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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률사무소 무진 May 09. 2023

가계약 대법원 판례는 내 사건에 도움이 될까?

※ 유튜브 영상과 본문 내용 중 선호하는 방식으로 보시면 됩니다.




1. 무슨 판례가 나왔나?


작년 가을에  가계약에 관한 중요한 대법원 판례가 하나 나왔습니다.


가계약금에 관하여 해약금 약정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약정의 내용, 계약이 이루어지게 된 동기 및 경위, 당사자가 계약에 의하여 달성하려고 하는 목적과 진정한 의사, 거래의 관행 등에 비추어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기 전까지 교부자는 이를 포기하고, 수령자는 그 배액을 상환하여 계약을 체결하지 않기로 약정하였음이 명백하게 인정되어야 한다(대법원 2021. 9. 30. 선고 2021다248312 판결 참조).
- 대법원 2022. 9. 29. 선고 2022다247187 판결


그동안 해약금으로 하자는 명시적인 약정 없이 가계약금만 건너간 상태에서 계약이 무산되면, 가계약금은 돌려받을 수 있는지 아니면 몰취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하급심 판결들이 각자 다른 결론들을 냈는데, 이 대법원 판례가 정리해 준 셈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 대법원 판례의 등장으로 가계약금을 둘러싼 분쟁들이 사라졌을까요? 이제 안심해도 마음껏 가계약을 체결해도 괜찮을까요? 그렇지 않으니 제가 이 글을 쓰겠지요. 오늘은, 이 대법원 판례가 어떤 경우에 도움이 될 수 있고, 또 어떤 한계가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2. 무슨 사안인지 자세히 봅시다.


우선, 대법원 판례 사안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참고로 이 사건에서 원고는 중개사에 대해서도 공동 피고로 소를 제기했지만, 중개사에 대한 부분은 대법원 상고심의 판단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편의상 이 부분은 빼고 설명합니다.


원고는 중개사로부터 보증금 87천의 아파트 임차 매물을 소개받은 당일에 집주인 계좌로 가계약금 300만원을 입금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상황이 변해 계약을 하지 않게 되고, 이에 소유자인 피고(집주인)를 상대로 임대차계약이 체결되지 않았으므로 가계약금 3백만원을 돌려달라는 소를 제기하였습니다.


하지만 1심에서 원고가 패소해서, 원고 청구 기각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소액사건이라 판결문에 이유가 자세히 기재되어 있지 않아 패소 이유를 정확히 분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판결문 기재를 통해 원고가 소유자와 중개사의 공동불법행위를 주장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지만, 이것만 봐서는 청구원인에 불법행위만 있었던 건지, 아니면 부당이득반환이나 약정금반환청구도 같이 했는데 판사가 이유에 안 쓴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1심에서 패소한 원고는 포기하지 않고 항소를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졌습니다. 아무리 소액사건이라도 항소심에서는 판결 이유를 기재해야 되기 때문에, 드디어 우리는 왜 졌는지 이유를 알 수 있게 됐습니다.


…… 앞서 본 바와 같이 가계약금은 일종의 증거금으로서 원고가 계약을 포기한 경우에는 달리 정함이 있지 않는 한 몰취되는 성격의 금원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 달리 임대차계약이 체결되지 않는 이상 즉시 부당이득금으로 반환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원고의 주장은 독자적 것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데 원고가 스스로 계약 체결을 포기하였음은 앞서 본 바와 같고, 당사자 사이에 달리 정하였다고 볼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으므로, 피고 C은 지급받은 가계약금을 몰취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원고의 부당이득금 주장은 이유 없e다. 나) 또한, 을가 제2호증의 기재만으로는 피고 C이 가계약금을 반환하기로 약정하였다고 인정하기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는바, 약정금 주장 역시 이유 없어 받아들이지 않는다.
- 서울중앙지방법원 2022. 5. 20. 선고 2021나67741 임차보증가계약금 반환 판결


위 판결문을 보면, 가계약금은 일종은 증거금으로서라고 한 뒤, "계약을 포기한 경우에는 달리 정함이 있지 않는 한 몰취되는 성격의 금원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써서, 마치 가계약금의 증거금이라는 성격 때문에, 몰취된다는 결론이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것처럼 썼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하급심 판결례들을 보면, 똑같이 '증거금이다'라고 전제하지만, 그러므로 반환해야 한다고 결론내리는 경우들도 많으니까요.


, 증거금이라는 성격과 몰취된다는 결론은 논리적 귀결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대법원에서 증거금이라는 전제를 안 건드리고서도 결론을 바꾼 것이지요.


머리가 막 아파 오시겠지만, 포기하지 마시고 조금만 더 생각을 해봅시다. 우리가 여행 가기 전 숙소를 예약하는 경우를 떠올려 봅시다. 많은 숙소들에서 하는 예약 방법을 보면,  3박 예약을 하면 1박 금액 정도를 예약금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여행 못하면 예약금을 무조건 다 날리게 되나요? 대부분은 예약 당시 미리 조건을 공지하지요. '2주 전에 취소하면 전액 반환, 1주 전이며 50% 반환, 3일 전이면 반환 못함' 이런 식으로 공지를 해 놓고, 그걸 읽은 소비자가 해당 조건을 감수하겠다고 판단하면 예약금을 입금하는 것입니다.


증거금을 걸고 날린다는 규칙은 당사자가 합의를 하면 비로소 생기는 겁니다. 없으면 없는 것이지요. “서로 아무 말 안했다면 예약금은 전부 날리는 걸로 합의를 한 걸로 봐야한다.” 이 말이 논리적인가요? 제 눈에는 그렇게 안 보입니다만.


, 위 항소심 판결문의 의미는, 주심과 재판장이 '나는 몰취된다고 해석할 거다'라는 의지를 쓴 것입니다. 결국 위 사안의 항소심은 가계약금은 당사자 간에 별도로 정한 바가 없으면 몰취되는 것이고, 반환하겠다는 별도 약정도 이 사건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원고의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 1,2심 다 졌습니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를 가진 원고 덕분에, 우리가 감사하게도 이런 대법원 판례를 얻게 됐습니다.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원심, 즉 항소심 판결을 파기환송했습니다. ‘파기’, 깨서, ‘환송’, 돌려보낸 것이지요. 잘못했으니까 다시 재판하라는 겁니다. 


사실 이 22년 대법원 판결의 판시 내용은 그 1년 전인 21년에 이미 한 번 나온 적이 있습니다. 제가 예전 가계약 영상에서 소개한 판례인데, 그때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21년도 판례 사안이 조금 특이해서 정상적인 가계약금이 수수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안만 봐서는 과연 대법원이 일반적인 가계약 사안들에 관한 지침을 준 건인지, 아니면 그냥 해당 사안에서 상고를 기각한다는 취지에 불과한 것인지 명확하게 판단하기가 어려웠지요.


그런데 1년 뒤인 22년 가을에, 이번에는 일반적인 가계약금 사안에서 대법원이 같은 취지의 판시를 반복하자 이번에는 대법원의 메시지가 명확하구나 라고 판단을 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하급심에서도 이 대법원 판시 취지를 적용한 판결들이 나오고 있고, 여러분이 보시는 유튜브, 네이버 블로그 이런 곳에서도 변호사나 중개사들이 이 판례를 소개하는 내용을 많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판시 내용을 보면, 가계약금에 관하여 해약금 약정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런 내용의 약정을 하였다는 것이 명백하게 인정되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법조계에 종사하지 않으시는 분들의 눈으로 보면, 명백히 인정되어야 한다라는 판시가 좀 이상해보일 겁니다. 이건 마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하고 물었는데 "잘 살아야 합니다"라고 대답하는 수준이지요. '이런 판결문은 나라도 쓰겠다. 명백하다는 게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셨다면, 비판적 사고를 굉장히 잘하시는 분일 겁니다.


그런데, 법률적으로 이 판결에서 명백하게라는 네 글자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선, ‘해약금이라는 개념에서부터 출발해 봅시다. 원래 해약금 약정이란 매매계약을 할 때 돈을 한번에 다 내지 않고 그 중에 일부(보통은 10프로 정도)를 먼저 내면서, 지금 우리가 주고받는 이 계약금을 해약금으로 정하자. 원래 계약은 중간에 마음 변했다고 함부로 깰 수 없는 게 원칙이지만, 중도금이나 잔금 치르기 전까지 서로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상대방이 이행에 착수하기 전까지는, 준 사람은 계약금을 포기하고, 혹은 받은 사람은 그 배액을 상환함으로써 서로 깔끔하게 계약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라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법에 이런 조항이 있습니다.


제565조(해약금)

① 매매의 당사자 일방이 계약당시에 금전 기타 물건을 계약금, 보증금등의 명목으로 상대방에게 교부한 때에는 당사자간에 다른 약정이 없는 한 당사자의 일방이 이행에 착수할 때까지 교부자는 이를 포기하고 수령자는 그 배액을 상환하여 매매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하략)


매매계약에서 계약금을 주고받기만 했다면, 마치 해약금 약정이 있는 것처럼 취급한다는 겁니다. 이런 조항이 왜 생겼을까요?


민법의 계약법은 형법처럼 '반드시 지켜라, 안 그러면 처벌한다'는 성격의 조항은 많지 않고, 대부분이 당사자 간에 정한 게 있으면 그대로 하되, 명확히 정하지 않아서 분쟁이 생겼다면 이렇게 해결하라는 기준을 제시하는 규정들이 많습니다. 이 해약금 조항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매계약에서 계약금이라는 돈을 거는 부동산 거래 관행을 살펴봤더니, 대개 사람들이 어떤 약속을 하면서 돈을 걸 때는 그 약속이 깨지면 돈은 포기하겠다는 뜻인 경우가 많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조항을 둔 겁니다. 애매할 때는 이렇게 해결하라는 겁니다.


기존에 가계약금을 걸어놓고 계약을 안하면 포기해야 한다고 판결한 여러 하급심 판결들은, 비록 판결문에 명시적으로 이 민법 제 565조 제1항을 적용하거나 유추적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 바탕에는 이 조항의 취지가 고려되어 있다고 봅니다. 뭔가를 약속하면서 돈을 걸었으면, 약속이 깨지면 돈을 포기한다는 취지를 포함한 거라고 해석한 것이지요.


그런데 22년 대법원 판례가, '안 돼, 가계약금은 그렇게 하지 마. 명백하게 몰취된다, 배액상환한다 이렇게 약정한 경우에만 해약금으로 인정해'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이 명백하게라는 네 글자가 법적으로 의미가 있게 됩니다.



3. 그래서 평화가 찾아 왔을까요?


우선, 이 대법원 판례가 당장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안들이 있습니다.


1. 아직 계약 성립에 이르지 않았음이 명확하고,

2. 가계약금만 주고 받았으면서,

3. 계약체결이 안 되면 그 돈은 어떻게 하자는 논의가 전혀 없는 경우라면,


그렇다면 도움이 됩니다. 내용증명이나 소장에 이 판례를 인용해서 상대방을 압박할 수 있고, 재판부도 이 판례를 고려할 겁니다. 실제로 최근에 저희 사무실에서 진행한 가계약금 상담들 중 몇 건에서는 의뢰인이 이 대법원 판례를 손에 들고 기쁜 마음으로 귀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래 실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겁니다. 실무는 발빠르게 판례를 회피해 가고, 판례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제가 지난 몇 년간 가계약 사건들을 진행하면서 해 오면서 보면, 대부분에 사건에서 주요 증거로 제출되는 것이 중개사가 매매당사자들에게 보낸 문자나 카톡입니다. 근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문자 내용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진화한다는 겁니다.


초기에는, 문자에 가계약금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들어가고, 문자 내용도 가계약금 얼마 입금되었다. 언제 만나서 계약서 쓰자 이런 내용만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건에서 제 눈에 확 들어왔던 것이, 문자에 가계약금이라고 안 쓰고, ‘계약금의 일부라고 써 있는 겁니다. 통화내역을 들어보면 말할 때는 다 가계약금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문자에는 일부러 '계약금의 일부'라고 표현한 것이지요. 가계약금을 계약금의 일부라고 쓰는 이유는 계약이 이미 성립되었고, 전체 계약금의 일부로써 받은 것으로 취급하겠다는 뜻입니다. , 나중에 당사자들이 계약 안하겠다고 하면 가계약이 아니라 본계약을 깬 거다라고 주장하기 위한 밑작업을 해 놓은 겁니다. 사실 당사자들은 문자를 받고도, 그런 내용이 있는지도, 그게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런데 재밌는 것이, 그 즈음을 기점으로 해서 다른 사건들에서도 계약금의 일부라고 쓴 문자들이 갑자기 많아지는 겁니다. '어 이게 뭐지? 왜 갑자기 다들 이렇게 쓰는 거지?' 싶었지요.


그리고 나서 조금 지나니까, 또 새로운 게 보입니다. 문자에 계약금 일부의 입금으로 매매계약은 성립된 것으로 본다고 써 있는 겁니다. 잔금일이고 뭐고 아무 것도 안 정했는데, 가계약금만 받고 중개사가 이렇게 문자를 보내 버립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이, 이것도 마찬가지로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다른 여러 사건들에서도 갑자기 비슷한 문구가 많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요즘은 어떨까요? 문자 내용이 엄청 길어졌습니다. 뭐 계약금의 일부고, 약이 성립된 것이고, 해약금이 어떻고 위약금이 어떻고 몰취하고 배액배상하고 별별 내용이 다 써 있습니다.


"그게 뭐가 문제냐? 중개사가 법적인 거 자세하게 다 적어서 문자로 보내주면 좋은 거 아니냐?" 라고 반문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어떨까요?


좋지 않습니다. 아주 나쁜 겁니다. 왜냐하면, 당사자들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통화내역을 들어 보면, 8년 전이나 지금이나 중개사가 당사자들과 전화로 나누는 얘기는 항상 똑같습니다. “오늘도 벌써 5팀이나 보고 갔어요. 빨리 잡으셔야 돼요. 일단 가계약금 먼저 넣으시면, 조건은 제가 최대한 맞게 잘 얘기해 드릴게요이런 수준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일 제대로 하는 중개사님이라면, 당사자들에게 미리 가계약금 입금 후 계약이 성사되지 않으면 이 가계약금은 어떻게 처리하기를 바라십니까? 이 부분에 대해 당사자 사이에 합의가 되면 앞으로 해약금으로 또는 위약금으로 이러이러하게 귀속이 됩니다. 다 이해 하셨으면, 신중히 생각해 보시고 가계약금을 입금해 주세요.”, 이렇게 설명을 하실 겁니다.


그런 경우라면 문제가 안 생길테니까, 변호사인 저한테 사건이 올 일이 없겠죠. 저는 그런 경우의 가계약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문제 있는 사건들이 저한테 계속 오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진화하는 문자들을 볼 때마다 항상 궁금했지요. '왜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여러 중개사들이 쓰는 문자들이 이렇게 다 같이 닮아가는 걸까?' 너무 궁금했는데, 어느 날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드디어 알게 됐습니다.


보니까, 중개사분들이 유튜브와 인터넷 카페로 서로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학습하시더라구요. 특히 이 가계약에 대해서 공부를 좀 하신 분들이, 가계약 문구를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하고 가르칩니다. 제가 여러 영상을 봤는데, 지금까지도 제 머리 속에 남아있는 코멘트가 있어요. “이렇게 써야 발을 못 빼게 만들 수 있어요!” 라고 하시더군요.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앞의 대법원 판례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 대법원 판례에서, 항소심은 본계약이 아직 체결되지 않은 상태라고 보았고, 대법원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 이 판례는 본계약이 성립되지 않은 경우에 + 가계약금 반환에 대한 명시적 약정이 없는 경우에 한정된 판례이지요.


계약금의 일부’는 가계약금이 아니라 정식 계약금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근거입니다. '계약이 성립되었다'는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약금, 위약금' 약정을 명시적으로 써 놓는 것은 대놓고 위 대법원 판례를 회피하겠다는 겁니다. 즉 대법원 판례를 들이밀면, “아 그 판례는 가계약금을 말하는 거고, 우리는 가계약금 아니에요. 계약 성립 다 된 거잖아요.” 라고 반박하려고 만들어 놓은 근거들입니다.


이렇게 실무는 날아가는데 판례는 언제나 늦습니다. 이제 겨우 써먹을 만한 대법원 판례가 하나 나왔는데, 그 사이에 중개사들은 이렇게 훨씬 앞서 진화하고 있습니다.



4. 그럼 대법원 판례는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러면 '22년 대법원 판례는 쓸모없다'는 것이 이 글의 결론일까요?


아닙니다. 또 헷갈리게 해서 송구스럽습니다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입니다.


문자라는 프레임에 갇히시면 안 됩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봅시다. 내가 부동산에 집을 20억에 팔아달라고 내놨습니다. 그런데 중개사한테 문자가 왔습니다. “요청하신대로 땡땡아파트 101903호는 20억에 김땡땡에게 매도하여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계약금 2억이고 잔금은 2달 뒤 18억입니다그럼 우리집 팔린 걸까요? 소송하면 김땡땡씨가 저 문자를 근거로 내 집을 가져갈 수 있을까요? 


말도 안되지요. ? 내가 중개사한테 20억에 팔아달라고 한 것은, 내가 원하는 조건에 맞는 매수인을 찾아주면 내가 만나보고 계약을 할지 말지 정하겠다는 취지이지, 중개사한테 내 집을 팔 권한을 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중개사가 문자에 무슨 내용을 담건 간에, 그 문자는 내가 쓴 것도 아니고 계약 상대방이 쓴 것도 아닙니다. 그냥 중개인이 하고 싶은 말을 쓴 것이지요. 중개인이 문자에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라고 쓰기만 하면, 상대방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데 계약이 성립될까요?


중개사는 매매계약을 중개,알선하는 사람이지 나의 대리인이 아닙니다. 계약이 성립되었느냐, 해약금 위약금 약정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중개사가 문자에 뭐라고 썼느냐 아니라 당사자 사이에 그러한 합의가 실제로 있었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 겁니다. 이제 제가 문자 프레임에 갇히시면 안 된다고 말한 의미가 이해가 되시나요? 실제로 여러 하급심 판례들 중에는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판시들이 많습니다. 중개인의 문자 내용만으로 당사자의 합의가 확정적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판례들은 하급심이고, 그걸 쓴 판사는 수많은 판사들 중에 일부일 뿐이라는 겁니다. 이런 판결례들과는 다르게 어떤 판사들은 중개인 문자가 과연 당사자의 합의에 기반한 것인지 깊이 살펴보지 않고 그냥 중요한 증거라고 판단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게 하급심 판례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관한 대법원 판례가 앞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제가 실무가로서 현 시점에서 여러분께 확실한 답을 드릴 수 없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보면 22년 대법원 판례는 가계약 실무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종결자가 아닙니다. 중개사들은 저 판례를 회피할 방법을 이미 많이 만들어 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정리하자면,

1. 22년 대법원 판례는 중요한 내용이 맞다.

2. 하지만 다양한 가계약 분쟁 사건들 중에서 그 대법원 판례가 모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3. 그리고 소송에 갔을 때, 아직 이 가계약이라는 분야는, 본계약의 경우처럼 이론과 판례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판사마다 가계약을 바라보는 관심도와 지식의 정도가 많이 다르다. 대법원 판례가 더 나오기 전까지는 아마도 향후 상당기간 혼란이 계속될 것이다.


이것이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입니다. 결국 가계약금을 걸 때는 항상 신중하셔야 되고, 중개사가 보낸 문자 내용을 정확히 모르면 함부로 알았다, 동의한다 이렇게 답하시면 안 됩니다.



5. 한 마디만 더 합시다.


혹시 법조인이거나 법공부하는 분들께서 읽고 계시다면 한 번 같이 생각해 보십시다. 


현재 공인중개사들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가계약 관행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기 결정, 자기 책임의 원칙이라는 계약법의 근본 원리를 위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기 결정, 자기 책임의 원칙은 현대 민법의 출발점인 사적 자치의 원칙이 표상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판사나 변호사같은 법조인들은 자금력 있는 개인이나 법인이 변호사를 선임해 계약조건을 협상하는 사건들을 많이 접하기 때문에, 그 심각성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에이~ 중개사가 대리인도 아닌데 당사자 동의도 없이 그런 말들을 문자에 마음대로 적겠어? 그럴 리가~’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실제 부동산 거래를 보면, 평범한 일반 개인들은 판사나 변호사가 막연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중개사들에게 의존합니다. 중개사는 대리권한을 수여받지 않았음에도 실제 계약 현장에서는 대리인 역할에 변호사 역할에 법원 역할까지 엄청난 힘을 행사하고, 심지어 쌍방대리와 유사한 지위에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사건을 하면서 아니 물건도 상대방도 모르면서 가계약금을 왜 주고 받는거야? 그런 걸 뭐하러 해?’라고 생각했는데, 의뢰인들 말을 들어보니 매매계약을 하려면 가계약금을 꼭 줘야 하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중개사의 설명을 의심해 보거나, 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자기 권리를 스스로 챙기는 일반인들이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나마, 소송으로 간 사건들에서는 당사자가 법원의 판단을 받아 볼 기회라도 있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법원에 가는 사건들보다 그렇지 않은 사건들이 훨씬 더 많고, 그 중 상당수는 잘 해결되서 그런 게 아니라 당사자들이 불이익을 감수하고 포기하는 겁니다. 나는 가계약금 몰취 약정을 한 적이 없는데, 나는 해약금 위약금이 뭔지도 모르는데, 중개사가 제가 보낸 문자에 그렇게 돼 있잖아요라고 말하면 당사자는 아 그렇구나, 내 잘못이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억지로 자기가 합의한 적도 없는 내용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거나 해약금 위약금을 물어내는 겁니다.


물론 사법부에서는 '그런 건 국회나 행정부에서 중개사법에 조항을 추가해서 해결할 일이지, 우리 일이 아니다' 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자기결정의 원칙이라는 민법의 근본원리 정도는 국회 도움 없이도 우리 대법원이 충분히 지켜줄 수 있는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에서 부동산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정의 전재산입니다. 이런 중요한 거래에 있어서 법원이 당사자의 합의가 무엇인지를 해석할 때는 당사자와 독립된 별도의 이해관계를 갖는 제3, 즉 중개사가 작성한 자료들을 당사자 의사표시의 근거로 인정함에 있어서 사실인정에서 보다 명확하고 엄격한 입증을 요구해야 합니다. 제가 기다리고 있는 대법원 판례는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제가 매번 말씀드리지만, 가계약은 아직 법원에서도 새로운 영역이고 세간에 잘못된 정보가 많습니다. 어떤 변호사도 결론을 자신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가계약 분쟁의 당사자가 되셨다면 많이 공부하시고 전문가의 의견도 충분히 들어보신 후에 어떤 대응을 할지 결정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 법률상담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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