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겪은 산후우울증

진정한 부부로 거듭나다

by 로건리

퇴근길 아내의 재촉 전화가 연신 울린다.

재촉이 거듭될수록 도로에 차가 늘어간다.

부산에 있는 병원에서 양산에 있는 집까지 길이 막히면 1시간 반.

낙동강을 따라 달리는 강변도로에 서있던 내 차.

그 옆 자전거 도로를 달리는 자전거와 러닝 중인 사람들.

그들이 나를 연신 추월한다.


지친 몸으로 겨우 도착한 집은 아내의 큰 소리와 아들의 우는 소리, 그리고 아직 백일도 채 되지 않은 딸의 울음소리로 가득하다.


나를 반겨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왜 이제 들어오냐는 아내의 상기된 목소리.

마치 엄마에게서 구원해 달라는 듯한 아들의 울음소리.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마음마저 지쳐버린다.


나는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있었다.








집에 있어봐야 아내와 다투기만 하고 아들도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아들과 집 앞 키즈카페에 자주 갔다.

아들은 그 키즈카페의 트램펄린을 좋아했다.

나는 그 트램펄린이 미웠다.

싫은 감정을 넘어서 미웠다.







1년 전,

아들과 또래인 남자아이.

그리고 나를 화나게 했던 그 아이의 누나.

마치 그 키즈카페를 전세 낸 것처럼

마치 내 아들이 만지기를 기다린 것처럼

실시간으로 빼앗가 가던 그 아이.


그날 집으로 돌아간 나는 아내에게 둘째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 현실은 지옥처럼 느껴졌었다.

첫째가 태어났을 때의 설레던 마음과 두려운 마음, 기쁜 마음은 느낄 수가 없었다.


첫째 임신기간 동안 일을 쉬면서 빚이 생겼고,

둘째 계획이 없던 우리는 오피스텔 분양도 받았다.

그저 한 달에 30만 원 정도 추가 소득을 발생시키자는 소박한 바람이었다.

그 빚을 다 갚기 전에 둘째가 생긴 것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경제적 이유로 둘째 임신기간 내내 아내는 일을 계속했다.


태명을 불러 본 기억도 없고,

태교는 일과 육아였으며,

아내의 신체 반응도 첫째 때와는 많이 달랐다.

몸도 많이 붓고, 컨디션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았다.


그 결과 출산예정일보다 두 달 가까이 빨리 태어난 따님.

세상에 나오자마자 인큐베이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38일이 지나서야 집으로 갈 수 있었다.


미숙아였기 때문인지,

인큐베이터에 오래 있었던 탓인지,

첫째와 다르게 둘째는 예민하고 계속 울었다.


첫째 역시 아직 아기인데 내가 도맡아서 케어를 했다.

아내가 둘째는 울기만 하고 잠도 안 자서 너무 힘들다고 했다.

육아에 자신 있다고 말했던 내가 나섰다.

"유모차 태워서 한 바퀴 돌면 금방 잠들어. 내가 나갔다 올게."


"쉽지 않을 텐데. 괜찮겠어?"


"오빠 육아의 신이야 ㅋㅋㅋ"


(띵동~)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밖에 나와서 그런지 울음이 그쳤다.


"역시 내가 데리고 나오니까 안 울잖아."


호기롭게 유모차를 끌고 아파트 단지를 산책했다.

평화롭던 분위기는 어떤 할머니 두 분을 만나며 깨졌다.


센 할머니 : "아이고 아가 추불텐데 여 뭐 한다고 데리고 나왔노?"


순할머니 : "아가 우니까는 데리고 나왔겠지."


센 할머니 : (우리 딸을 빤히 보더니) "아가 남잔교?"


순할머니 : "잘생깄네. 잘생깄다. ㅎㅎ"


그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우리 딸이 울기 시작했다.

화통을 삶아 먹은 성량으로 만 세대는 족히 넘을 그 공간에 울림을 만들어냈다.


센 할머니 : "아가 추운갑네. 얼른 따뜻한 집에 데리고 가소."


나는 첫째 때의 스킬로 따님을 달래기 시작했다.

나는 경력 자니까 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센 할머니 : "아 아빠가 아를 잘 몬보네."


순할머니 : "ㅎㅎ남자들이 아를 볼 줄 아는가 다 엄마들이 보는데"


3년째 육아에 진심인 나에게 저런 이야기를 날리는 두 분께 화가 났지만 딸의 울음소리가 너무 커서 안아도 보고 유모차에 다시 태워보기도 하면서 아직은 쌀쌀한 봄밤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근거는 없지만 아들과는 다른 험난한 육아의 예고편 같았다.








아내는 날이 갈수록 예민해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평소 모습이 변한 건 아니었다.

같은 상황을 대하는 태도와 대화의 반응이 달라졌다.

문제는 나도 예민하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버렸다는 것.


그때의 우리는 그냥 다른 사람이었다.


하루는 아침에 출근을 하는데 아내의 전화가 왔다.

아침에는 전화를 잘 안 하는데 불길했다.


"우리 집 베란다에서 떨어지면 바로 죽겠지?"


그때 살던 집은 19층이었다.

죽지 않는다면 더 힘들어질 높이였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뭐 하자는 거야?"


"나 진짜 너무 힘들다. 애들도 싫고 그냥 다 싫다."


출근을 하려면 사거리에서 나는 좌회전을 해야 했다.

하지만 잠깐의 판단이 평생을 좌우할 것만 같았다.

유턴을 돌았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바로 다시 전화할게."


나는 운전 중에 휴대폰을 잘 안 본다.

그런데 그날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화면에 번호를 눌렀다.


1.1.9


침착하려 했지만 진정이 되지 않았다.


"119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목이 막혀서 말이 잘 안 나왔다.

말보다 눈물이 앞섰다.

몇 초가 지났을까..


"와이프가요. 베란다에서 뛰어내린다고. 그냥 다 싫다네요."


"계신 곳 주소 불러주세요. 몇 층이신가요?"


우리 집이 몇 층인지 순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십.. 사 층인가? 아.. 아니다 그건 이전 집이고요."


"선생님, 주소 천천히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신고 접수가 다 됐을 때쯤 나는 아파트 단지에 진입했다.

혹시 사람들이 모여있는지 떨리는 마음으로 살펴보았다.

우리 동이 보이는 위치에 진입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얼른 주차를 하고 화단 쪽을 조심스럽게 둘러봤다.

아무 일도 없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혹시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집에 도착하니 아내는 안방 침대에서 휴대폰을 들고 누워있었다.


"뭐 두고 갔나?"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야?"


순간 안도의 마음과 분노의 마음이 맞짱을 뜨고 있었다.


(띵동~)


아내는 "우리 집에 올 사람이 있나?" 영혼 없이 말했다.


"119에서 왔을 거야."


"어?? 신고했나? 미친 거 아이가?"


출동한 119 대원분께 죄송하단 말만 반복했다.

그런데 여자 대원분이 둘째를 보시더니 한마디 하셨다.


"아내분이 산후우울증 가능성이 있으니 옆에서 잘 지켜봐 주세요. 그거 무서운 거예요."


119 대원으로 하는 말이 아닌 먼저 엄마를 경험해 본 누나로써 해주는 말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경찰에서도 방문했다.

신고가 들어간 이상 나는 출근할 수 없고 24시간 아내를 관찰해야 한다고 했다.


덕분에 예고 없던 휴가를 보내고

잘 풀리지도 않는 대화를 시도했다.

그날밤 내 감정에도 고장 신호가 감지되었다.

그리고 몸에도 좋지 않은 반응이 시작되었다.


살이 급격하게 찌더니 혈압도 떨어지지 않았다.

자려고 누우면 숨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아내와 일상대화를 하다 자주 다투곤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가슴을 바늘로 찌르듯 아팠다.


나의 통증 호소에도 아내는 별 반응이 없었다.

요샛말로 쌉T 인 것도 있지만 진짜 산후우울증이었던 것 같다.

나도 살아야 하니 치료를 받으러 혼자 여기저기 다녔다.

그때 나는 병원 종사자의 사각지대를 제대로 느꼈다.


식도염일수도 있다는 말에 내과를 가보고,

내시경 검사까지 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심장문제일 확률이 높다는 말에 대학병원에 가서 MRI까지 찍었는데 역시 문제가 없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신경과에서 검사도 받아봤지만 문제가 없다고 했다.

슬슬 짜증이 났다.


"나는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다는데 왜 다들 정상이라는 거야?"


원인도 찾지 못하고 치료도 못한 채로 지내던 어느 날

의료와 전혀 관계없는 형이 내 증상을 듣더니 말했다.


"니 그거 공황 같다."


"공황이요?"


"그래, 그 연예인들 많이 걸리는거 있다 아이가?"


"내가 연예인도 아닌데 공황은 무슨.."


"니 모르나? 요샌 일반인들 억수로 많이 걸린다던데"


"근데 신경과 갔었는데 그런 말 없던데요"


"거기 말고 정신과로 가야지"


사람의 눈이 정말 신기한 건 관심있는 것만 보게 되나보다.

예전 해군부사관 시절 매일 다니던 도로에 있는 무용학원을 2년 동안 못 보고 지나치던 것처럼

퇴근길 우리 아파트 앞 사거리에 있는지도 몰랐던 정신건강의학과 간판이 강렬하게 보였다.

주차를 하고 별생각 없이 병원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입구에 적힌 정신건강의학과 문구가 내 발걸음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내가 일하는 병원에서 환자분이나 보호자분이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실 때마다


"아버님 요즘 정신건강의학과는 그냥 감기약 받는다 생각하고 편하게 가시면 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의사선생님하고 상담하고 오시면 돼요."


이렇게 남의 일처럼 편하게 말하곤 했다.

그런 내가 정신건강의학과 입구 앞에서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괜히 1층에 내려가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스무 살 때 신용불량자가 되었을 때도,

해군부사관 시절에도,

병원 폐업 위기 직전에도,

나는 쓰러지지 않았다.

남들이 우습게 봐도 생각보다 나의 내면이 강하다고 자부했다.


그런 내가 정신건강의학과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냥 내 삶이 망가지고 무너진 것만 같았다.


정말 큰 용기를 내어 입구 문을 열었다.

접수를 하며 문진표를 작성하는데 항목이 꽤 많았다.

그리고 진료실에서 만난 의사 선생님


"안녕하세요.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드신가요 지금?"


나는 그동안 나의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감정이 격해지기도 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길고 긴 나의 이야기와 의사 선생님의 짧은 리액션.


"아이고, 너무 힘드셨겠는데요?

선생님은 그렇게 많은 걸 희생하시고 노력하시는데

부인분은 그걸 몰라주시고 참..


공감해 주는 이 말에 아직 못다 한 이야기를 조금 더 늘어놓았다.

의사 선생님은 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다 듣고 계셨다.


"제가 선생님 말씀만 들은 거라 사실 부인분이 같이 오시는 게 제일 좋아요.

근데 같이 모시고 오는 게 힘드시면 선생님이 먼저 치료를 시작하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치료를 시작해야 해요."


"저 그럼 정신병이에요?"


"이걸 정신병이라고 해야 할까요?

쉽게 말씀드리자면 불안장애가 있으시고, 우울지수가 높으세요."


"제가 우울증이에요?"


"음~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 안 하셔도 됩니다.

저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선생님 지금 시기가 가장 힘든 시기인 것 같아요.

부인분도 두 번째 출산하셨으니까 호르몬 변화도 많이 있으셨을 거고,

두 분이 힘든 순간을 동시에 겪고 계시는 건데요

그런 불안한 마음을 조금 진정시켜 주는 약을 처방해 드릴 테니까요

마음이 너무 힘들고 숨이 안 쉬어질 것 같을 때 드셔보시고

그래도 너무 힘드시면 다시 한번 내원해 주세요."


병원문을 나서는데 가슴 한쪽에 쌓인 쓰레기더미가 사라진 것 같았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로 리얼하게 털어내 본 것이.


약의 효능은 신비의 묘약 같았다.

분노의 감정 게이지가 99까지 올라갔었다면

55 정도까지만 올라가는 것 같았다.

기분 나쁜 상황이 괜찮다거나 화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약했다.

그래서 다투는 빈도가 줄었다.

다투는 빈도가 줄어들고 나는 호흡이 조금 편해졌다.

그렇다고 100% 효과는 아니었다.


우리는 또 크게 싸우는 일이 발생했고,

오랜만에 분노 게이지가 빨간색에 도달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내의 단골멘트가 된 말이 있다.


"나 산후우울증 같아. 그냥 건들지 마. 좀 내버려 두라고."


나는 건들지도 않았고 내버려 두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억울하지만 산후우울증이란 말에는 감정을 더 이상 담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날 우울증이라는 단어만큼은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산후우울증? 난 혼후우울증이야!!"


자유로운 영혼인 나는 결혼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결혼생활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에 어쩌면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아이를 출산한 건 아내였지만 육아의 비중을 내가 많이 가지고 가다보니 우리는 전우애로 똘똘뭉쳐 끈끈한 동지였지만 그러다보니 나도 산후우울증 같은 증상이 나타났던 것 같다.


안장 없는 자전거를 타는 건 20대가 끝나면 졸업할 거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안장이 생기면 작은 부품들이 돌아가면서 빠지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 같았다.


결국 이 싸움은 역대급으로 번져서 법원을 향하자는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어디론가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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