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혼자 이별, 그리고 가장 큰 사고
이번 편은 나의 연애와 결혼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이번 생은"이라는 말을 몇 년 전부터 심심치 않게 듣곤 한다.
사실 내가 아주 오래전에 많이 쓰던 말이기도 하다.
이번 생은 망했다고.
그런데 신기한 건,
망했다고 말하고 살 때는 정말 풀리지 않던 일들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끝까지 해봐야지 라는 마음으로 변한 순간부터
미스터리 하게 풀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야구를 많이 좋아했었다.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야구 경기 생중계를 시청했다.
한국시리즈 9회 초.
LG가 4:1로 한화에게 지고 있는 상황에서의 마지막 공격.
루키 김서현이 잘 막아줄 거라고 믿었고.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스코어는 4:7이 되어있었다.
언제부턴가 한화는 하위권에 머물러 있었고 그래서인지 동질감이 느껴졌나 보다.
9회 초를 잘 막아서 승리하길 바라는 마음이 컸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실망감이 꽤나 컸다.
야구는 인생을 닮았다는 말이 있다.
큰 일 없이 한두 점 정도 내면서 지루하게 진행되는 투수전,
어떤 투수가 올라와도 두드려 맞는 난타전,
엎치락뒤치락 텍사스 스코어라 불리는 8:7 막상막하 경기,
연장전의 끝에서도 승부를 가르지 못하는 무승부 경기....
결과뿐 아니라 경기 중에 발생하는 에피소드는 좀 많은가?
나의 삶은 특별할 것 없는 작은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것 같다.
[취미는 짝사랑]
고등학교를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3월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그때 새벽 2시부터 국민일보 신문배달 일을 했다.
일을 마치면 잠을 자기도 애매하고 학교로 바로 가기도 애매한 새벽 5시였다.
당시에는 오토바이를 탈 줄 몰라서 자전거로 100부 정도의 신문을 돌렸다.
시간이 애매하지만 국민일보를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월급이 타사보다 몇 만 원 더 많은 18만 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땐 학생이었고 어렸을 때라 잠을 못 자는 게 뭐 대수인가?
그런 위험한 생각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배달 도중 한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갑자기 한 여자애가 떠올랐다.
아무런 접점도 없었던 우리 반 아이였는데 이름은 생각나지 않고 얼굴만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날 등교를 해서 그 아이를 보니 인기가 참 많은 아이였다.
긴 생머리, 단정한 교복, 세련된 외모..
웃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
나와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문제는 날이 갈수록 그 아이가 자꾸 생각났다.
신물배달을 할 때도 자꾸 떠올랐고, 수업시간에는 힐끔 쳐다보게 되었다.
큰일이었다.
나는 연애할 근본이 되지 않는 처지였다.
학창 시절 이런 일은 아마 흔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분명 몇 번의 경험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혼자 생각만 하고 티 내지 않았으면 언젠가 식어버렸을 마음일 텐데 미련하게 한 친구에게 말을 꺼내버렸다.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아."
그 친구는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승냥이처럼 내 말을 물어버렸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소식이 전해지며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심지어 그 아이와 친한 여자애들까지 알게 되었다.
그걸로 모자랐는지 고백을 하라며 나를 용기 없는 겁쟁이로 만들었다.
신문배달 때문에 잠도 몇 시간 못 자는 생활을 하던 도중 밤을 새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군가에게 직접 좋아한다는 말을 해 본 적 없던 나는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외모는 많이 부족하고 돈은 더 부족했지만 글씨는 예쁘게 잘 썼었다.
나의 특기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매체는 편지였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적어 내려 간 편지는 분량이 3장에 달했다.
대화 한번 섞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의문이다.
어쨌든 다음날 학교에서 친구들은 파릴 고백하라며, 그 애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며 설레발을 쳐댔다.
쉬는 시간 학교 현관문 앞 화단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 아이를 발견했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편지만 건네기 좀 그래서 매점에 들러 초콜릿 하나를 샀다.
망설이면 전달조차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판사판의 마음으로 뚜벅뚜벅 그 아이가 있는 곳을 향했다.
나를 먼저 발견한 그 아이의 친구가 내가 온다고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순간 무리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부담감이 절정에 달하던 순간.
나는 아무 대사 없이 편지와 초콜릿을 그 아이에게 전하고 세상 쿨하게 돌아서서 교실로 들어갔다.
그 장면을 목격한 푼수 떼기 친구가 반 아이들에게 특종을 발설했다.
너무 쪽팔려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날 그 아이는 아무 말도 없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버스도 타지 않고 한 시간 거리를 걸었다.
"나는 갑자기 그 애를 왜 좋아하게 된 걸까?
내가 좋아한다고 지금 뭐 사귀기라도 할 거야?"
마음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원망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하교 후 저녁 늦게 삐삐가 울렸다.
음성 메시지를 확인하는데 또 주책맞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편지랑 초콜릿 고마워.
나 좋아해 주는 것도 고맙고.
내일 학교에서 봐."
몇 시간 전만 해도 후회로 가득 찼던 나는 한순간 기쁨의 조각들이 가득 들어찼다.
다음날 새벽 신문배달을 하면서도 싱글벙글, 학교 가는 길이 그렇게 즐거웠다.
학교에서 마주친 그 아이는 어제 음성메시지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얼음공주처럼 표정도 없고 말도 없었다.
"그럼 어제 그 음성메시지는 뭐 하러 남긴 거야?"
나는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체육시간이었다.
운동장에 모인 40여 명의 우리 반 아이들은 포크댄스라는 걸 해야 했다.
수행평가에 들어간다고 하니 열외를 할 수도 없었다.
남녀가 2인 1조가 되어 포크댄스를 해야 하는데 파트너를 자유롭게 정하라고 했다.
그 순간 반 아이들 모두가 나와 그 아이를 집중했다.
에라 모르겠다. 그 아이의 옆에 서자 반 아이들이 환호했다.
그 아이도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적어도 중간고사 때까지는 체육시간마다 그 아이와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렜다.
[특기는 혼자 이별하기]
나는 연애능력은 제로라고 생각했다.
체육시간을 제외하면 그 아이와 제대로 대화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땐 그게 왜 그리도 쑥스럽고 불편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방송반 활동도 했다.
나의 내성적인 성격이 외향적으로 변화한 가장 큰 요인이 방송반 활동이었다.
동기 중 그 아이와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여자애가 있었다.
하루는 뜬금없이 다가와서 그 아이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나는 좋아한다고 말하면 될 것을 굳이 아니라고 잡아뗐다.
방송반 동기 여자애는 평소 나에게 쌀쌀맞게 대하던 아이라서 그런지 편하지가 않았다.
그런데도 한 번씩 나에게 그 아이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하라고 협박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하루는 그 동기가 저녁에 삐삐를 쳤다.
시내에 그 아이와 놀러 나왔는데 같이 놀자며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기회가 다시 올까 싶어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질주했다.
약속장소에 도착한 나는 자전거를 계속 끌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아할지도 모르겠고, 돈도 없어서 어디 카페라도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 동기는 자전거 좀 세워두라며 잔소리를 했다.
나는 자물쇠를 두고 나왔다며 계속 끌고 다녔다.
특별히 무슨 대화를 나누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셋이서 시내를 걷던 도중 그 동기가 말했다.
"할거 없음 집에 가자."
내일 학교에서 보자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찝찝하고 바보 같은 기분이 너무 싫었다.
다음날 신문배달을 하는 내내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뭐 하러 나갔을까? 자전거는 왜 끌고 갔을까? 무슨 말이라도 할걸 왜 바보같이 가만히 있다 들어왔을까?"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그 아이는 표정도 그대로였고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그렇게 진전 없이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이었다.
옆반에 그 아이의 친구가 있었는데 복도에서 갑자기 말을 걸었다.
"너 그 아이 좋아하는 애 맞지? 내가 친구로서 말하는 거니까 기분 나쁘게 듣지 마 알았지?"
잘 알지도 못하는 애가 갑자기 나한테 할 말이 뭘까 궁금했다.
"네가 좋아하는 거 부담스러워하고 있어. 그 애가 착해서 말을 못 하는 건데 네가 알아서 마음 접어.
무슨 말인지 알지?"
나는 또 바보같이 알았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도대체 뭐가 미안한 건지...
그날 이후 체육시간 포크댄스 파트너는 친한 남자아이들이었다.
자신에게 다가가지 않는 나를 한참 멍하니 보고 있던 그 아이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날부터 나는 사귄 적도 없는 그 아이와의 관계를 혼자 이별했다.
그렇게 고2, 고3 각각 다른 반이 되어 복도에서나 가끔 마주치는 정도로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수능이 끝나고 방송반 동기들과 진실게임을 했다.
그때 그 동기가 나를 지목하더니 물었다.
"너 그때 걔 좋아했잖아. 근데 갑자기 왜 쌩깐 거야?"
"좋아한 적 없어."
"진실게임이야. 장난하지 말고 진지하게 대답해."
"걔가 누군데? 누군지도 모르는 애를 어떻게 좋아해?"
그때라도 말했어야 했다.
연인으로의 발전을 기대해서가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저버린 행동이었다.
"네 친구가 그렇게 말을 해서 부담주기 싫었던 거야"
그 한마디가 그렇게나 어려웠던 모양이다.
졸업 이후 방송반 모임에 그 동기가 나오면 그땐 꼭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26년이 지난 지금까지 만날 수가 없었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바보 같은 짝사랑과 혼자 이별을 반복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생에 결혼은커녕 연애도 없다고 단정 짓고 살고 있었다.
[내 생에 가장 큰 사고]
20대 시절 연애는 했지만 결혼을 전제로 나를 만날 사람은 없었다.
집안 형편, 나의 스펙, 직업, 비전 모든 평가요소에서 낙제였기 때문이다.
연애를 하면서 좋은 감정이 깊어지면 나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숨기는 걸 싫어해서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했고 결과는 이별 통보였다.
이런 일이 하도 반복되다 보니 나중에는 몇 번 만나면 바로 커밍아웃을 했다.
덕분에 평균 연애기간은 엄청 짧았고 만나는 사람의 숫자만 늘어갔다.
정말 영양가 없는 연애였다.
연애라고 말하기도 사실 부끄럽다.
30대가 되고도 비슷한 연애가 이어지다 보니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생에 결혼은 없다. 하지만 다행히 연애는 해봤다."
부산에 내려와서 병원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병원에 경력직 간호사로 입사하는 분이 병원을 돌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식당에서 점심식사 중이었는데 나에게도 인사를 하고 갔다.
당시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동생과 같이 살고 있었는데 그 간호사 이야기를 한 번씩 꺼냈더니 좋아하냐고 물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니라고 잡아뗐을 텐데 30대의 나는 때가 조금은 묻어이었는지 좋아한다고 말했다.
사업도 사랑도 타이밍이 있나 보다.
하루는 그 간호사가 내 사무실에 물품을 가지러 왔는데 뜬금없이 사우나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좋아한다고 했더니 티켓을 한 장 주고 갔다.
내가 살던 숙소 바로 옆 건물이라 며칠 뒤에 티켓을 사용했다.
병원에서 마주친 그 간호사는 사우나 갔냐며 공짜로 준거 아니니 영화티켓으로 갚으라고 했다.
알겠다고 말하고는 바로 상영 중인 영화들을 서치 했다.
스무 살 때 알게 되었던 영화 비포썬라이즈의 3번째 시리즈가 상영 중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자고 했는데 그 간호사는 엄청 놀란 눈치였다.
우리는 공교롭게도 당시 각자 사귀던 사람이 있었지만 사이가 좋지 않아 헤어지는 중이었다.
그런데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가 이런 영화를 싫어해서 한 번도 못 봤다고 했다.
영화 취향이 비슷해 시작된 만남은 끝없는 대화로 이어졌다.
대화가 너무 잘 통해서 만남이 편했다.
휴일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그 간호사는 면허를 딴지 얼마 안 됐었고 승용차를 타고 다녔다.
같이 드라이브를 가기로 해서 내 숙소까지 차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주차 도중 타이어에 펑크가 나버렸다.
나는 침착하게 견인차를 부르고 카센터로 갔다.
사장님은 오늘 영업은 끝났고, 내일은 휴일이라 바로는 못 고치고 다음 주에 찾으러 오라고 하셨다.
"사장님, 저희가 울진으로 드라이브를 가기로 했거든요. 차가 꼭 필요한데 혹시 렌터카 같은 건 따로 없나요?"
"이런 구멍가게에 그런 게 있겠습니까?"
너무 허무했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짱구를 굴리고 있는데 오래된 무쏘 한대가 보였다.
"사장님 저 차는 주인 있는 차예요?"
"저 차는 내찬데.. 저거라도 타고 갈랍니까?"
격한 감사인사를 전하고 나는 그녀를 태워서 바로 울진으로 향했다.
우리는 가는 내내 그 상황이 너무 재미있어서 깔깔거렸다.
또 발라드 음악과 인디밴드의 음악 이야기를 몇 시간 동안 나눴다.
영화에 이어 음악도 취향이 비슷하다니 너무 반가웠다.
잔잔한 에피소드가 쌓이며 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 해 6월 26일은 예비군 훈련 때문에 서울에 올라가야 했다.
부산역까지 함께 나온 그녀는 편지 한 장을 나에게 쥐어주었다.
잔잔한 분위기의 고백 편지였다.
기차는 출발을 했고 나는 복도에서 전화를 걸었다.
"내가 먼저 고백해야 하는데 반칙!"
"누가 먼저 하는 게 뭐가 중요해요?"
서울역까지 2시간 넘게 통화를 했다.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온 뒤 우리는 진짜 연인이 되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만나고 있을 무렵 그녀가 말했다.
"우리 아빠가 나 만나는 사람 있다고 하니까 보고 싶으시대."
걱정과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정이 더 많이 들고 난 후에 헤어지면 더 힘들 테니 주말에 가자고 했다.
주말이 되고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부모님은 외출 중이셨고 조용한 집에서 긴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곧 부모님이 도착하셨고 처음으로 인사를 드렸다.
아버님은 나를 보고 훤칠하다며 웃으셨다.
어머님도 첫인상은 싫지 않으셨던 것 같다.
식사를 하고 어머님과 그녀는 주방에 있었다.
아버님이 조심스럽게 말씀을 꺼내셨다.
"우리 딸보다 한 살 적다고? 여자 나이 서른둘이면 노처녀야. 너도 적은 나이 아니고."
한참 정적이 흘렀다.
"너희들끼리는 어디까지 이야기가 되었는지 모르겠다만 결혼을 생각하면 빨리해라."
결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단어였다.
"그래 돈은 좀 모아놨고?"
"그게.. 모아둔 돈은 없고 아직도 학자금 대출 갚고 있습니다."
"근데 살아보니까 돈은 결혼해서 알뜰하게 살면 모인다."
내 생각과 너무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니 당황스러웠다.
나를 반대하시는 게 아니라 결혼을 서두르시는 느낌이랄까?
"아빠가 내년에 정년이다. 그전에 둘 다 보내고 싶은데 한 명이라도 해야지."
정년..
해군 부사관 시절 원사 계급의 선배들이 집착했던 단어였다.
평소 뿌려놓은 게 많은데 정년 되기 전에 자식들 결혼시켜야 한다던 말이 떠올랐다.
"정년 퇴임 전에 해야죠."
부엌에서 언제 나오셨는지 어머님이 대화에 참여하셨다.
"그럼 올해 안에 날을 잡을 생각인가?"
6개월도 남지 않은 올해 안에 결혼을?
"아뇨, 올해는 좀 무리일 것 같고"
"그럼 내년에 할 건가?"
나는 그녀의 눈치를 보는데 웃고 있었다.
"네. 내년쯤...."
어머님은 추진력이 매우 강한 분이다.
"내년이면 1월이나 2월도 괜찮나?"
점점 당황지수가 높아졌다.
"1, 2월은 너무 빠른 거 같은데요."
어머님은 좋은 날을 받아보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결혼식은 어디서 할 건지?
상견례는 언제쯤 할 건지?
놀라운 사실은 우리 집에서 그녀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던 시기였다.
나는 평균 연애기간이 짧다 보니 집에 이야기하는 게 조심스러웠다.
꼭 양치기 소년이 되는 것 같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도 그녀도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듣고 나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데 이 사람과 결혼을 할 건지 말건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냥 하는 거였다.
다만 준비해 둔 게 없다 보니 그게 마음이 쓰일 뿐이었다.
그녀는 남자의 준비는 평생 안된다며 어차피 맞벌이할 건데 결혼해서 모으자고 했다.
나는 할머니와 통화를 하며 이 사실을 알렸고 할머니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으신 것 같은 반응이었다.
"네가 지금 빚도 다 못 갚고 있는데 결혼을 어떻게 하니? 여자 쪽 집에 우스꽝스러워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나의 연애사를 가장 잘 아는 고모도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너는 연애도 오래 못하면서 결혼해서 바람피우면 끝장나는 거야."
가족들의 반응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밀어붙이라며 응원하셨다.
그리고 내 동생은 오빠가 평생 결혼 못하고 살 줄 알았는데 언니가 구제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만난 지 한 달 만에 우리는 결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해 3월.
내 생에 가장 큰 사고를 쳤다.
이번 생에 내가 결혼을 한 것이다.
다음 편은 우리 부부의 끝을 확인했던 육아 편으로 이어갑니다.
참고로 저희는 아직 결혼생활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