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사람들과의 이별

나에겐 엄마였던 걱정인형, 나를 롤모델이라 부르던 아이

by 로건리


중학교 2학년 어느 날이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수업시간이었는데, 가슴 한가운데서부터 뜨거운 것이 밀려왔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선생님께 몸이 너무 안 좋다고 말씀드리고,

집으로 달려갔다.

그 짧은 20분이 20년처럼 길었다.


“띵동… 띵동 띵똥…”


벨을 눌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열쇠도 안 챙겼다.

급할 때마다 필요한 걸 잊어버리는 습관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90년대 중반, 삐삐도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공중전화를 찾아 뛰어나갈까 하던 찰나,

집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고 다시 벨을 눌렀다.


“철컥.”


문이 열리고, 할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또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의 공기, 냄새, 온기까지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은 다섯 살 무렵이다.

그때부터 나는 할머니와 고모와 함께 살았다.

고모는 나보다 스무 살 위였지만 친구처럼 가까웠다.

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 롯데월드의 놀이기구..

나의 어린 시절에는 늘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러다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 여동생이 태어났다.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 때 고모가 결혼했다.

그날은 어린 나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날이었다.

고모는 단순한 가족 그 이상의 존재였기에 아홉 살 인생인 내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 후로 할머니는 나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할머니는 나의 엄마이자, 세상과 나를 연결해 주는 끈이었다.

가끔 이유 없이 슬퍼지던 날,


“혹시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어쩌지…”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그날의 눈물은 아마도 그 불안이 솟구친 순간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나는 타지생활이 많았다.

역마살이 끼어있다더니

전라도의 대학, 강원도의 군대, 서울의 일, 그리고 부산의 집.


그러나 멀리 떨어져 살아도 마음의 끈은 늘 이어져 있었다.

문득 이유 없이 가슴이 먹먹할 때면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건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감정의 신호였다.


군대에 가기 전, 할머니는 고혈압으로 많이 아프셨다.

나는 의학 지식도 없으면서 TV 건강 프로그램을 메모해 식단을 짜고 직접 반찬을 만들어 드렸다.

다행히 건강이 호전되어 조금은 안심된 마음으로 입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훈련소에서 혹시 부고 소식을 듣게 될까 늘 불안했다.



[나를 키운 사람들, 그리고 먼저 떠난 사람들]


고모가 결혼을 하면서 새로운 가정이 생겼고 두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고모의 두 아들은 성향이 많이 달랐다.

나는 둘 다 너무 예뻐했는데 작은 아들은 어릴 적부터 나를 롤모델이라 부르던 아이였다.


그 아이는 나를 친형처럼 따랐다.

내가 억울하게 신용불량자가 되어 힘들어하던 시절에도


“형은 어려움이 닥쳐도 별 거 아닌 것처럼 방법을 잘 찾는 것 같아요.

형은 망했다고 해도 바로 다시 일어서잖아요.

저는 어른이 되면 형처럼 살고 싶어요.

형은 제 롤모델이에요”


롤모델...

살면서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내가 누군가의 롤모델이 돼도 괜찮은 건가?"


나는 이번생은 시작부터 틀려먹었다며 오늘을 막기 위해 오늘을 사는 느낌이었다.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 마음가짐이 많이 달라졌다.


"언젠가 이런 상황을 딛고 이겨낸 성공스토리를 강연하는 사람이 되고 말겠어."


어쩌면 부정적인 생각이 우세했던 20대 시절의 나에게 긍정적인 힘을 실어준 일등공신이 그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배달 일을 하며 돈을 벌던 시절, 수입이 괜찮다는 말을 들은 그 아이는 성인이 되어 오토바이 배달 일을 시작했다. 나는 헬멧 잘 쓰고 조심히 타라는 말밖에 해줄 말이 없었다.


내 결혼식날, 내가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동영상 녹화 신청을 못했다고 했더니 휴대폰으로 구석구석을 다니며 결혼식장을 영상에 담아줬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조카를 보겠다며 의정부에서 부산까지 먼 길을 달려오기도 했었다.

우리 집에 놀러 와 있을 때 내가 아내와 다툼이 있어 기분이 상했던 날은 말없이 밥을 사주며 힘내라고 말하고 터미널로 향했던 속 깊은 동생이었다.


그 아이가 스물일곱 살 되던 해였다.

하루는 서울에서 일정을 마치고 부산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는데 밤 11시가 넘어서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하며 받았는데 서른을 준비하며 많은 고민들이 있었다.

한 시간가량 통화를 하며 아득바득 살아야 한다는 말만 무한반복 했다.

며칠 뒤에 할머니 생신이 있으니 그날 보기로 약속하고 통화를 마쳤다.


할머니 생신 잔치를 하기로 한 날 아침 8시.

아버지가 다급하게 나를 깨웠다.

무슨 일인지 짐작도 못하면서 불안함이 엄습했다.


그 아이가 어젯밤에 오토바이 사고로 떠났다고 했다.


그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한동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잘못된 길을 보여준 건 아닐까?

내가 배달일을 안 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이렇게 허무하게 떠날 줄 알았다면 아득바득 살라는 말 따위는 하지 말걸”


그 아이를 보내고 거의 반 년동안 제대로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죄책감은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한참이 지난 어느 날 꿈에 그 아이가 찾아왔다.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꿈인걸 인지한 순간이었다.


“형, 저 이제 가볼게요.”


꿈인 걸 알면서도, 이미 떠난 걸 알면서도 나는 덤덤하게


“그래, 잘 가.”


멋없는 짧은 인사만 남겼다.

눈을 떴을 때, 베개가 다 젖어 있었다.

그 후로 한 번도 꿈에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가 말했던 그대로, 그의 영원한 롤모델로 남고 싶다.

그래서 이번 생을 더 단단하게 살아내려 한다.



[마지막 겨울]


100일 된 나를 엄마처럼 키워주신 분,

50대 후반부터 99세까지 늘 내 곁에 있어주신 분.

할머니와의 모든 순간은 나에게 선물이었다.


가난한 환경, 엄마의 부재, 허약한 체질로 매일 아팠던 날들..

나의 학창 시절은 타임머신이 생겨도 돌아가기 싫은 시간대다.

화도 많고 불만도 많았던 그 시절 나의 빈 가슴 틈을 파고든 불량 친구들이 있었다.


유혹이란 건 참 단순하고 달콤해서 넘어가기 아주 쉽다.

몇 줄 문장으로 적기엔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었지만 이번 편에 어울리는 내용은 아니라 생략한다.


중요한 건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할머니였다.

성공하는 모습은 보여드리지 못하더라도 실패하는 모습은 절대 보이기 싫었던 마음.

나를 계속 지탱해 준 힘의 근원이었다.


그런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1년 전쯤부터 갑자기 안 하던 말씀들을 하기 시작했다.

꿈에 어머니가 자꾸 보이고 돌아가신 오빠들이 나와서 자꾸 어딜 데리고 가신다고 했다.

또 어릴 때 내가 동생에게 못되게 굴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는 내 편을 들어놓고선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며 화를 내시기도 했다.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었던 나의 친엄마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시고, 부산에서 먼데 뭐 하러 올라오냐며 전화 자주 해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줘서 고맙다며 우리가 있어 행복했다고도 하셨다.


행복했다고..



예전 같으면 난 분명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말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날부터 나도 입버릇처럼 하루를 사시더라도 고기 한번, 대게 한번 더 사드리겠다고 했다.

전화도 거의 매일 했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 통화일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2023년 연말, 할머니가 갑자기 응급실로 가셨다.

잠시 통화를 하는데 숨이 잘 안 쉬어진다고 하셨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코로나와 폐렴 진단으로 격리되었다.

병원에서 오래 일하며 어르신들이 폐렴으로 입원하면 돌아오지 못하는 걸 수도 없이 봐서 그런가..

그 말이 내 머릿속에서는 ‘작별’로 번역됐다.

그날 오후, 중환자실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40년의 시간이 영화처럼 지나갔다.


며칠 후 크리스마스 저녁이었다.

집 앞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는데 이유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마치 중학교 2학년 어느 수업시간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무거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식당 화장실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다음날 의정부로 올라갔다.

아직도 면회가 어렵다고 했다.


할머니가 살고 계신 아파트는 내가 군대를 전역하고 2년 동안 준비해서 입주한 집이다.

그때 할머니는 죽기 전에 아파트 한번 살아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다.

그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어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시작했지만 결국 이뤄드렸다.


또 하나의 소원이 있으셨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월급봉투를 한 번도 가져다준 적이 없다며 한이 맺히셨다고 했다. 그래서 스무 살 때는 월급 받은 걸 다 출금해서 봉투에 넣어 가져다 드린 적이 있었다. 물론 야금야금 용돈처럼 받아간 금액이 많지만 월급봉투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었다.


이런저런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가 면회가 가능하다고 연락을 받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 선생님이 무겁게 당부하셨다.


"어르신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지셨어요. 연세도 있으시고 아마 내일을 넘기기 힘드실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사드린다고 생각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감염 때문에 아버지와 고모가 먼저 면회를 마치고 나오셨다. 고모의 오열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할머니가 계신 침대로 향했다. 할머니는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온몸이 땡땡하게 부어있었고, 의식이 흐려 불러도 대답만 간신히 할 뿐이었다.


어떻게든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의 지구에서의 마지막 손자의 기억이 씩씩한 모습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인드컨트롤을 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만 잡고 있었다. 손이 너무 차가웠다. 면회시간이 끝났다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겨우 몇 마디 인사만 남겼다.


"고마웠어요. 잘 가요 할머니. 사랑합니다."


내 말을 들었는지 주무시는 건지 이미 떠나신 건지..

할머니는 대답이 없으셨다. 집으로 돌아와서 잠도 오지 않고 자꾸 눈물만 흘렀다.

아버지와 안주도 없이 소주를 한잔씩 마시다가 할머니가 한참 전에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평일에는 다들 일하다가 와야 하니까 바쁠 거고,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 아침이 좋겠어.”


"뭐가 금요일이나 토요일이 좋은데요?"


"나 죽는 날이 그때가 좋겠어."


나는 버럭 화를 내며 그런 말씀 좀 하지 말라고 펄쩍 뛰었던 이야기를 덤덤하게 했더니 아버지도 감정이 무너져 버렸다.


그날 밤 우리는 잠을 잔 건지 시간이 그냥 스킵해 버린 건지 모르게 아침이 되어있었다.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간 가족들 앞에서 의사 선생님은 사망선고를 내렸다.

어젯밤에 본모습과 다른 평온한 할머니의 얼굴은 드디어 걱정을 내려놓으신 것 같았다.


할머니는 평생 걱정이 많으셔서 "걱정인형"이라는 별명도 지어드렸다.

아버지 걱정, 고모 걱정, 내 걱정, 동생 걱정.

부모가 되어보니 어떤 감정인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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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준비를 위해 유품을 챙겨 오라고 했다.

집에 들어서자 텅 빈 거실 침대가 보였다.


"다녀올게요", "저 왔어요"


거동이 어려워진 95세부터 살림을 내려놓은 이후 5년의 시간 동안 할머니는 저 자리에서 인사를 나눴다.

너무 이상했다. 있어야 할 사람이 없어진 공간..


현관 앞에 서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안방에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


할머니의 옷들은 각각의 추억이 붙어 있었다.

명절에 조카분 집에 가면서 입으시던 두루마기,

시장에 갈 때 즐겨 입던 검정색 가디건,

내 초등학교 입학식 날 입었던 코트.

내가 다섯 살 때 찍힌 사진 속 흰색 원피스.

도대체 옷을 몇 십 년이나 입으셨던 건지..


유품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건 함께한 세월의 잔향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유품을 정리하는 게 왜 힘들다고들 한 건지.

추억을 접는 일은 숨도 잘 쉬어지지 않을 만큼 아팠다.








나는 늘 ‘사람은 죽으면 끝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 잘하자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래도 막상 떠나보내고 나니 더 좋은 자리를 마련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모든 장례절차가 끝나고 나니 모든 게 조용해졌다.


이제 아버지 혼자 지내야 할 공간이 너무 쓸쓸하게 느껴졌다.

아내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가기 위해 아버지와 인사를 나누는데 거실 침대가 다시 보였다.


"아이고.. 이제 다녀오겠습니다 라는 인사는 못하겠네.."


또 눈물샘이 터질 것만 같아 얼른 뛰쳐나와버렸다.

부산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나와 아내는 쉬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 후로도 한참을 더 쏟아내고 난 후에 생각이 정리되었다.



함께한 추억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마다 슬퍼하는 일은 고마운 마음만 간직한 가족들의 몫이고, 바쁜 업무와 육아에 그 감정 또한 썰물처럼 밀려나가는 일의 연속일 것이다.



안장없는 자전거를 타고 달리듯, 완벽하지 않은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를 키워주고 지켜주고 지탱해주는 누군가가 있기에

자전거를 끌고 가든, 서서 페달을 밟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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