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조정은 참 흥미로운 제도입니다. 교과서나 사법연수원 과정에서는 별로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던 것인데, 실무에서 보니 잘만 활용하면(특히 피의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는 기특한 녀석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형사사건 진행시 이 과정에도 상당히 공을 들입니다.
민사사건에서의 조정의 개념은 비교적 쉽게 다가옵니다. 돈 문제나 개인의 권리에 관한 다툼이므로 여러 현실적인 이유(손해액 산정 내지 입증의 어려움, 집행불능의 가능성 회피, 항소심 절차진행의 부담 등)로 서로 양보하여 적절히 타협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그러나 형사절차는 원칙적으로 국가질서라는 정의를 바로세우기 위하여 국가가 일방적으로 범죄인을 처벌하는 제도일 뿐, 누가 누구와 타협하거나 협상하는 절차는 아닙니다. 그런데 뭘 조정한다는 것일까요?
'뭐, 가해자와 피해자가 잘 합의해 보라는 자리겠지'라고 쉽게 생각하고 대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형사조정제도의 실질을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태도입니다. 특히 피의자(피고소인)의 경우 자칫 천재일우의 기회를 제 발로 뻥 차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민사 조정에서도 '양보해서 조정하는 경우'와 '패소할 위험을 감수하고 판결에 승부를 걸어보는 경우'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하는데, 하물며 인생에 전과를 남길 수 있는 형사사건에서의 피해자와 만나 합의(조정)할 기회는 돈 문제에 비교할 것이 아닙니다.
2011년부터 서울서부지방검찰청에서 형사조정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느낀 바를 적어봅니다.
형사조정제도는 주로 재산범죄 고소사건(사기, 횡령, 배임 등)과 소년, 의료, 명예훼손 등 민사 분쟁 성격의 형사사건에 대하여 고소인과 피고소인이 화해에 이를 수 있도록 지역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검찰청에 설치된 '형사조정위원회'에서 조정하는 제도를 일컫습니다(범죄피해자보호법 제6장 제41조 이하).
형사조정절차에 회부될 경우, 피의자는 일단 '시한부 기소중지' 처분을 받게 됩니다. 형사조정절차가 진행되는 동안(시한부) 수사절차가 일시 정지된다(기소중지)는 의미입니다.
형사조정제도는 단어의 구성만 살펴보면 마치 민사(조정)와 형사(처벌)를 합하여 놓은 외양을 취하고는 있으나, 엄밀히 따지면 별도의 소송 없이도 범죄 피해자가 조속히 피해를 회복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정책적 목적으로 마련된 특별한 형식의 민사조정제도에 불과합니다.
절차의 흐름을 보면,
1) 가해자(피의자, 피고소인)가 피해자(고소인)를 직접 만나 사정을 설명하고 사과한 후,
2) 가해자와 피해자는 손해배상에 관하여 일정 부분 양보를 한 후 원만히 합의하고(합의서 작성),
3)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감액된(양보된) 조정금원을 일정 기간 내(통상 3개월 이내)에 지급하면,
4) 수사검사는 형사조정결과를 감안하여 가해자를 처벌(수사 또는 기소)함에 있어 일반 형사절차와 달리 예외적이고 특별한 고려(기소유예 등)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쌍방이 원만히 형사조정합의에 이르렀다고 하여 국가의 형벌권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가한 손해 일부를 회복하였다고 하여 은혜를 베풀었다고 할 수는 더더욱 없으므로, 남아 있는 수사검사의 선처가 필수적으로 동반된다고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도 간혹 불운한 가해자의 경우 피해자와 원만히 형사조정에 이르렀음에도 기소되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금형 등의 결과만 놓고 따져볼 때, 형사조정절차에서 합의하지 않은 경우와 비교하면 가해자의 경우 합의금 + @를 합한 경제적 이득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제 경험상 그렇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의뢰인이 가해자(피의자, 피고소인)일 때와 피해자(고소인)일 때 그 방식과 효과는 천양지차입니다. 일반적으로 가해자의 입장일 때 형사조정제도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기소 전 피해자와 합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아직 형사사건에서 사건번호만으로 공탁하는 제도가 상용화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모르면 공탁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가해자의 엄벌을 원하는 피해자는 절대 공탁에 필요한 개인정보를 알려주지 말것을 수사기관에 강력하게 요청하며, 피해자의 변호인이 연락해도 이를 잘 알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2022. 12. 9.부터 피해자의 동의가 없어도 형사공탁을 할 수 있도록 공탁법 제5조의 2(형사공탁의 특례)가 시행되어,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알지 못하는 경우에도 형사재판이 계속 중인 법원과 사건번호, 사건명, 조서, 진술서, 공소장 등에 기재된 피해자를 특정할 수 있는 명칭을 기재하고, 공탁 원인 사실을 피해 발생 시점과 채무의 성질을 특정하는 방식으로 기재할 수 있습니다. 다만, 법관의 양형에 어떻게 고려될지에 관하여는 아직 세부적인 가이드 라인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2022. 10. 21. 수정함]
피해자는 진심어린 반성이나 사죄의 말 한 마디 없던 가해자가 임의로 공탁을 마친 후, 판사에게 '피해자가 안 받아줘서 이거라도 공탁하였으니 좀 봐주세요'라며 탄원서를 써 감형받고자 하는 시도를 막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을 감안할 때, 형사조정은 피해자와 개인적으로 만나 무릎 꿇지 않고서도 비교적 체면차리고 합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다양한 경력을 가진 형사조정위원들도 원만한 합의를 위해 피해자를 설득하는 등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해자 또한 합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형사조정기일 전에 미리 피해자를 만나 사과도 하고 원하는 합의금의 수준을 타진해보는 등 노력이 필요합니다만, 기소 후 만나주지 않으려 하는 피해자를 찾아가 고군분투하는 어려움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2) 같은 합의금을 써도 기소 전과 기소 후의 결과는 천지차이이다!
법조인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고 중요한 문장인데도 의외로 의뢰인들은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검사의 선처와 판사의 선처 중 한 가지만 고르라면 무엇일까요?
당연히 검사의 선처입니다. 똑같은 범죄를 저지른 A와 B가 있다고 합시다. A는 피해자에게 합의금 1천만원을 주고 형사조정이 성립하여 기소유예처분을 받았습니다. 반면 B는 합의하지 못해 기소된 후 비로소 1천만원에 합의하고 합의서를 판결선고 전에 겨우 재판부에 제출하였습니다. 그래봤자 B는 양형에서 선처받는 정도이지 선고유예를 받을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또한 일단 기소가 되고 나면 피해자가 요구하는 합의금은 더 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전략적으로 보자면 피고인은 이미 '기소유예'의 기회를 상실하였고, 지금 합의해봤자 형량만 줄어드는 것이라 합의의 '투자가치(혹은 효용)'가 낮아진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합리적 계산보다는 '선고날짜는 정해졌는데, 합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러다 진짜 감옥가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사실은 피해자도 이미 알고 있기에, 선고기일이 다가올수록 피해자의 협상력은 더 커지게 됩니다(물론 전과를 두려워하지 않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합니다만).
요컨대 가해자의 경우 어떤 이유에서라도 합의할 의사가 있다면 예상보다 돈을 조금 더 주더라도 기소 전에 합의하는 것이 유리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일부 예외도 있습니다만,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되는 경우이므로 굳이 이 글에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3) 잘 알려지지 않은 중요 포인트 : 형사조정의 과정이 수사검사에게 전달된다
제가 사건을 진행할 때 의뢰인에게 매우 강조하는 점이며, 합의가 되든 안 되든 형사조정에 최선을 다해 임해야 할 이유입니다. 변호인 없이 형사조정에 임하는 피의자들이 간과하여 놓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앞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모든 종류의 사건이 형사조정에 회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은 어떤 사건이 형사조정에 일단 회부되었다면, 가해자에게도 참작할만한 정황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간혹 그렇지 않은 사안들도 있습니다만, 일반론입니다).
그리고 형사조정에 회부되는 사건은 대체로 재산범죄나 가벼운 폭행사안 등 금전적 배상으로써 상당 수준의 피해회복이 즉시 가능한 경우입니다. 즉, '이 정도 사건에서 이 정도 합의금이라면 피해자도 합의할 만 하고 가해자 또한 참작할 만한 사정이 존재한다'는 대강의 기준이 경험적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해자(피의자, 피고소인)든 피해자(고소인)든 그 경험적 기준을 벗어나 무리한 태도를 보이면 사건의 결과에 영향을 미칩니다.
쉽게 예를 들어봅시다. A가 길을 가는데 B가 잔뜩 취해 A 주위를 맴돌며 시비를 붙습니다. A는 술주정 그만 하고 그냥 가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B가 계속 따라오며 욕지거리를 해 댑니다. 참지 못한 A가 B를 밀쳤는데 넘어졌습니다.
B는 A를 고소하였고, A는 폭행 피의자로, B는 피해자로 형사조정위원들 앞에 앉게 됩니다. A는 억울하지만 어쨌든 밀친 건 자기 잘못이니 합의금 200만원을 제시합니다. 그러자 B가 여러 이유를 들어 1,000만원은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A는 지금 당장 그런 큰 돈은 마련할 수가 없다 하여 형사조정은 불성립되었습니다.
자, 딱 봐도 B가 좀 너무하지요? A는 참 재수없게 걸렸고 말입니다. 형사조정위원들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정조서에 형사조정이 불성립한 이유를 기재합니다. 왜요? 검사 보라고 말이지요.
검사는 생각하겠지요. '피해자 B가 폭행을 유발한 점도 있고, 상해를 입은 것도 아닌데 천만원이나 요구하다니 지나치네. 반면 A는 가해자이지만 억울한 면도 있었을텐데 200만원 정도면 합의를 위해 나름 상당한 노력을 했군.'
이제 A는 검사에게 점수를 얻었습니다. 기소유예의 확률이 높아졌거나, 기소되더라도 구형하는 벌금의 수준이 조금이라도 낮아질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를 볼까요? 위 사례에서 술취한 B가 지나가던 행인인 A를 밀쳐 넘어뜨렸습니다. 이제 B가 폭행 가해자(피의자)로, A가 피해자로 조정위원들 앞에 앉았습니다.
A는 "엉덩이가 며칠 아팠지만 병원에는 가지 않았으니 치료비는 요구하지 않겠습니다만, 제가 누워있느라 3일 장사를 못했으니 100만원 정도면 합의할 생각이 있습니다"고 합니다.
그런데 B는 "제가 한 잘못이고 반성하지만, 지금은 형편이 너무 어려우니 20만원 정도로 합의하시죠. 지금 제가 돈이 없습니다." 합니다. 심지어 B는 A를 직접 만나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형사조정절차에 출석조차 하지 않은 채 전화로 그 뜻을 전해달라고만 합니다.
형사조정위원도 사람입니다. 술에 취해 멀쩡한 사람한테 시비붙고 넘어뜨리기까지 했는데 만나서 사과하기는 커녕 20만원 이상은 못 준다고 버티다니요. 와,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반면 A는 천사입니다. 살짝만 스쳐도 바로 누워 한방병원에 입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데, 저 정도 금액 요구는 합리적 수준이지요.
형사조정위원은 조정조서에 불성립이유를 쓰고, 이 또한 검사가 봅니다. '형편 어려운 사람이 술 먹을 돈은 있고 피해자에게 줄 돈은 없나보네? 어라 폭행 벌금 전과도 있네?' 자, B는 검사에게 오히려 더 점수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피의자(가해자, 피고소인)는 형사조정에 출석하고 절차를 준수하고 최선을 다하여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피해회복을 위한 진지한 노력을 했다는 인상을 조정위원들에게 줄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그 노력이 기록(조정조서)에 반영되도록 하면 더 좋겠지요.
4) 친고죄나 반의사불벌죄의 경우 : 당연히 더 노력해야 한다.
더구나 친고죄나 반의사불벌죄와 같이 피해자의 의사에 따라(합의여부) 처벌가부가 결정되는 경우라면, 당연히 합의에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 경우 변호인은 의견서를 제출하여 지금까지 합의를 위하여 노력한 정황, 아직까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 등을 상세히 밝혀 검사에게 적극적으로 형사조정절차에 회부하여 줄 것을 요청합니다. 형사조정절차의 성격상 조정이 성립되기만 한다면, 경우에 따라 이례적(!)인 형사처분의 혜택을 기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피해자의 입장이라 앞의 2. 항을 읽지 않으셨다면 다시 돌아가 다 읽으십시오. 그래야 가해자의 입장과 전략을 알 수 있고, 그래야 피해자로서 내 전략 또한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하의 유/불리는 논의의 편의상 금전적인 면만 보겠습니다. 합의금 상관없이 무조건 엄벌을 탄원하고 싶다면 굳이 고민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형사조정절차의 진행에 부동의하시면 됩니다.
앞서 가해자(피의자) 입장에서는 가급적 기소전 형사조정단계에서 합의하는 것이 기소 후에 하는 합의보다 결과측면에서 더 낫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피해자 입장에서는 거꾸로 봐서 형사조정에서 합의하는 것이 무조건 손해일까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1) 형사조정을 거부하고 기소 후의 합의를 노리는 것 : 대체로 유리하지만, 재수없으면 '꽝'된다.
피해자(고소인)입장에서는 실제 피해의 100%, 혹은 그 이상의 정신적 고통까지 보상받고자 함이 당연합니다. 사기사건이라면 사기피해액은 물론, 이로 인해 얻은 심신의 고통과 흩날려버린 경제적 기회 등을 생각하면 그 이상을 받아도 분이 안 풀리겠지요.
하지만 형사조정절차에서는 피해액의 100%조차 전액 배상받기가 사실상 어렵습니다. 제안받는 금액은 피해자 입장에서는 다소 만족스럽지 못하지요. 그래서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조정을 거부하였고, 다행히도 피의자가 기소되었다고 칩시다.
앞서 설명드린대로 피고인은 판사 앞에서 범죄인 취급을 받고 '아, 이러다 진짜 감옥가겠구나'라는 공포를 느낀 나머지 가족들에게서라도 돈을 빌려 형사조정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금액으로 실제 피해액 100%+ @ 를 가져와 제발 합의해달라고 무릎꿇는 경우가 있습니다. 꽤 있습니다. 이 경우 버티기 전략은 대성공한 셈이지요.
다만 반대로 '꽝'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불기소(무혐의)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된 사건인데, 사기 고의 입증이 쉽지 않은 사건입니다. 그나마 수사검사는 피해자를 구제코자 형사조정에 회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과 의도를 알리 없는 피해자는 조정 과정에서 완강한 태도로 일관하였습니다. 결국 조정불성립으로 되었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대질조사 등 추가 수사 후에도 결국 증거불충분 등 불기소처분으로 끝날 확율이 높겠지요. 보나마나 민사소송의 결과도 좋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예상을 깨고 검사가 약식기소(벌금형 구형)를 해 버린 것입니다. 벌금형도 무서운 전과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있지만, '벌금 까짓꺼 500만원 내면 그만이야'라며 우습게 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갑자기 가해자는 돌변하여 "벌금 내면 끝이니, 너한테 줄 돈은 한 푼도 없다. 민사소송을 얼마든지 해 상관 없어, 내 명의로 된 재산은 하나도 없으니까"하고 연락을 끊어버립니다.
아무리 탄원을 하고 정식재판에 회부해달라고 판사님께 편지를 써도 실제 구약식된 사건을 공판절차에 회부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사기, 횡령, 배임 등 경제범죄로 남 등치는 사람들 중에는 신용불량자인데다가, 돈이 될만한 재산은 다 가족명의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결국 한 푼도 못 받고 허무하게 끝나버린 것이지요. 냉혹한 현실입니다.
2) 하루라도 빨리 평온한 일상으로 복귀하는 이익, 그 이익이 적은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피해가 아주 심각한 경우가 아니라면, 합의금 얼마 차이에 연연하는 것보다 조속한 분쟁해결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분쟁에 휘말려 가해자랑 싸우고 밀당하고 검사한테 편지쓰고 판사한테 탄원서쓰고 하는 일은 생각보다 더 사람의 심신을 지치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대개 이런 상황에 처한 피해자에게는 주위에 쓸데없는 훈수를 두는 조언자가 너무 많습니다. "절대 양보하면 안 된다.", "이거에 저거에 이자까지 다 받아야지, 약하게 마음먹지 마", "그런 놈은 아주 혼내줘야 해." 이런 말을 듣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에게 돈을 받아내는 일만이 일생의 목표가 됩니다. 그러나 결국 그 목표를 이루는 순간, 수 개월 동안 망가진 자신의 일상이 비로소 보일 것입니다.
3) 결론 : 카드는 피해자가 쥐고 있지만, 게임이 끝나버리면 소용 없다.
이처럼 피해자 입장에서도 이해득실의 계산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위에서 카더라 하는 말을 듣고 내가 피해자니까 내 마음대로 되겠지 하면 안 되고, 사건 초기에 법률상담을 통해 내 상황에서 어떤 전략을 짜야 할지 큰 그림을 세워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형사조정에서는 집행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일반 민사조정절차에서 담기 어려운 사죄의 문구 내지 재발방지조치를 확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피해자가 합의조건을 잘만 짠다면 사건에 따라 상당히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공정증서의 무료 작성 또한 가능하나, 이 단계에서는 약속보다는 실제 합의금을 받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렇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허황된 변제 계획만 믿고서 합의할 수는 없습니다.
통상 오전, 오후로 나누어 형사조정을 진행하고, 각 회차별로 3~7건을 진행하나, 계산해보면 1건의 형사조정절차에 배정된 시간은 30분을 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난 가해자와 피해자라면 형사조정이 성립되거나 합의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사건의 실체에 대한 억울함을 말할 기회도 부족하고, 합의금을 가지고 밀당할 시간도 없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형사조정절차에서 고소인(피해자)이 새로운 범죄 성립의 증거를 제출하는 것도 어렵고 마찬가지로 피의자(가해자)가 무죄를 주장하는 처분문서를 제출하여도 형사조정위원이 이를 기록에 편철할 수도 없는 이상, 이를 기초로 형사조정과정에서 큰 고려를 받는 것을 기대하기는 사실상 어렵습니다. 형사조정절차는 수사절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합의금의 근거가 되는 서류를 정리하여 가지고 오시는 경우, 형사조정위원이 이를 살펴보는 수준은 가능하므로 권장할 만합니다.
형사조정위원은 통상 2~3명이 출석하며, 대개 법률전문가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섞여 있습니다(서울서부지방검찰청의 경우 형사조정조서를 작성하는 이도 상임형사조정위원입니다).
그런데 형사조정위원 또한 사건의 실체를 아주 상세히 파악하고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재판처럼 며칠 전 미리 기록을 받아 읽어보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형사조정위원들이 조정성립을 위해 설득이나 타협안을 제시하는 정도는 하지만, 아무 준비도 없는 당사자들을 즉석에서 짠 하고 합의시키는 것은 사실상 어렵습니다.
결국 형사조정을 성립시키고자 한다면 당사자들 또한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가해자라면 응당 형사조정절차에 회부되기 전에 피해자측에 먼저 연락하여 만나 사과하고 피해자의 요구사항을 미리 파악해야 합니다. 만날 수 없다면 다른 경로를 통하여 개략적으로라도 알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파악한 정보를 갖고 변호사와 상의합니다. 피해자의 요구가 적절한 것인지, 합의금을 어느정도 제시해야 할지, 만약 조정하지 않으면 기소 후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미리 계획을 세워두어야 합니다.
변호인 없이 혼자 대응하는 경우에 하는 큰 실수는, 각 절차마다 단절되고 즉흥적인 결정을 하여 순간만을 모면한 채 상황에 이끌려간다는 것입니다. 수사에서 기소, 재판까지 모든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행동과 결정은 하나의 일관된 전략에 따라 행해져야 하는데,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이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변호인을 선임할 비용이 부담된다면, 법률상담을 통해서라도 가능한 최대한으로 전문가의 지식과 경험을 활용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피해자 역시 형사조정절차에 나서기로 마음먹은 이상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캐묻고, 깨닫고 마음을 정리하여야 합니다. 나는 그래도 피해자니까, 형사조정위원들이 알아서 잘 해 주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상대방이 나에게 뭘 제시할지 당일날 절차에서 들어보고 그때가서 판단해도 괜찮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절차를 이끌어 가야하지, 이끌려가면 낭패만 봅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상대방에게 미리 알리거나 요구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은 나에게 왜 필요하고, 특히 내가 원하는 내용이 제3자(조정위원)의 입장에서 얼마나 합당한 요구로 비추어질지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피해의 내용은 가급적 입증가능한 서류로 정리하여야 합니다.
형사든 민사든 법적 분쟁에 당면한 경우, 많이 공부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때론 상대방의 입장에서, 때론 사법기관(수사관, 검사, 판사)의 입장에서도 많이 생각해본 사람이 더욱 더 유리합니다. 우연히 얻어지는 결과란 없습니다.
※ 2024. 4. 17. 추가) 코로나 이전에는 검찰청 내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 2~3명의 형사조정위원와 피의자, 피해자가 각자 대면한 상태에서 형사조정절차를 진행하였으나. 코로나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비대면의 방식(전화)으로 형사조정위원과 피의자(가해자, 피고소인), 형사조정위원과 피해자(고소인)사이에서 형사조정절차가 진행되어, 사전에 준비가 없는 경우 전화 한 통화만으로 절차가 마무리 되는 등 조정성립의 가능성이 낮아지게 된 점 또한 유의를 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