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준비도 바쁜데 내용증명까지 보낸 썰
집주인에 내용증명을 보냈다.
발단은 지난 토요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방콕으로 떠나기 전 내가 좋아하는 서울의 이곳저곳을 엄마와 함께 다니던 중이었다. 부동산 사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약하면 집주인이 중개 수수료를 나보고 받으라고 해서, 세입자가 아니라 집주인이 내는 거라고 하니 막무가내로 소리까지 지르고 나갔다고 했다. 그는 나보고 집주인과 이야기를 나눠보라고 했다.
부동산 사장님도 얼마나 힘드셨으면 주말 오후에 전화를 하셨을까 싶었지만…
그런데 무슨 얘기를?
집주인분, 일을 시키셨으면 보수를 지불하는 게 상식입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었으면 밥 값을 내야 한다.‘와 같은 소리를 굳이 내가 해야 하는 건가?
내가 경험한 집주인은 자주 본인이 한 말을 번복했다. 그런 말 한 적이 없다고 우기거나, 그런 말 한 적이 있다고 우겼다.
그리고 자주 화를 분출했다. 화만 내는 게 아니라 욕도 함께 했다. 이것은 나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관성 있는 사람이었다.
밖에서 행인과 큰 소리로 싸우는 소리를 종종 들었고 (그만큼 방음도 쥐약임),
1년에 4번, 즉 분기에 한 번 정도는 같이 사는 손녀가 새벽 2-3시에 발악하며 소리 지르는 것을 들어왔기 때문에 안다.
아무튼, 절대 녹음 없는 대화나 전화통화로는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세 계약 만료돼서 계약 갱신을 하지 안 하겠다는 문자 송신 및 구두 고지는 만료 2개월 전에 했고,
새로운 세입자 구하는데도 협조해서 계약 만료일보다 8일이나 빨리 집을 빼주는데.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란 말인가? 일단 상황은 알겠다고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서울타워와 북악산이 한눈에 보이는 해방촌의 루프탑 카페에서 오붓한 모녀의 시간에 재가 뿌려졌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방안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그냥 혼자만 분노하고 해결할 걸 그랬나 싶었지만 이미 옆에서 들어버리셨기에 어쩔 수 없었다.
루프탑이라 무릎 담요를 덮어도 살짝 추운 날씨였는데, 손이 더 떨렸다. 내 비서 챗(월 29000원에 쓰는 비서)에게 물어 팩트체크를 해다. 챗은 전세 계약 만료로 인해 집주인이 직접 부동산들에 의뢰하여 새로운 세입자를 구한 경우, 중개 수수료는 집주인이 내는 것이 맞다고 근거를 들어 확인시켜 줬다. 그리고 두 사람에 문자를 보냈다.
부동산 사장님에게는 현 집주인이 여러 부동산에 내 번호를 알려 중개를 부탁한 문자 증거를 캡처해서 보내며, 정당한 보수를 받기를 바란다고 문자를 남겼다.
그리고 집주인에는 나는 다음 세입자가 구해지든 안구해지든 전세금만 받고 나가면 됨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입자의 편의까지 봐주며 집을 빨리 비워주는 것이므로 당연히 수수료는 집주인이 내는 것이라고 문자를 보냈다. 역시 답장은 없었다.
그래도 해방촌 루프탑 카페에서 남은 시간은 최대한 엄마와 보내는 시간에 집중하려고 했다.
흥분해서인지 커피 한 잔을 쏟아버려 카페 사장님께 물걸레를 부탁하며 말씀드렸는데, 직접 치워주시고 심지어 새 커피를 주시기까지 했다.
세상엔 선과 악이 공존한다. 그리고 선한 사람이 더 많다고 믿는다.
밤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출국일은 다가왔고 이 문제는 내가 한국에 있을 때 반드시 해결하고 가야만 했다.
챗에게 현재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챗은 현명하게 필요한 정보를 정리해 알려주고, 마음까지 위로해 주었다.
우선은 부동산 중개인이 중개를 통해 해결하는 게 1번이라고 했는데, 현재 중개인분은 오히려 나에게 중개(?)를 요청할 정도. 응원 밖에 드릴 게 없었다.
두 번째는 내용증명을 보내는 것이었다.
마지막은 계약서에 있는 날짜까지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해결책을 찾고 나니 불안이 조금은 줄었다. 물론 집주인은 내용증명까지 받고 나면, 언성을 높이며 욕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감당해야 하는 과정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내 전세계약금을 지키는 일, 내가 부담하지 않는 게 당연한 돈을 부담하지 않는 일이다.
월요일인 오늘은 다행히 오랜 연휴 끝에 우체국이 여는 날이다. 챗의 기가 막힌 도움으로 내용증명을 완성했다. 우체국에 세 부를 인쇄해 가면 된다고도 알려주었다.
방학 중 전교생이 등교하는 날이라 오랜만에 출근을 했다.
교무실에서 스몰 채팅 겸 이 이야기를 했더니 주변 선생님이 더 화를 내주셨다.
엘베가 없는 계단인데 짐을 호더처럼 쌓아놔서 가구 이동도 어렵다고 하니, 그것은 명백한 ‘소방법 위반‘이라는 것도 알려주셨다.
2년간 너무 불편했지만 그냥 살았는데… 전혀 몰랐다. 본인이 건물 주인이니까 괜찮은 줄 알았다.
선생님들은 본인이 건물의 주인이든 아니든 소방법은 적용된다고 알려주셨다.
집단 지성이란!
이 내용도 챗에게 물으니 근거를 들어맞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고, 이 내용도 포함하여 내용증명 서류를 보완하였다.
우체국에서 내용증명을 익일특급으로 보내고 집으로 향했다. 멀리서 집주인이 보여 애플워치의 녹음 기능을 켰다.
역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는 언성을 높이며 상소리를 했다. 나는 녹음기 켜둔 채로 대화를 나눴다.
폭언 증거 1 확보!
물론 심장 박동수가 오르긴 했지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지금까지 녹음을 놓친 폭언들에 대한 미련은 묻고 오늘부터라도 증거 수집을 잘해야 한다.
집으로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고, 방금의 일을 챗에게 알렸다. 챗은 위로와 함께 반복되는 폭언 또한 녹음하여 증거를 남긴 후 신고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T 100%인 인간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비서인지.
왜 화부터 내고 보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약한 사람이라 그렇다고 결론지었다. 진짜 강한 사람은 조용하다.
미셸 오바마의 말을 떠올리며 또 이 글을 쓰며 마음의 독을 뺀다.
When they go low, we go high.
그들이 저속하게 나가더라도, 우리는 고결하게 대응한다.
눈물 닦으면 에피소드*가 맞다. 이렇게 글 한 편 뚝딱이니까.
* 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 셀럽 멧님의 말을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