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의사 선생님의 처치나 처방에 대한 평가를 할 전문지식도, 식견도 없습니다. 개인적 경험에 대한 글입니다.
비염 환자에게 이비인후과 의원은 뗄 수 없는 곳 중 하나입니다. 저도 ‘단골(?)’로 다니는 의원이 항상 있었습니다. 잠깐 몇 번 갔던 곳 외에 오래 다녔던 곳은 세 군데입니다. 어렸을 적, 동생의 입학으로 이사를 가기 전까지 다니던 곳, 그리고 이사를 가서 나이가 먹은 근래까지 쭉 다니던 곳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사를 다니던 시절 도저히 다니던 이비인후과를 다닐 시간이 나지 않아서 다니기 시작했던 그때 회사 근처 이비인후과 한 곳이 있습니다.
단골(?) 이비인후과 만들기의 어려움
자주 갈 이비인후과를 찾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우선 제 비염과 관련된 이야기, 그리고 코가 심하게 막히고 나면 축농증이나 중이염이 거의 항상 온다는 것, 그 밖의 제 몸의 이비인후과적 특징, 이런 약에는 부작용 반응을 보인다는 이야기 등을 하려면 꽤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뒤로 기다리는 사람이 밀려 있는데 이렇게 오래 의사 선생님을 붙들고 말하기도 좀 미안했고요. 그리고 처방하는 약에 따라서 속이 아프거나 울렁거리는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결혼하고 처음 살던 집 근처에서는 다닐 곳을 찾지 못하고 결혼 전까지 다니던 이비인후과를 쭉 다녔습니다. 지금 사는 곳에 이사 와서 1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새로 다닐 이비인후과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다녔던 이비인후과 세 곳에서의 추억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그 처음은 제 첫 이비인후과 의원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 이비인후과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고학년 때 이사를 오기 전까지 다녔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얼굴도, 의원의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곳
선생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 건 선생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던 번쩍이는 반사경 때문인가 싶습니다. 그리고 치료할 때는 아파서 눈을 감고, 치료가 끝나고는 욱신거리는 코를 감싸고 빨간 불이나 김을 쐬러 걸어 나가느라 정신이 없어서 선생님 얼굴에 집중했던 적이 별로 없기도 하고요.
이비인후과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그냥 그곳을 ‘이비인후과’라고 불렀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저 ‘이비인후과’라고만 말하면 동네의 대부분 사람들이 “아, 거기”라고 알 만큼 주변에 다른 이비인후과 의원이 없었습니다. 엄마와 이비인후과를 가던 중 모르는 사람이 “여기 이비인후과가 있다던데 혹시 어딘지 아세요?”라고 묻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과 같이 이비인후과에 갔죠. 이비인후과에 가야겠는데 대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사람에게 그곳의 위치를 알려주기도 했죠. 모두 인터넷이 없던 시절, 물어물어 길을 찾고, 물어물어 병원을 다니던 때 이야기입니다.
이곳의 위치는 저희 집을 기준으로 학교와 반대 방향으로 멀리 있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바로 들렀다 집에 가는 건 하지 못했습니다. 일단 학교에서 오면 간식을 먹으며 조금 쉬었다가 다시 이비인후과에 갔습니다. 정확한 병원의 위치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동네도 무척 바뀌었더군요. 제가 살던 곳에서 어떤 지형지물을 지나 좀 더 가면 그 병원이 나왔었는데요, 지도로 보니 제가 살던 곳에서 그 지형지물까지도 꽤 걷겠더라고요. 더군다나 저는 보폭이 짧은 어린이였으니 더 멀게 느껴졌겠죠.
"참아야지!"
호통을 잘 치는 의사 선생님과 새침한 간호사 선생님들이 있던 곳이었어요. 코에 석션 같은 걸 아주 깊숙이 넣으면 저도 모르게 아파서 움찔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참아야지!”라고 호통을 쳐서 깜짝 놀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간호사 선생님들은 뭔가를 물어보면 “몰라”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코 때문에 머리가 멍멍한데 뭔가 억울하게 혼나고 오는 기분이 들어가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적응이 되더라고요. 의사 선생님은 나중에는 칭찬도 많이 해 주시고, 이런저런 도움되는 이야기도 해 주시고요. 까칠해 보이지만 걱정을 많이 해 주시던 분이었습니다. 호통을 치셨던 건 위험하니까 움직이지 말라고 그랬던 걸까요? 간호사 선생님도 나중에 친해지니 이런저런 말도 걸어주고 물어봐줬습니다.
엄마랑 같이 다니다가, 할머니와도 갔었는데요. 나중에는 저 혼자 가기도 했습니다. 엄마는 동생을 할머니께 맡기고 매번 저를 따라오는 것도 힘들어 보였고, 할머니께도 죄송했고요.
친구를 사귀었다
그리고 거기 가면 저처럼 자주 오는 아이들이 몇 있었는데, 이 아이들도 자주 혼자 왔습니다. 그렇게 거기서 여자아이 한 명과 친구가 됐습니다. 인근에 다른 이비인후과가 없어서 그랬는지 기다리는 시간이 꽤 길었는데 그 친구와 함께 기다리니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각자 학교에서 있었던 일도 얘기하고, 간호사 선생님께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물어보고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하면 잠깐 건물 아래층까지 내려갔다가 오기도 했습니다. 뭘 사 먹거나 그런 건 아니고, 순전히 그곳에 앉아있기 지루해서였습니다.
한 번은 그 친구가 엄마와 온 적이 있는데 그 아이의 어머니가 저를 보며 반가워하시더군요. 딸이 요즈음 병원 가는 걸 안 싫어하더라면서. 그렇지만 연락처도 모르는 사이였고, 더 이상 친해지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이 상태가 괜찮을 때면 만나지 못하는 사이였죠. 오랜만에 보면 그동안의 이야기를 하지만 또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관계. 그렇게 서서히 띄엄띄엄 보다가 더 이상 보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