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저 제주에 달리러 왔어요.
나는 이름에 ‘주’가 들어간다. 때로는 술 주(酒)가 되기도 때로는 달릴 주(走)가 되기도 한다.
어느 하나 포기할 수 없어서 두 글자를 합쳐보았다. 달리고 술도 달리는 주(走酒). 순서가 중요하다.
좌측 변에 달릴 주를 먼저 써줘야 한다. 술을 달리고 뛰는 것이 아니라, 달리고 나서야 술을 마실 수 있는 자격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자격을 사용할지 말지는 그날 아침의 공복 체중과 눈바디에 달렸다. 허리둘레에 지방이 늘고 배꼽이 선명하게 동그랗지 못한 아침이면 그날은 술을 단념한다.
적당한 웨이트 운동과 야외 러닝을 저녁에 꼭 하자고 다짐한다. 지금이 밖달(야외 러닝)을 즐기며 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힘들이지 않고 지키던 루틴이었지만,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걷고 술을 마시는 시간이 늘어나며 운동 종목은 달리기에서 걷기로 바뀌었고, 헬스도 자주 가지 못하게 되었다.
5월 밤공기에 취해 시작된 연애는 더워지기 시작한 6월 초에 끝났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와 걷고 마시는 낮과 밤으로 점철된 5월은 달콤했다.
사랑은 노력으로 되지 않았다. 그가 그의 루틴을 잘 찾아 돌아가기를 바란다. 나도 그럴 테니.
6월 6일 현충일에 이어 7일이 개교기념일이어서 계획한 4박 5일 제주 여행의 목적은 하나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Do nothing)”
분명 나는 운동, 일, 취미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을 테니 여행지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멍 때림’의 시간을 갖기를 바랐다.
하지만 6월의 나는 목표를 세워버리고야 만다.
“해변 따라 달리기”
다행히 급히 잡은 숙소가 해변을 따라 자전거 및 도보 도로가 잘 되어 있었다. 바다뷰인 것은 말해 뭐 해.
3월부터 4월에 이르러 야외 러닝 횟수가 늘고, 한 번에 뛸 수 있는 거리도 늘었다.
10km는 쉽게 뛸 수 있게 되었고, 5월 25일 바다의 날 마라톤에서는 하프도 크게 힘들이지 않고 뛰게 되었다.
그러니 6월 제주 여행에서는 해변을 달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제대로 주주한 여행을 하고 있다. 달리고 술도 달리는 주(走酒)를 매일 지키고 있다.
6일에는 하체 운동의 여파로 4km만 뛰었다. 대신 종달리까지 10km 이상을 걸어갔다.
7일에는 아침에 10km를 뛰었다. 바다를 보며 달리는 일은 생각보다 너무 즐거웠다. 힘들이지 않았는데 속도 신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오늘(8일)은 하루 종일 비 소식이 있었다. 새벽 5시부터 눈을 떠 언제 달리러 나갈지 고민을 하다가 ‘그냥 나가자!’고 결심했다.
작년 현대 롱기스트 러닝(10km) 마라톤에서도 비가 왔는데 오히려 시원하게 뛰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비소식을 보며 잠깐 그쳤을 때 나가는 것은 J인 나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에잇 그냥 비 맞고 달려! 비 따위가 내 러닝을 막을 수 없지.
구름이 해를 가려주고, 비가 몸을 식혀주니 계속해서 달릴 힘이 났다. 그림처럼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뛰는 이 순간이 너무 소중했다.
2km쯤 뛰니 몸에서 열이 났다. 결국 바람막이를 허리춤에 차고 브라탑에 쇼츠 차림으로 달렸다.
비가 오는데도 뛰는 모습이 멋있었는지 라이딩 족의 칭찬, 격려가 노캔을 뚫고 들려왔다. 잘 못 듣는 것 같으니 손 따봉도 해주셨다.
고마웠다. 비 오는 데도 라이딩을 하는 사람을 본 것도 내가 우중러닝을 다짐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으니, 당신들도 멋지십니다.
우중러닝의 매력은 확실했다. 땡볕에서 달리는 것보다 축축하지만 시원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운동화가 무거워지긴 하지만, 비를 맞는 경험은 생경해서 즐거웠다. 웃음이 났다.
오늘의 BGM은 ‘피, 땀, 눈물’이 아니고 ’비, 땀, 웃음‘
내일도 비 소식이 있던데, 완전 럭키유주잖아!
러닝화가 빨리 말랐으면 좋겠지만, 내일도 젖을 테니 괜찮다.
어떤 상황에서도 계획한 일은 할 수 있고, 오히려 그게 더 좋을 수 있다.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이제는 술을 달릴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