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는 아무나 하나

자유로운 영혼인데 아빠를 해도 될까요?

by 로건리

"자기는 애들 좋아해?"


"아니, 난 애들 시끄럽고 정신없어서 싫어."


"그럼 애 안 낳고 둘이 살아도 괜찮아?"


"어. 괜찮아."





신혼 시절 아내와 나누던 대화 내용이다.

정말 나는 아이를 싫어했을까?


고모의 아들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내가 육아를 한 것은 아니지만 자주 보고 싶은 마음에

의정부에서 양주까지 자전거를 타고 주말마다 고모네 집에 놀러 갔다.

심지어 운전연수중이던 차에 치어 어깨에 살점이 파였는데도 병원이 아닌 고모네 집으로 향할 정도였다.


돌잔치 사회자를 했던 것도 아이들이 싫었다면 굳이 할 필요 없었다.

누군지 모르는 아이지만 예쁘고, 축하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우리 부부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에는 왜 저런 반응이었을까?


나는 사실..

자신이 없었다.

부모가 된다는 일이..

내가 누군가의 아빠가 된다는 것이..

자신이 없음을 넘어서 너무 두려웠다.


크게 3가지 이유가 있었다.

1. 경제적 부족함.

2. 나도 아직 아기 같다는 메타인지.

3.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기 때문에.







결혼 후에도 우리 집은 소극적, 처갓집은 적극적이셨다.


아이에 대한 이야기 역시 온도 차이가 많이 났다.

우리 집은,

그저 너희 둘이 잘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요즘 세상 애들 키우는 게 보통 일이냐.


반면 처갓집은,

다른 집 손자, 손녀 보니 너무 좋더라며

맞벌이해야 하면 키워주시겠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심지어 친척분 중 한 분은 나에게 불효하는 거라며

손주 손녀를 안겨드려야 진짜 효도라고 혼내듯 말씀하셨다.


결혼 후 1년 동안 우리보다 남들이 입을 많이 댔다.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굳이 피임을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임신 소식은 없었다.

요즘 워낙 불임이 많은 시대가 되었지만

결혼 후 1년이 지나면서 우리에게 아이는 진짜 없는 건가?

은근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결혼 2년 차에 첫째가 생겼다.





결혼 2년 차 어느 봄날.

간호사로 일하던 아내의 퇴근길 전화가 왔다.


"임테기 두 줄 나왔어."


".... 어. 바로 집으로 올 거지?"


"이 뜨뜻미지근한 반응은 뭐지?"


집에 들어오며 아내는 서운한 감정을 털어놓았다.


"애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어도 은근히 바라는 것 같더니 막상 생기니까 기분이 별로야?"


그 순간 내 눈은 분명 물음표 모양이었을 것이다.


"임신 안 됐다는 거 아니야?"


"두 줄이라니까."


나는 임테기 두 줄 나왔다는 말이 이번에도 안 됐다는 말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갑자기 기쁜 마음이 밀려들었고,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찾아왔다.

그날부터 아내에게 운전금지령을 내렸다.

새벽 4시 반에 출근하는 아내를 병원까지 태워다 주고

오후 2시경에 퇴근을 하면 시간 맞춰 태우러 갔다.


태명을 짓고, 태교에 대한 무지함을 깨기 위해 각종 정보들을 찾아봤다.

아이에게 좋다는 일들을 상당히 많이 찾아서 했다.

독서, 음악감상, 강의 듣기, 산책, 좋은 음식들..


처음 초음파 사진을 보았을 때 작은 구슬모양을 가리키며

우리 아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장난 같기만 했다.

병원을 갈 때마다 점점 커지고 모양도 달라지는 초음파 사진 속 우리 아이의 모습은 신기하기만 했다.


첫 아이 임신 기간 동안 아내는 가장 행복한 임산부라고 말했다.

그 말이 너무 뿌듯하기도 하고 나도 행복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검사받으러 병원에 가는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출산을 한 달 앞둔 어느 날이었다.

나도 병원에서 일을 하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양수가 터졌다는 내용이었다.


집에 들러 간단한 짐을 챙기고 아내와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 선생님의 진찰 후 내일 오전에는 아기를 볼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들었고,

그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마냥 설레고 좋기만 했는데 두려운 마음이 찾아온 것이다.


우리 부부는 밤새 스쾃를 하고, 오리걸음도 하고, 자연분만을 위해 조산사님이 시키는 커리큘럼을 성실하게 따랐다. 아침 8시 우리 아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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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안아보는데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쑥스러워서인지 밖으로 목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말했다.


"반갑다. 네가 내 아들이구나. 앞으로 잘살아보자"


산후조리원에 있는 동안에도 나는 출근을 했다.

내가 일하던 병원과 횡단보도 하나를 사이에 둔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나를 대체할 인력도 없기에 내가 쉬면 복귀했을 때 밀린 일을 처리하는 게 더 힘드니까.


병원 직원들은 축하를 전하고, 너무 좋겠다며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감사하고, 벅찬 마음은 기본값이었다.

다만, 나에 대한 부족함 때문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또 어떤 생각은 머물렀다.








엄마 없이 할머니와 고모가 키웠던 유년시절.

일 때문에 가끔 집에 들르면 혼내는 일이 많았던 아빠.

그러면서도 지독하게 가난했던 집안 환경.


솔직히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을 하는데 왜 돈이 없는 건지.

부자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등록금, 교복, 학용품 살 돈도 없는 수준.

교무실에 찾아가 학비 감면 신청을 하고,

1000원짜리 교복 물려 입기를 해야 하고,

준비물 못 가져가서 교탁 앞으로 나가 맞아야 했던 상황들이 모두 이해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성인이 된 후 아버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오래전 내 일기장을 보셨다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난 절대 아빠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부모도 국가 면허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경제적인 능력이 없으면 결혼을 금지시켜야 한다."


......


물론 돈이 없어도 나름 잘 키워내는 부모님들이 계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저 나의 한이 맺힌 혼잣말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난 절대 아빠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이 문구에 대한 생각은 내 안에 오래 머물렀다.


"난 정말 아빠보다는 잘할 수 있을까?"


내 불안함과 두려움은 이 생각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신생아실 면회를 가면 너무나도 예쁜 우리 아들이 눈도 뜨지 못한 채 우리 앞에 잠시 머물다 자리로 돌아갔다.

사진을 찍지 않으면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면회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우리 아들이 집에 온 날부터 우리 부부의 일상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수시로 기저귀를 확인하고 갈아야 하고,

2시간마다 분유를 타서 먹이고 소화시켜서 다시 재워야 했다.

잠이 많은 내가 아내보다 먼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일어나는 게 신기했었다고 한다.


아내는 출산휴가였지만 나는 출근을 해야 하는데도 크게 힘들거나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내는 육아가 맞지 않는 것 같다며 힘들어했는데 나는 재미있었다.

그래서 집에서 쉬고 있던 아내는 나의 퇴근 시간만 목 빠지게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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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해서 일하는 몇 시간을 제외한 하루의 모든 순간을 아들과 함께했다.

다들 알고 계시는 사실이지만 아이들의 성장 속도는 상당히 빠르다.


하루는 "얘가 얼굴이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싶을 정도로 며칠 사이에도 성장을 했다.

갑자기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1988년.

나는 유치원도 들어가기 1년 전이라 할머니랑 집에서 놀던 시기였다.

대낮에 아빠가 집에 오셨다.

자전거를 태워주겠다는 말에 잔뜩 신이 나서 따라나섰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이름.

[가고 파슈퍼 마켓] 앞에서 자전거가 멈췄다.

신호등 사탕과 새콤달콤, 젤리 몇 개.

천 원의 행복이 아니라 200원의 행복이었다.

나는 아빠에게 물었다.


"이거 왜 사주는 거야?"


"사주면 그냥 먹어."



1994년.

아빠는 공사현장 관리감독을 하셨다.

옛날 코란도를 타고 다니셨는데 그 차를 타는 게 좋았다.

하루는 차를 타고 싶냐고 물어서 좋다고 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뜨거운 태양 아래 지루하기 짝이 없던 공간.

잠실 야구장이었다.


우리 아빠는 당시 빙그레 팬이셨고 나는 야구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아마도 빙그레와 LG 아니면 OB와의 경기였을 것이다.

나는 빨리 집에 가고 싶다고 몸을 베베 꼬아댔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그게 3회초쯤 이었다고 한다.

야구 좋아하는 사람은 다 공감할 것 같은데

3회 초에 집에 가자고 하는 일행이 있다면 얼마나 짜증이 날까?


아빠도 야구를 끝까지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이스크림이라는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내가 다 먹어갈 때쯤 하나 더 사줄까? 라며

야구장에 머무는 시간 충전을 준비하셨다.



1995년.

하교 후 집에 갔더니 아빠가 계셨다.

뜬금없이 캐치볼 하러 가겠냐고 물어서 좋다고 했다.

학교 운동장에서 우리는 공을 한참 동안 주고받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쭈쭈바 하나를 얻어먹으면서 걸어갔다.


아무 특별할 것 없는 이 3가지 기억.

별거 아닌 이 기억들이 40대가 된 지금도 생생한 영상처럼 남아있다.

그래서 우리 아들도 어른이 되고 나면 나와 함께한 시간 중 별거 아닐 수도 있는 순간들을 떠올리며 나를 추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장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유튜브를 시작하자"


2017년부터 아들을 육아하는 동안 많은 기록을 영상으로 남겼다.

어떤 날은 유튜브 촬영을 위해 어딘가를 가야만 할 것 같아서 집을 나선적도 있다.

이유와 상관없이 아들은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해 보였다.

물론 지금 물어보면 기억 못 하는 장면들이 상당히 많지만^^;










아내는 능력 있는 간호사였다.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가 수간호사를 맡게 되면서 책임간호사 역할을 제안했다.

아내는 출산 후 5개월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라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다.

나는 육아 걱정하지 말라며 하고 싶으면 일을 하라고 했다.

그렇게 아내가 일을 시작했지만 나의 육아 총량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그동안의 시간은 지금을 위한 준비처럼 느껴졌다.


다만 마음이 아팠던 건,

나도 일을 해야 하는 입장이니

태어난 지 5개월 된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야 했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이고, 씻기고, 가방을 챙겨서 어린이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는 출근을 했다.

정신없는 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가고

다시 어린이집에 가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저녁을 차리는 건 아내의 몫.

정리는 나의 몫.

아이 목욕은 아내가 담당하고 내가 청소를 했다.

우리는 그렇게 철저한 분업화 시스템을 만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주말 아침이었다.

뽀시락 거리는 소리에 거실에 나갔더니 아들이 사진과 같은 모습으로 현관 앞에 있었다.

당시에는 이 모습이 너무 웃겨서 사진도 찍고, 나들이를 데리고 나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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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나에게 엄청난 변화가 진행 중이다.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아들과 캐치볼을 하고, 혼자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머리를 말려주고, 아이방에서 혼자 자는 모습을 보며 저 당시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는 먹고살아야 하니 돈을 벌기 위해 우리 기준에 맞춰, 우리 계획에 맞춰 아이들을 어린이집으로, 할머니집으로, 키즈카페로 보내곤 했었다.

그게 이제 와서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다.


다행히도 이 아이는 자립심 강하고,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적응을 상당히 빨리 한다.

사교성도 좋고 친구들을 리드하기도 한다.


뭘 해도 협조적이고, 생떼를 부리지도 않고, 이유 없이 잘 울지도 않던 우리 아들은

어느새 11살이 되었다.


아들 육아를 2년쯤 했을 때 나는 가장 경솔했던 것 같다.

육아는 그리 힘들지 않고, 재미있으며 나와 결이 잘 맞다는 아주 건방진 생각을 하고 만 것이다.


키즈카페에 아들을 데리고 놀러 갔던 날,

누나와 함께 온 아들 또래의 아이가 있었다.

아들이 뭘 하려고만 하면 그 누나가 달려와서 뺏어갔다.

그게 처음 두 번까지는 귀여웠다.

그런데 반복되다 보니 화가 났다.


"너 여기 전세 냈니? 네 동생이 재밌는 건 얘한테도 재미있는 거야. 같이 노는 공간인데 그런 행동하는 거 아니야."


낑꼬(?)도 없이 그 아이는 계속 자기 동생만 챙기는 아름다운 이기적 행동을 이어나갔다.

그날 나는 잔뜩 화가 나서 집에 돌아갔고 아내에게 말했다.


"아들내미한테 동생 만들어주자"


"뜬금없이 갑자기?"


몇 달 후에 정말 둘째가 생겼고 우리는 상상도 못 한 세계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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