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하여
2005년 8월.
고모네 가족과 인천에 있는 작은 섬에서 단 하루의 휴가중이었다..
태양의 에너지는 강렬했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날이다.
학생이었던 사촌동생 두 명과 나의 여동생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장난을 치며 추억 한 칸을 채우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인생 1막. #마지막 씬]
알바 시간 때문에 아쉽지만 짧은 휴가를 마치고 나는 곧바로 일터로 돌아갔다.
8월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냉면 배달이 당시 나의 주 알바였다.
하늘이 어두워진 시간에도 더위가 가시지 않았다.
일을 마치면 단짝 친구였던 장형네 집에 가곤했다.
생각이 깊고 진중해서 장형이라는 별명이 붙여준 친구였다.
그 친구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어 알게 되었는데, 내가 빌려갔던 모나미 볼펜을 다음날 돌려주었더니
“오~ 신뢰의 아이콘”
이런 닭살 돋는 멘트를 날리는 것이었다.
장형에게 펜을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은 친구들이 많았다고 한다.
사람이 작은 약속부터 잘 지켜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며 아쉬워했다.
그게 고등학생 입에서 나올 말인가 싶었는데, 그 친구도 아버님이 보증을 서면서 가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덕분에 우리는 비슷한 상황에서 우정이 깊어갔던 것 같다.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장형은 중3때까지 전교 1등을 여러번 했으며, 전교회장 선거에도 나갔던 이력이 있었다.
그러나 스물 세 살의 우리의 모습은 가난이 온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형상이었다.
그 날도 알바를 마치고 장형네 집에 갔다.
“오늘도 수고했소”
장형은 벨소리를 들으면 한 걸음에 달려나와 이렇게 인사를 건네곤 했다.
장형의 작은 방에서 나는 주로 컴퓨터를 하고 장형은 TV를 보는 게 마치 루틴같았다.
장형은 성대가 좋아서 화통을 삶아먹은 소리를 낸다고 표현했는데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아 맞다. 오늘 발표”
완전히 까먹고 있었던 나는 몇 초간 이 친구가 무슨 말을 하는건지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오늘 해군부사관 발표날이잖아. 빨리 열어보게”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육군부사관 발표가 있는 날이면 늘 장형 방에서 함께 확인하고, 불합격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러 동전노래방에 갔었다.
그게 8번이었다.
오늘도 불합격이면 어떡하지? 대학도 재수 안하고 한 번에 합격했는데, 운전면허도 바로 취득했는데, 알바도 면접 보면 거의 다 붙었는데…
군대는 왜 이렇게 힘이 든걸까…. 여러 생각이 스치고 교차하는 사이 결과가 조회되었다.
슬금슬금 다가오던 장형이 소리쳤다.
“합격이야! 합격! 축하하오.”
이게 뭐라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장형은 축하파티를 하자며 골목길에 자주 가던 오겹살 집을 향했다.
멤버는 우리 둘 뿐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고생 많았소. 입대까지 몇 일 남은거야?“
합격의 기쁨 때문인지 날짜 개념을 잠시 잃었었다.
“일주일”
합격자 발표부터 입대까지의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그래서 일주일만큼은 후회없을만큼 내 멋대로 보내고 싶어졌다.
한 3일은 PC방에서 일명 ‘올나잇‘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할 줄 아는 게임이 없었다. 옆 자리에 초등학생이 하던 게임이 재미 있어보였다.
그 게임은 ‘카트라이더‘였다. 컵라면과 빵으로 떼우며 3일을 보내고 나오니 햇빛이 너무 밝아서 눈이 부셨다.
[안장있는 자전거]
남은 4일을 알차게 보내고 싶었다. 내가 살던 의정부 주택가에는 삼천리 자전거포가 있었다.
학창 시절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했기에 늘 함께였던 자전거.
중고 자전거 2만원짜리 한 대를 샀다. 중랑천을 따라 하염없이 달렸다. 다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왕 시작한 거 달리다보니 여의도까지 가보기로 했다.
자전거 도로가 다 이어진 건 아니라 일반도로를 병행하며 달렸다.
여의도 공원에서 잠시 쉬며 안장없는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그 새벽을 떠올렸다.
멀쩡한 모습의 자전거를 보고 있으니 그래도 조금은 나아진 느낌이 들었다.
다시 의정부로 돌아오는 길에 불켜진 노원구의 수많은 아파트를 보며
"저 많은 아파트 중 내가 살 곳이 하나도 없는건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어떻게 노력해야 저런 아파트에 살 수 있는걸까?"
조금은 두려운 감정이었던 것 같다.
세상이라는 무대가, 내가 가야할 길이 걱정되고 무서웠다.
자전거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다리가 없어진 것 같았다.
내일은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하루 종일 달리면서 쓸데없는 생각도 많이 날려버리고 온 것 같았다.
[한줌의 재]
장형에게 전화가 왔다. 조금은 늦은 저녁을 같이 먹자는 내용이었다.
장형의 아버지는 나를 많이 예뻐해주셨다. 외동 아들인 장형이 외로울텐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아보인다고 하셨다. 삼겹살을 구워주시며 인생에 도움이 될 조언도 해주셨다.
식사를 마치고 동네 호프집에서 장형과 맥주 한 잔을 기울였다.
우리는 술을 참 못마셨다. 요즘 언어로 알쓰(알콜쓰레기)가 가장 잘 어울리는 청년들이었다.
술이 한 잔 들어가니 그동안의 우리 모습이 쓸쓸하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한 줌의 재로 끝날건데 이렇게 사는거 맞냐?"
장형은 "한 줌의 재" 라는 말에 꽂혀서 명언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시간들이 참 좋았다. 별거 아닌 일상의 한 조각을 빛내주는 시간.
남은 3일의 시간은 할머니와 붙어있었다.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셔서 할머니가 나에게 엄마였다.
막상 입대를 하려고 하니 혹시라도 훈련기간동안 할머니가 떠나시면 어떡하나..할머니가 걱정됐다.
또 고등학생인 나의 여동생도 걱정이 되었다.
이런 저런 걱정만 하다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한 줌의 재로 끝날건데 이렇게 걱정만 하고 있으면 뭐하나..
지친 마음 반, 두려운 마음 반을 나눠가진 채 나는 해군 부사관으로 입대했다.
[인생 2막, #첫 번째 씬]
훈련이 시작된 해군부사관학교에서의 일주일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특별한 훈련 일정도, 소대장, 교관의 무서운 모습도 없었다.
다만 다음주부터는 지금과 다를거라는 엄포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한 주가 지나고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었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뭔가 잘못됐어. 큰일났다."
하루가 너무 바쁘게 지나가고 하루의 훈련은 하루치의 군인 능력치를 쌓게 해줬다.
전공도, 자격증도 군대에서 특기가 될 것이 없었기에
운전, 보급, 헌병, 법무를 지원했으나, 선착순에서 밀리고, 가위바위보에서 지고, 면접에서 탈락했다.
그런데 사람의 운명이 참 신기하다.
의무 병과에 중도 탈락자가 생기면서 TO를 채우기 위한 추가 모집을 받았다.
동기 중 2살 많은 형이 있었는데, 그 형과 함께 지원을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외에 아무도 지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건 관련학과 출신도 아닌 나는 의무부사관이 되었다.
8월에 입대한 나는 12월에 임관을 하고, 진해를 떠나 대전 국군의무학교로 후반기 교육을 받으러 갔다.
일주일에 한 번 1박2일의 외박으로 무려 7주을 연달아 대전과 의정부를 오갔다.
그때 나는 "앞으로 그동안과 다른 삶을 살아보자" 고 다짐했다.
눈이 너무나도 많이 내렸던 2005년 12월과 2006년 1월.
터미널까지 가는 차가 너무 밀려 이왕 놓칠거 대전에서 택시를 타고 의정부까지 가는 객기도 부려봤다.
자대 배치를 받고 또 한번 힘이 빠졌다.
나는 진급이 잘 된다는 격오지를 지원했다.
백령도와 해병대2사단, 그리고 평택에 있는 해군2함대를 각 1~3지망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결과는 쌩뚱맞게도 강원도 동해에 있는 해군 1함대....
해군 특성상 경상도 지역 동기들이 많아서 그들은 진해로 많이 갔다.
아버지가 원사, 삼촌이 상사, 사촌형이 대위....
해군에서도 나는 뭔지 모를 소외감을 느꼈다.
게다가 배치받은 부대에 몇 일날 간다고 전화를 해야했는데, 동기들은 좋은 선배인 것 같다며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행정관(훗날 친해졌지만)이 다짜고짜 화를 내고 욕을 하는 바람에 정말 가기 싫었다.
자대로 가는 날은 2006년 1월 마지막 주, 설날 연휴였다.
동기들과 연락처를 나누고 터미널에서 인사를 마쳤다. 내가 가장 빨리 출발했다.
대전에서 동해로 가는 버스에 앉아 동기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느꼈다.
"또 나만 혼자 가야하는구나"
동기들은 2-3명씩 같은 부대로 배치를 받아 함께 갔다.
어느 순간, 쓸쓸함과 외로움은 원래 내 몫인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빚인 줄 알았던 빛]
스무살, 신용불량이 되었던 날은 빛인 줄 알았던 것이 빚이 되었다.
강릉에서 동해로 가는 고속도로. 동해바다의 풍경이 처음으로 펼쳐지는 구간이 있다.
바다를 처음 본 건 아니지만,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고 설레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앞으로 어떤 삶이 펼쳐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 시작될 거라는 믿음은 확고했다.
잠깐이었지만 직업군인의 삶이 엄청 부유하거나, 대단한 직업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의 해군에서의 4년은 꽤 행복했다.
첫 휴가를 나갔던 날 가족보다, 친구보다 먼저 찾아간 곳이 신용회복위원회였다.
이미 상담 받으러 갔을때부터 안스럽게 생각하고 도와주려고 애쓰셨던 분이 계셨다.
아직 급여를 받은지 오래 되지 않아서 당장 신청은 어렵지만 신청을 위한 준비를 어느정도 해둘테니 기간이 채워지면 바로 진행하자고 하셨다.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지긴 했지만 시간이라는 게 참 신기했다.
지금은 더디고 힘들게 느껴지는데 하루만 지나서 돌아봐도 그 고통의 임팩트가 떨어진다.
3개월쯤 지나 신용회복 신청을 했고 얼마 뒤 승인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데, 그땐 살면서 처음 내 힘으로 무언가를 이룬 기분이었다.
더이상 신용정보회사의 독촉전화도, 본가에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게 사람을 참 피폐하게 만들었었다는 생각도 지나고 나서야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이라는 지점에 있었기에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분노와 허무함의 연속이었다고나 할까..
신용회복위원회에 첫 상환을 하던 날이 기억난다.
빚을 갚으면서 신이 났던, 빚인 줄 알았던 것이 빛이라고 느껴졌던.
2006년은 그렇게 빠르게 지나가버렸고, 스물 다섯살이 되어버렸다.
그제서야 나는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건강한 고민을 진지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