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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 Dec 13. 2023

수신인을 기다리는 예언들

안그람 단편만화,「예언의 수신인」(문학동네, 2023)


"연애편지가 되지 못한 연애편지가 있을까?"

안그람 작가는 ‘연애편지’라는 단어 앞에서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곤 답한다. '고등학교 때 동성 친구에게 보내, 답장을 받지 못한 연애편지’라고. 「예언의 수신인」은 이 질문과 답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박현우는 웨딩플래너다. 여느 때와 같이 고객 미팅을 준비하던 현우는 예비 신랑의 이름이 자신과 같고, 예비 신부의 이름은 자신의 고등학교 절친과 같다는 사실에 신기해한다. 그런데 미팅에서 만난 사람은 진짜 고등학교 동창 민주혜. 이런 우연이 놀라운 진짜 이유는 주혜는 현우의 첫사랑이자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인 짝사랑 상대이기 때문이다. 현우는 고등학교 시절 내내 주혜와 단짝이었고, 우정 이상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용기 내 고백 편지를 건냈지만 답장을 받지 못했다. 그 시점으로부터 20년이 지나고서야 고객이자 한 남자의 예비 신부로 만난 것이다. 주혜도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한 눈치다. 현우는 그리움을 반가움으로 가장한다.


대면 미팅은 몇 번에 그칠 줄 알았던 현우는 동창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세세하게 주혜의 결혼식 준비를 돕게 된다. 일하는 내내 현우는 동요하는 감정을 억누르며 '프로페셔널'을 외치지만 주혜의 한마디 한마디에 심장이 반응한다. 주혜의 취향을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예비 신랑의 말에 슬쩍 열도 받는다. '식장을 장미로 뒤덮고 싶다고? 주혜는 장미는 싫어하고 하얀 목련을 좋아해.' '머리카락을 한데 틀어올렸으면 좋겠다고? 너는 주혜가 반묶음 머리 할 때 얼마나 예쁜지도 모르냐?' 나의 첫사랑을 빼앗아간 사람이 이렇게나 못 미덥다니.


이렇게 속으로 주혜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자신임을 주장하던 현우는 웨딩드레스를 피팅하는 자리에서 예비 신랑보다도 먼저 주혜 앞에 선다. 주혜의 특별 요청이다. "너한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어서 불렀어.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 네게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어리둥절해하며 피팅룸에 들어와 웨딩드레스 입은 주혜의 모습을 보는 현우에게 주혜가 한 말이다. 아니, 이건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예비신랑보다도 더 먼저 보는 친구가 어디 있나? 다 소용없다. 주혜를 더 잘 아는 건 나, 현우일지 몰라도 주혜와 평생을 함께할 사람은 저, 현우다.  


점점 감정적으로 지쳐갈 때 쯤, 현우는 사진 촬영 준비를 기다리며 예비 신랑과 어색하고도 형식적인 대화를 주고받는다. 현우는 예비 신랑에게 어떻게 주혜를 만났는지 물어본다. 주혜가 마음을 쉽게 여는 스타일이 아닌데 어떻게 사로잡았나며. 동창의 남편 될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질문인데, 그뿐인데, 뜻밖의 대답을 듣는다. 선을 보지 않으려던 주혜가 상대의 이름을 듣고 선 자리에 나왔고, 원래는 그것으로 끝날 인연이었지만 주혜에게 끈질기게 구애한 끝에 결혼하게 됐다는 말. 그리고, 다급히 신부에 대한 칭찬으로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현우에게 예비신랑은 대뜸, 또한 의도적으로 묻는다. "그쪽은 아직도 레즈비언 해요?" "아직도 하냐구요. '그거'"


주혜가 소중히 간직해온 편지를 어쩌다 읽게 됐는데 그 '현우'가 여자일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다며 굳이 청하지도 않은 싸움을 거는 그. 당황한 현우는 어물거리며 신경쓰이면 담당자를 바꿔주겠다는 말로 상황을 넘기려고 하지만 남자는 집요하게 현우의 현실을 일깨운다. "이곳에서 태어나 정상적인 교육 받고 살아가는 이상 내가 주혜와 할 수 있는 일들, 당신은 하나도 못 하니" "거슬릴 게 없다"고 시비를 걸고, 이에 더해 “당신이 쓴 편지에 답장이 갈 일은 없"다며 "주혜가 선택한 수신인은 나"라는 말로 관계의 쐐기를 박는다. 다시 한번, 청첩장에 새겨질 이름은 박현우와 민주혜가 아니라 최현우와 민주혜다. 현우는 이제서야 진짜 무너진다. 다 그만두고 도망가고 싶다고.



사실 여기까지는 흔하게 접해온 서사다. 10대의 첫사랑, 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여성 간의 사랑, 그리고 한쪽이 선택을 강요받아 '정상 가족'으로 편입한다면, 다른 한쪽에는 그러한 대답 아닌 대답에 상처받거나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주인공이 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따라가던 나는 자연스럽게 2021년 개봉한 홍콩 영화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소녀」를 떠올렸다. 고등학교 때 사랑에 빠졌던 두 ‘소녀’ 윙과 실비아. 그들은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며 미래를 약속하지만 사회적 제약에 부딪혀 결국 헤어진다. 우연히 인생의 변화를 맞아 혼란스러워 하던 20대에 만난 그들은 30세에도 혼자면 같이 살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지는데, 결국 그들이 다시 재회한 장소는 실비아의 결혼식장이다.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둘의 관계가 우정으로 자리매김되는 그 순간, 과거의 관계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나는 생각했다. ‘이게 무슨 한 겨울에 찬물 끼얹는 결말인가?’라고.


영화평론가 조혜영은 영화 <윤희에게>를 비평하며 과거의 한국 영화에서 다수의 “여성 동성애 로맨스는 이성애 로맨스에 앞선, 10대의 원초적이고 순수했던 과거의 기억으로 고착화”되어 결국 “이성애 로맨스에 포획되고 봉합되며 과거의 것으로 영원히 남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소녀」도 유사한 틀로써 비평이 가능하다. 이 영화가 10대 시절, 여성 간 사랑과 우정 사이의 아슬아슬한 감정선을 잘 그려냈다고는 해도, 위에서 지적하듯 노스탤지어로서의 첫사랑 서사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윙은 실비아의 결혼식에 초대받은 과거의 순수한 사랑의 상징,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노스탤지어로서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예언의 수신인」은 비슷한 서사를 따라가면서도 그 현실을 돌파한다. 위 영화를 만든 오영산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경험을 어린 날의 성장통 같은 것으로 회상하며 아름답고 순수하고 보편적인 사랑을 보여주려고 했다면, 안그람 작가에게 10대 퀴어의 사랑은 ‘괴물’, 답장도 받지 못한 연애편지는 ‘괴생명체’로 이름 붙일 수 있다. 나는 이 시대 혹은 보다 과거에 존재했던 퀴어의 사랑을 뽀얗고 아름답고 순수한 것으로 봉인하기보다는 그 설명되지 않고 이해받지 못한 감정을 ’괴물‘로 그리는 것이 더 마음이 든다. 괴물에게 순응이란 없다.


웨딩플래너로서의 모든 일이 끝나고, 민주혜와 최현우의 청첩장을 받아든 현우. 친한 친구 결혼식의 하객으로 초대받은 현우는 약간은 기운이 빠진 채로 식장에 있다. 결혼식장 로비에 놓인, 행복해보이는 커플 사진. 가기 전에 잠깐 신부 대기실을 찾은 현우는 이미 식장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와 함께 주혜가 파우더룸에 현우에게 줄 선물을 남겼다는 얘기를 헬퍼에게 전해듣는다. 그 선물은 20년 만에 도착했지만 전혀 늦지 않은, 벽에 쓰인 편지 혹은 예언이다.


“마지막으로 줬던 편지에 답장하고 싶었어. 이 순간에도 여전히, 영원히.”



이 작품에서 두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중요한 노래가 있다.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The Sound of Silence(침묵의 소리)’다. 작품에서는 저작권 문제 때문인지 가수의 이름은 ‘톰 앤드 제리’로, 노래 제목은 ‘Echoes of stillness(고요의 메아리)’로 바꾸고, 가사도 전면적으로 수정했지만, 원곡과 비교해보면 몇 가지 주요한 단어, ‘예언(자)/prophecy, prophet’ ‘(세상의) 바보들/fools’ ‘(지하의) 벽/walls’ 등을 살려두었다. 그렇게, 주혜와 현우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던 장소에서 자주 듣던 이 노래는, 추억에 갇히지 않고 미래로 이어진다.

기록된 말은 공간을 점유하지만 전해지지 않은 말은 무가치하게 사라져버린다. 게다가 그것이 역사가 될 수 없는 ‘침묵의 소리’이자 ‘고요의 메아리’라면 우리는 그 이야기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안그람 작가의 이 만화는 그 짧은 분량 안에 퀴어 영화에서의 클리셰를 이상할 만큼 착착 전개하면서, 결국 마지막에 ‘괴물’ ‘괴생명체’를 풀어놓는다. 이 괴물은 결혼식 도중 도주하는 신부와 그의 손을 잡은 여자이며, 그 괴생명체는 신부대기실 파우더룸 벽에 쓰인 낙서다. 이렇듯 과거의 ‘예언’은 사라져버려도 모를 무언가였지만, 그 예언을 소망하는 사람, 실현하고자 애쓰는 사람에 의해 현실이 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퀴어인 우리가 쉼없이 벽장 속에서 써내려간 일기, 편지, 이야기들, 그것은 예언이 되어 떠돌고, 그것을 실현할 수신자를 영원히 기다린다.

첫사랑의 아련함은 모든 사랑 이야기의 중요하게 등장하는 감정이다. 그러나 나는 내 마지막에 떠올릴 단 하나의 존재. 그 존재가 고등학교 때 끝난 나의 첫사랑이 아니기를, 아무리 괴로움과 역경을 동반한다 해도 지금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사랑의 존재가 역사에 남기를,  지하의 벽에서 차곡차곡 쌓여 온 예언들이 결국 이루어지는 날이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름다운 두 신부의 결혼식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이 만화의 끝은, 너무 뻔해서, 그래서 아름답다.


(작성일: 20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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