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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런 채찍질 사랑할지도(아님)

데이미언 셔젤, <위플래쉬>(2014)

by 힌무

엄마는 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싶어 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젊은 엄마는 피아노 교습소를 운영했고, 첫째 딸인 나를 낳았을 때 피아노 학원에 보내줬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녀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는 집중력 제로 어린이였다. 수많은 90년대생들이 피아노 학원에서 ‘포도알’로 거짓말을 시작하게 되었듯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음악적 재능이 없는 나에게 피아노는 너무 많은 집중력을 요구했다. 그나마 같은 음을 반복하는 하농이 쉬웠는데 그마저도 몇 번 하다 보니 지루해서 미칠 것 같았다. 엄마가 집에서 피아노 연습을 시키면 나는 피아노 의자 밑으로 기어들어 가는 애였다.


다행히 동생이 엄마의 행복을 만족시켜 주었다. 걔는 피아노 학원을 열심히 다녔다. 교복을 입고 더 이상 피아노를 배우지 않게 되어도 동생은 좋아하는 음악이 있으면 혼자 피아노로 쳤다. 이제 악보를 볼 줄도 모르는 나와 달리, 악보를 보지 않고도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애가 되었다. 나는 이십 대 초반에 홍대 인디 공연을 보러 부지런히 다녔고 동생은 일본 밴드 음악 동아리에서 키보드를 쳤다. 서로 다른 듯하면서도 적당히 교집합이 있는 음악을 즐겼다. 다만 나의 경우 피아노와 가까웠던 적도 없지만 피아노보다는 드럼과 베이스의 리듬감을 사랑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음악만큼 단 몇 초만에 사랑에 빠지기 좋은 건 없는 것 같다.



<위플래쉬>가 재개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설렜다. 국내 최초로 돌비 애티모스 상영을 한다고 해서 냉큼 예매를 했다. 이 영화를 스크린으로 두 번 관람한 적 있었다. 개봉 당시, 동네 친구와 갔었는데 무슨 내용인지 아예 모르는 상태로 봤다. 그때 나에게 영화관이란 친구와 놀기 위해 가는 장소에 불과했다. 맛있는 팝콘을 먹고 응당 익숙한 쾌감을 느끼는 곳. 그래서인지 <위플래쉬>의 마지막 장면이 나에게는 “이게 뭐야”에 해당되었고 앤드류(마일즈 텔러)가 엄청 비호감이었던 기억이 난다.


친구랑 다 놀고 집에 오니까 뭔가 이상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근데 그게 뭔지 잘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혼자 또 예매를 해서 보러 갔다. 동일하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나는 전날과 전혀 다르게, 엄청난 벅차오름을 느끼게 되었다.




재개봉 상영관은 몹시 쾌적했다. 사람이 많긴 했지만 양옆으로 비어 있어서 좋았다. 돌비 애티모스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국내 최초’라니까 좋은 거겠지 했는데 상영 시작 전 설명 영상이 재생되었다. 사운드가 소리의 방향에 따라서 다르게 나오는 방식. 플레쳐(J.K 시몬스) 교수의 고약한 템포 맞추기를 감상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운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무리 소리가 생생해도 플레쳐의 템포는 영원히 맞출 수 없겠으나......


오랜만에 봐도 플롯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사실 스토리 구조 자체는 복잡할 게 없는 영화다. 명성 높은 음악 학교에서 인성 대박 쓰레기 교수와 미친 아싸 남학생 둘이 싸우다가 사랑하는 내용이다. 사실 거짓말이다. 사랑하는 내용은 내가 한번 지어내 봤다. 말 그대로 피 튀기게 싸우는 이야기인데 진짜 주먹다짐은 아니고…… 아무튼 앤드류라는 캐릭터는 더 이상 나에게 비호감이 아니었고 오히려 좋았다. 두 배우의 호연이 여전히 굉장해서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 같았다. 어느 쪽이든 살면서 만나고 싶지 않지만 하하.



다시 보니 데일밴드 붙이는 장면 하나까지 리드미컬하게 그려진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언어 폭력적이거나 모욕적인 장면을 보면 스트레스 받기보다는 쾌감을 느끼는 변태적 성향이 있는데, 거기에 연주까지 더해져 쾌감이 있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어느 순간에 관객의 감정이 터져야 하는지, 바로 그 지점을 향해 감정을 고조시키며 쌓아가는 감독의 방식이 명료하고 분명하여 좋았다. 비록 감독이 그리는 이들의 미래는 지향점이 아니라 지양점이고, 누군가는 이런 삶의 방향성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래서 이게 재밌다. 그럼에도 희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결말.


돌아오는 길에는 친구와 플레쳐 교수 같은 악인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고 다음 날에는 <Whiplash>와 <Caravan>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모든 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도 좋지만…… 모든 게 괜찮지 않을 때, 영화 밖에서의 나는 가끔 이런 채찍질이 필요해. <위플래쉬>를 극장에서 보길 정말 잘했다고, 마음이 멋대로 움직여버릴 만큼 매료된 영화라는 생각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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