,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브랜드 세계관 이전에 팬심을 불태워 만들었던 케이팝 아이돌 세계관이 있었다. 결국 오늘의 결과물도 오래전 디깅의 산물 아닐까.
b. 경험X의지 = CAN DO IT
런던베이글뮤지엄의 신규 매장을 준비하며 '초대형 인형' 만들기라는 미션이 생겼다. 디자인 전공생이라면 학기에 몇 번은 방문했던 동대문 종합 시장이 무섭지 않았다. 터프팅 작업을 하면서 별별 소재를 사용했기에 실험할만한 재료도 많았다. 인형과 러그와 옷의 공통점은 '섬유'이다. 뜻밖의 믹스매치를 해내며 원하는 촉감의 인형을 완성했다.


어설픈 재능의 연장선을 뒤지다 보니 재밌는 에피소드가 새어 나온다. 어중간해서 용감했던 경험도, 그땐 몰랐고 때가 돼서야 빛을 발한 경험도 있었다. 일과 밀접한 경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 시절, '패션 블로거'라는 정체성으로 오색 찬란한 옷을 입고 다닐 시절을 거친 덕분일까, 여러 스타일을 시도하는데 거부감이 없다. 인테리어 가게를 하는 아버지에게 어너머로 배운 시트지 붙이는 방법으로 종종 가전 가구의 색깔을 바꾸기도 한다. 재봉틀은 주로 밑단 줄이는데 쓴다. 경험의 재활용이다.


8. 어중간한 재능들의 교집합. 만들기, 편집하기, 창작하기, 꾸미기.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구현하는 행위라는 공통점이 보인다. 이 또한 기획이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 아이디어는 형체가 없으니까. - 그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라서 - 생각을 실현으로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이 나를 움직였다. 결국 내가 제일 하고 싶고, 즐거워하는 건 내 생각을 세상에 내보내는 일이었다.


9. "-3년, +3년이 지금의 나라고 생각하거든. 지난 3년을 어떻게 살아왔나라는 흔적과 앞으로 3년을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기대감이 한 사람의 현재를 설명해 준다는 거지." - 기획의 말들, 김도영 (p.81)


현재에 한정해 가치를 정하지 말고, 시야를 넓힐 수 있다면... '어설픈 재능'이라 부르던 나의 작은 재능을 따뜻하게 바라보기. '이 아이들은 끊어내야 하는 어중간한 녀석이 아니다.', '나를 다음 무대로 이어주는 연결선이다.' 이렇게. 아직 연결되지 않아서 그렇지 이것들이 모여 폭발적인 무언가를 만들지 모른다. 어설픈 재능 안에서도 각기 다른 개성과 편차는 존재한다. 일단 살뜰히 돌봐주면 어떨까. (오늘도 나에게 가장 박한 건 나) 적당히 자라다 덜한 잎은 떨어지고, 자연히 자라날 잎만 남을 테니 말이다.


이것저것 경험해 본 것이 많은 사람. 앞으로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

이 두 갈래 사이 '내가 가진 일관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다능인이 맞는가' 질문한다. 다양성과 일관성도 공존할 수 있을까. '일관되게 다양한 삶'은 무슨 모습인가. 나의 오늘이 쌓여 미래가 되겠지. 숲과 나무는 따로 만드는 게 아닐 것이다. 아쉽게도 아직 '인생을 자유롭게 줌인-아웃하는 능력'이 없다. 요즘 일상은 더 이상 당길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된 상태, 시야가 닫힌 기분이 든다. 수없이 손을 뻗은 것들이 어느 방향성을 띄고 있는지 몰라 불안하다. 끝까지 확대를 해봤으니 이제 곧 줌아웃의 시기가 오려나?


10. 어중간. 애매모호. 어설픈 것. '재능'이란 말 뒤로 무용, 낭비란 이름을 붙여 버린 것을 반성한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뜸을 들이거나, 마치고 나서 후회하는 마음은 '쓰임'을 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효용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으니까.


나에게 묻는다. 모든 것이 그래야 하나.

첫째, 전문가가 아니어도 괜찮은 것을 하며 편히 숨을 쉰다. 뜸 들이는 시간이 짧고, 죄책감에서 자유로운 삶. 이것만으로 충분히 쓸모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 경험은 그 자체로 자산이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미래를 두고 감히 누가, '내'가 재단할 수 없다.

마지막, 불안에 이름을 붙이고 '어중간함'도 찬조출연시켜주련다. 또 왔네. 오늘은 어떤 귀여운 짓을 해볼까.


범인(凡人)으로 잘 살아가기.

어중간함의 미학을 잃지 말자.

매거진의 이전글줏대있는 일과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