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히 걸어 나가는 중
초등학교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은 이후로 나는 처음 전시를 하게 되었다. 사실 지금 하게 된 전시가 일러스트 분야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삶에서는 거대한 변환점이 되었다.
그림을 그리고 이렇다 할 결과는 없었지만 머리에 떠오른 주제가 있으면 앞뒤 안 보고 그림을 그렸다. 어쩌면 똑똑하지 못하게 움직인 게 아닌가 싶다. 돈을 벌기 위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움직였다. 반년 정도가 지난 지금은 나를 알리고 목표와 목적을 정해 움직이자고 다짐했다. 다짐을 행동으로 옮기니 그림작가로서 활동하기 위해 만든 소통 메일에 처음으로 알람이 울렸다. 메일 내용은 단체전 참여 제의였으며 나에게 거절은 선택지에 없었다. 받자마자 난 이걸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무 소중하고 감사한 기회라 아마 그 메일을 읽은 순간에 아드레날린이 마구 쏟아져 나왔을 거라 짐작한다. 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여러 걱정도 밀려왔지만 일단은 이 기회를 잡고 싶었기에 길지 않은 메일을 여러 번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차분하려고 노력하니 다시 현실적이고 문제의식이 강한 내가 되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전시가 처음이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또 그럴싸한 작품도 없이 내가 전시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나는 다시 한번 나의 연인에게 힘을 얻었다. 참가비와 재료비를 지원을 해줄 테니 고민 말고 기회를 잡으라고 나를 다독여줬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지금 고민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지'에 집중할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날 새벽 나는 여러 생각 끝에 참여 의사를 전달드렸고 그날 아침 계약서를 받았다. 회사를 다닐 때도 여러 계약서와 협약서를 주고받았지만 이번 계약서는 그때와 느낌이 너무 달랐다. 회사를 위한 계약이 아닌 나를 위한, 나로 이루어진 계약인 것이다. 이렇듯 여러 방면을 의미 담아 생각하는 나를 보며 나는 중도 있고 분명하게 생각하고 판단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설레는 감정에 들떠 혹여나 좋은 기회를 아쉽게 보내게 될까 걱정되어 전시를 시작하기 전까지 들뜨는 감정은 우선 접어두기로 한 것이다.
전시는 처음이라서 준비 전에 정한 이번 프로젝트의 슬로건은 '힘을 빼고 욕심을 버리자'이다. 처음이니깐 좋은 점은 경험치가 없기 때문에 내 생각의 경계를 두지 않고 용기 있고 개성 있게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점은 경험치가 없기 때문에 표현의 경계를 제한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산만하고 나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경험의 데이터가 없기 때문에 나는 이번 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장단점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장단점을 고려해 절제와 집중을 기본 마인드로 세팅하고 욕심은 없으나 자부심을 가지고 그림에만 집중해서 준비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내가 애정 담아 그린 그림들을 작은 엽서 형식으로 준비하고 작가로서의 명함을 만들었다. 명함은 50장을 주문했는데 전시장에는 몇 장을 비치해 둘지 고민이다. 비치한다고 생각하니 전시 구역을 어떻게 구성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림은 액자에 넣을지 아니면 개인 방을 꾸미듯이 마스킹테이프를 활용해서 전시할지 고민이 되었다. 참고로 참여하는 전시의 무드는 정해진 틀 없이 참여 작가들의 생각과 계획을 온전히 존중해 각자의 개성에 따라 다양하게 전시장을 꾸미는 듯했다. 전시가 처음인 나로서는 이러한 존중이 부담되지만 나름의 재미를 찾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오늘은 제작 주문을 넣은 그림엽서와 액자가 집으로 배송되었다. 그림쟁이로 살기 위해 평일에는 고정수입이 있는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아직 물품들을 확인 못했지만 오늘은 집 가는 길이 다른 어떤 날보다 설렐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렇게 소박하지만 나의 생을 위해 차근히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성실히 걸어가다가 나도 모르는 새에 흥겨운 발재간으로 이어진다면 그때는 감정을 누르지 않고 아이처럼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겨보겠다. 우선 오늘은 집에 기다리고 있는 반가운 택배들이 무사하다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하루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