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아웃2>의 불안이처럼
<인사이드아웃2>의 불안이는 나와 좀 친한 녀석이고, 그래서 작품의 완성도와 별개로 불안이라는 캐릭터 중심 서사인 게 마음에 들었다.
대표적으로 나에게는 손톱을 뜯는 습관이 있다. 손톱도 뜯고 입술도 뜯고 이것저것 다 뜯어버리는 습관. 그래서 언젠가 자조적으로 과장하여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나, 나의 살갗을 삭제하는 일에 능숙하다고. 이것에 재능이 있다고도.
증상은 보통 어려서부터 시작되므로 중기쯤 되면 습관을 멈추고 싶어진다. 이 재능을 언제 잃을 수 있을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지만 불가능했다. 불안과 초조, 긴장감, 산만함이 동시다발로 다가오면 마치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 자신의 털을 뽑는 짐승처럼…… 나는 괴로움을 잊으려고 더 큰 괴로움을 가져왔다.
그러니까 괴로움을 잊기 위해 감각을 상실해 버리는 셈이다. 그 중심에는 불안함이라는 감정이 지배적이었고. 아무 노력 없이 얻어낸 피부를 탈각시키면서 일종의 무감의 세계? 뭐 그런 세계가 있다면 거길 향해서 달려갔다. 통증이 느껴지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서 말이다.
한 번은 테이블 위에 쌓인 흔적을 보고 놀란 적 있다. 세상에, 이게 다 내 피부야. 나에게서 버려진 나의 일부야. 이미 죽어서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티끌! 정말 문자 그대로 티끌 모아 태산인 광경. 누가 볼까 조심스럽게 버린 뒤에 나는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멈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멈추고 싶다는 욕망도 사라졌다는 것을. 오히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좀 즐겨볼까,하는 생각까지 도달하게 됐다.
손톱을 뜯어서 자꾸 피가 났고 피가 굳으면 금방 거스러미가 생겼고 그러면 또 자꾸 뜯었다. 손톱을 최대한 짧게 깎아도 소용없는 것이, 문제는 <대체>가 아니라 <확장>으로 번지며 손톱 주변 살, 굳지도 않은 살을 뜯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깊이 요구되거나 높은 집중력이 필요한 상황이면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 했다. 나는 내 피부와 이런 방식으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 몰입하는 행위에 있어서 살갗은 손쉬운 연료가 되어주었다.
어떠한 움직임을 위해 소모되는 것. 가만히 있을 때는 쓰이지 않는 것. 글을 읽거나 쓰는 시간이면 이 고약한 육체가 멋대로 작동하여 연료를 계속 채워줘야 했다. 반대로 생각해 볼까? 살들이 부디 건강히 자라야만 뇌가 열심히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동네 친구가 처음으로 내 손톱을 정성스럽게 다듬어준 적이 있다. 친구는 나의 열 손가락을 동그란 조약돌처럼 곱게 빚어주었다. 그리고 옅은 하늘색으로 채워주었다. 남의 것이라고만 여기던 아름다움이 손가락에 안착하자 안정감을 깨고 싶지 않았다. 빛이 반사될 때마다 광택 나고 단단해진 손톱을 자주 들여다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하지만 일주일 정도 지나자 손톱에 도포된 네일이 살짝 위쪽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 부분을 아주 약하게 만졌는데 어느 순간 나는 홀린 듯이 그걸 전부 떼어내고 있었다. 순간 말 못 할 쾌감을 느꼈다.
다음에 한 번 더 친구가 손톱을 칠해줬는데, 고백하건대, 햇살 아래에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내심 힘을 잃고 표면에서 벌어진 순간이 기다려졌다. 하루빨리 과감히 벗겨내고 싶은 상상을 했다. 비밀스러운 희열. 이것도 몇 번 하다 보니 몹쓸 짓처럼 여겨져서 그 이후 손톱을 칠하는 행위에는 관심을 접기로 했다.
만약 뜯을 껍질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의미에서 '살 뜯기'란 가성비가 훌륭하다. 중독된다는 이유만으로 일상을 망치게 되는 존재는 수없이 많지만, 최선을 다해 뜯긴 손톱이나 입술을 뭐 그리 위험하지 않다. 단지 멈출 수 없을 뿐이다. 오락, 약물, 알코올보다 기껏 해야 거스러미를 뜯는 정도라면 가능한 범주. 어쨌든 외부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나의 피부는 다른 의미에서 불안과 긴장으로부터 보호하며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여전히 입술에 피가 나고 손톱이 지저분해도, 어떤 측면에서 나는 철저히 보호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