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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 May 25. 2024

제약과 시도의 여러 모습, 북디자인

<기획회의> 608호 기획자 노트 릴레이 128

『펼친 면의 대화』가 나오기까지


『펼친 면의 대화』는 최근 주목받는 한국 북디자이너 열 명(팀)의 깊이 있는 인터뷰집으로 기획되었다. 디자인 저술가 전가경 선생님이 인터뷰와 집필을 맡았고 ‘사월의눈’ 정재완 디자이너가 책을 디자인했다. 북디자인 1세대로 꼽히곤 하는 정병규, 안상수, 그 이후 2세대와 3세대를 거쳐 2005년 무렵 시작된 스튜디오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북디자인 분야에서 종종 언급되곤 하는 북디자이너의 ‘세대’ 구분을 염두에 두었다.

2020년 11월 회사 내 기획안 공유, 2021년 2월 인터뷰어 섭외, 4월 김다희 디자이너와 첫 인터뷰, 2022년 2월 전용완 디자이너를 마지막으로 열 팀의 인터뷰가 모두 종료되었다. 3월에 본문 디자인 시안을 잡고, 그 후 저자가 원고를 다듬고 필요한 원고를 집필하고 각 디자이너에게 인터뷰 내용을 확인받고 각 디자이너에게 이미지와 제작 사양을 받는 데 6개월여가 소요되었다. 재교까지 진행한 시점인 11월에 아트북스 곽성하편집자가 편집을 이어받았고, 편집상에서 여러 가지가 보완되고 ‘펼친 면의 대화’라는 제목을 달아 2024년 4월 알라딘 북펀딩과 함께 출간되었다. 누구도 중간에 멈춘 적이 없이 부지런히 작업을 했는데도 기획부터 출간까지 2년 6개월이 걸린 셈이다.


2008년, 2015년을 잇는 북디자이너 인터뷰집


편집 일을 시작하기 전, 북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그 세계를 기웃거린 적이 있다. 해외 디자이너의 작업을 동경하며 디자이너가 적극적으로 책을 해석하고 물성으로 구현하는, 이미지 너머를 보는 디자인이 가능할까, 하고 머릿속으로만 궁금해하던 사람이었다. 이런 개인적인 배경, 즉 ‘사심’이 『펼친 면의 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지금, 한국의 북디자이너 41인』(프로파간다, 2008), 『B컷』(달, 2015)에 대한 좋았던 기억이 이번 기획에 힘을 실어주었다.

당시와 지금의 이상적인 북디자인에 대한 관념은 같지 않다. 제작비, 보관과 유통을 고려하게 된 것과 더불어 회사의 업무 프로세스가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첫 출판사에서는 대체로 외부 디자이너와 작업했기에 콘셉트에 맞는 디자이너를 섭외하는 일 또한 편집자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내부 디자이너와 일하는 경우가 많아 인하우스 디자이너와 일하는 기쁨과 어려움을 다시금 배웠다. 이렇게 ‘디자인’이 업무 환경과 결부되어 있다는 경험은 이 책에 인하우스 디자이너와 프리랜서 디자이너를 적정한 비율로 선정하는 이유가 되었다.

북디자이너와 편집자가 긴밀하게 논의하여 한 권의 책을 만들고, 글과 디자인의 관계를 궁리하는 건 참 매력적인 영역이지만, 작업 프로세스상 아이디어를 주고받을 때나 작업을 진행할 때 갈등이 생기기 쉽다. 힘의 역학도 작용한다. 현실은 이렇다 하더라도, 내가 구상한 인터뷰집은 성공적인 협업을 위한 ‘지피지기의 기술’은 아니었다(이미 『편집자를 위한 북디자인』이라는 좋은 책이 나와 있다). 나는 그저 디자이너의 생각을 담고 싶었다. 편집자에게 하지 못하는 이야기나 다소 엉뚱한 개인적인 관심을 포함해, 디자이너들이 지면과 입체를 만드는 데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를 엿보고 싶었다.

그 시작은 김동신 디자이너였다. 전가경 선생님이 김동신 디자이너에게 “편집자들이 가장 함께 일하고 싶어하는 디자이너라는 풍문”이 따라다닌다는 소개를 썼는데, 거기에 나도 해당한다(영광스럽게도,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를 함께 작업했다). 그의 작가주의적인 방식에 더해 대중출판에서도 모범이라 할 수 있을 기본을 잃지 않은 클래식한 디자인을 보면서, 잊고 있었던 북디자인의 가능성에 새롭게 눈떴다.

이 책에 실린 열 팀의 디자이너를 선정하는 데 작용했던 보이지 않는 기준이 이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다분히 자의적인 기준이라고 하더라도 아트북 신scene이 아닌 대중출판에서 북디자인의 한 단면을 조금은 바꿔놓은 디자이너. 김동신 디자이너의 『잔혹함에 대하여』(돌베개, 2015), 전용완 디자이너의 『백래시』(arte, 2017), 신덕호 디자이너의 『김군을 찾아서』(후마니타스, 2020) 같은 책과, 조슬기, 우유니게, 박연미 등 기본과 파격의 아름다움을 두루 갖췄다고 생각되는 디자이너를 우선 떠올렸다.

대상 독자는 책을 좋아하고, 디자인 때문에 책을 사기도 하며, 그렇다고 내용을 무시하는 것은 아닌 교양도서 독자였다. 북디자이너를 꿈꾸는 사람은 2차 타깃으로 두었다. 이 정도의 두루뭉술한 기획을 2021년부터 품고 있다가 아트북스로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본격적으로 기획으로 발전시켰다. 『커버』(2015), 『편집자를 위한 북디자인』(2015) 등 북디자인과 디자인 책을 여러 권 출간한 아트북스가 아니었다면 이 기획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터뷰이와 인터뷰어


원고의 방향이 최종 결정될 때까지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풀 방법을 오래 고민했다. 김동신, 전용완, 이재영, 오혜진 등 디자인에 관한 글을 쓰는 필자가 여럿 있으니 각자 원고를 쓰는 방식도 떠올렸지만 글의 톤을 고르게 하는 것이 난관이 될 듯했다. 인터뷰로 결정한 후에는 인터뷰어 원고의 성격, 인터뷰 방식을 고민했다. 조금은 가벼워지거나 유쾌한 책, 무게감이 있는 책, 둘 다 장단점이 있었다.

“디자인과 책, 디자이너 개인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가 실린 충실한 인터뷰집이자 아카이브”라는 콘셉트 아래 ‘한 명의 인터뷰어가 열 팀을 인터뷰하고, 북디자인에서 이들의 고유함을 짚어내는 글을 중간중간 싣는다’는 원고의 형식이 정해지니, 각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균형감 있게 이끌어 내줄 인터뷰어가 무척 중요해졌다. 책을 여러 권 낸 디자이너를 생각하기도 했고, 편집자이자 디자이너로서 양쪽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분을 고려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아트북스 임윤정 편집장이 프로파간다 김광철 편집장을 통해 전가경 선생님을 추천받았다. 왜 전가경 선생님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세계의 북 디자이너 10』 『세계의 아트디렉터 10』(이상 안그라픽스) 등 인터뷰집을 여럿 펴내시기도 했고, 디자인연구자라는 고유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데다가 사월의눈 기획자이자 편집자로 일하며 디자인에도 깊이 관여하는 분이라는 점에서 이 인터뷰집의 인터뷰어이자 저자로 적임자였다.

꼭 받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보낸 메일에 선생님은 반갑게 회신을 주셨다.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개인(팀)뿐만 아니라 인하우스 디자이너도 고려하고 있다는 방향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셨다. 어쩌면 이 도서의 특징은 그런 너른 품이 아닐까. 뾰족하게 어느 영역을 깊이 있게 보여주지는 못하더라도, 지금 북디자인의 지형을 읽을 수 있는 가이드가 되는 책 말이다. 선생님과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어렵게 열 팀(열한 명)의 디자이너를 정했다. 저자가 서문에서 말했듯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의 출현, 독립 및 아트북 출판 신의 형성, 더치 디자인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디자인 언어의 유입과 유학파 디자이너의 등장”(5쪽)이라는 2000년대 중반의 변화에서 영향받은 디자이너를 떠올리다 보니 1980년 이후 출생,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디자이너가 우선 고려되었다. 열 팀을 정하고 난 후에도 “이런 분야의 디자이너도 넣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분을 추가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며 미련을 버리지 못해 여러 디자이너를 언급했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현재의 열 팀으로 확정했다.

인터뷰는 전가경 선생님과 저자가 대면으로 진행했다. 전가경 선생님이 대구에 거주하고 계셔서 줌으로 편하게 진행해도 된다고 말씀을 드렸으나, 가능하면 실물로 책을 보며 눈을 맞추고 종이를 만지며 이야기 나누고 싶어 하셨다. 사실 모든 인터뷰에 동행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여건상 그러지 못했다. 전가경 선생님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드린 것이 지금까지도 죄송하다. 나는 녹취록 정리를 맡았다. 음원에 섞인 현장의 소리를 듣는 것도 인공지능으로 변환된 텍스트의 오류를 바로잡으며 원고가 되기 전의 대화를 세세하게 듣는 것도 즐거웠다. 한 회 한 회 인터뷰가 쌓이면서 전가경 선생님만큼 이 책의 의도를 잘 전달할 분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신했다.


역시, 편집도 기획이다


인터뷰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진행되었다. 전가경 선생님께서 연구, 강의, 사월의눈 작업 등 여러 일에 몸담고 계시기도 했고, 실물 책을 택배로 받아 그 책들을 토대로 인터뷰 질문을 작성하고, 편집부에서 그 질문을 확인하고, 인터뷰이도 확인한 후 일정을 조율해 대면으로 인터뷰하는 까다로운 과정을 거쳤기에 이 이상의 일정은 무리였다.

문제는 나의 조급함이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1년 동안 쪽프레스의 『디자인된 문제들』이 나왔고, 월간 <디자인>에서 ‘그리드 위 실험가들’이라는 기획으로 북디자이너 인터뷰를 다루기도 했다. 또 유지원 선생님의 북디자이너 인터뷰가 곧 책으로 엮여 나올 거라는 소문을 들으며 늦기 전에 이 책이 먼저 나와야 한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런 나와는 다르게 선생님은 매력적인 인터뷰집의 꼴, 그리고 인터뷰이 열 팀 선정의 타당성에 관한 고민이 더 크다고 하시며 침착하고 면밀하게 준비를 해주셨다.

원고가 마련된 후에는 디자이너분들에게 연락을 해 필요한 사진을 받았다. 사진을 새로 촬영하지 않고 이미 가지고 있는 사진을 받아 배치하는 방법을 택했다. 비용과 시간을 절감하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지만 선생님들이 제공한 이미지 각각에 개성이 묻어나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김다희 디자이너는 연출된 사진으로, 김동신 디자이너는 펼친 면의 그래픽 이미지를, 전용완 디자이너는 스캔 이미지를 주는 등, 차이가 다양한 도판을 보는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제작 사양을 넣는 건 본문 디자인 시안 과정에서 결정되었다. 정재완 디자이너의 의견이었다. 처음에는 종이, 서체, 판형, 제본 방식, 후가공 정도의 정보를 실었다. 1차적으로는 디자이너를 위한 정보이지만, 편집자들도 마음에 드는 책의 사양을 알아내기 위해 출판사에 연락하곤 하니까 두루 유용할 듯했다. 자료를 받고 정리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았는데, 그 비어 있는 틈을 아트북스의 현 편집자가 채웠다.

이후 편집 과정에서 바뀐 부분이 많다. 디자이너의 사진이 추가되었고 A4 사이즈와 책의 판형을 비교한 작은 이미지를 넣어두어 책의 크기를 한눈에 가늠할 수 있게 했다. 이 과정을 멀리서 지켜보며 기획은 책을 마감하고 알릴 때까지도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또 한 번 배웠다. 시작은 내가 한 것이 맞지만, 그때의 상황과 이것을 이어받아 완성도를 높인 편집부가 있었기에 종이 한 장에 쓰인 메모에 불과했던 기획이 적어도 5년은 살아남아 서점에 꽂힐 책이 될 수 있었다.


창작자로서의 북디자이너


북디자이너의 ‘일하는 마음’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 책에는 창작자로서의 이야기를 더 많이 담고 싶었다. 그래서 인터뷰 원고에서도 김다희 디자이너의 일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보는 태도, 조슬기 디자이너의 계속해서 자신을 갱신하고 배우려는 모습, 박연미 디자이너의 적극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발굴하고 책으로 구현하려는 노력, 신덕호 디자이너의 기획자로서의 고민, 전용완 디자이너의 고집과 장인정신, 이재영 디자이너와 굿퀘스천의 질문하고 대화하는 모습, 김동신 디자이너가 관습을 깨는 방식, 박소영 디자이너의 책의 물성에 대한 작가주의적인 관심, 오혜진 디자이너의 방법론에 대한 고민에 특히 눈길이 갔다. 결국, 이 책에 담고 싶었던 건 ‘읽힌다’라는 궁극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하면서도 얼마만큼의 창조성을 담을 수 있는지, 그 제약과 시도의 여러 가지 모습이었다.

편집자로서 이러한 창작 과정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좋은 원고와 방향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간’이 아닐까. 한계에 다다라 불꽃이 튀듯 ‘팍’ 하고 발휘되는 창조성도 있겠지만, 이런 순발력과 우연성은 북디자인에서는 그다지 잘 통하지 않는 말인 것 같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여기서 다루지 못한 북디자인에 대한 대화는 다른 지면을 통해 펼쳐질 것이다. 『펼친 면의 대화』가 책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책을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북디자인이 치열하고 창조적인, 작지만 큰 세계라는 놀라움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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