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열심히 살지 않기로 했다.

최선을 다하기 시작하자 운수가 좋아졌다.

by 로건리

입대 전 나는 주변 어른들에게 열심히 산다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다.

월 2회 휴무에 하루 12시간 근무를 하면서 남는 시간은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래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아 중고 트럭을 한 대 사서 전국을 다니며 과일과 야채 장사를 했다.

뺑뺑이를 타고 한없이 도는 것처럼.. 아무리 발버둥 쳐도 끝나지 않는 지옥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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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만 살았지만 재수는 없었다]


입대 전의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나는 재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계속 재수 없는 일이 반복되었다.

쉽게 말해 뭘 해도 안 되는, 어떻게 해도 안 풀리는 일이 많았다.


식당에 가서 주문을 하면 내 테이블에만 물을 주지 않거나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는 일..

내가 주문한 음식에서만 돌이나 머리카락이 나오는 일..

신호가 간당간당 할 때 굳이 내 앞에 들어온 차가 길을 막아 신호에 걸리는 일..

비 오는 날 친구들과 여럿이 길을 걸어가는데 지나가는 차가 웅덩이 고인 물을 밟아 나에게만 튀는 일..


육군부사관 지원할 때는 행정부사관을 지원하면 1명 모집에 100명이 넘게 지원자가 몰려들고..

일반으로 지원하면 행정 지원자가 적고..

특전부사관 시험에 합격을 해놓고 손을 다쳐 입소하지 못한 일..

해군부사관에 지원하러 병무청에 갔던 날도 어제가 마감이었다며 다음 기수에 지원하라고 했던 일..


그냥 나의 모든 하루하루가 풀리지 않는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들이지만, 그때 내 머릿속에는 부정적인 생각만 하는 괴물이 들어있었던 것 같다.


난생처음 정규직의 경험을 군대에서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해군부사관 생활이 시작되고 내 삶의 많은 변화들이 찾아왔다.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변화가 시작되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봤다.


훈련 기간 중 몇 차례의 야간비상훈련(일명 야비)이 있었다.

취침 시간 이후 갑자기 소대장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복장과 집합 위치 지시사항이 하달되면 쏜살같이 나가야 했다.

어느 가을 새벽, 훈련이 끝나갈때즘 소대장님이 했던 말이 그 지점이었다.


"물이 끓기 위해서는 100도의 온도까지 도달해야 한다. 99도의 물이 뜨겁지 않은 건 아니야. 하지만 그 1도의 차이로 뜨거운 물이냐, 끓는 물이냐의 차이가 발생한다"


지금은 너무 흔한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당시 나에게 이 한마디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또 이어진 말.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한 속도가 몇 Km인 줄 아나? 275km가 되어야 뜰 수 있어. 274km가 느린 속도인가? 너희들 운전해서 달릴 수 없는 빠른 속도야. 그런데 그 1km의 차이로 빠르게 달리느냐, 뜰 수 있느냐의 차이가 발생하는 거다. 알겠나?"


그때 소대장님은 곧 훈련소를 떠날 우리들에게 해군 선배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나를 돌아봤다.

나는 열심히 살지 않은 순간이 단 한순간도 없다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나는, 최선을 다해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목적 없이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짜증으로 가득한 바보 같은 열심꾼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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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 시절]


초임 시절의 나는 원래 고속정을 타러 가야 했다.

설 명절이 끼어있어서 의무대에 잠시 대기발령으로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선배들은 눈길도 주지 않고 행정실에 목각인형 마냥 나를 그냥 앉혀놨다.

살면서 그런 호사를 누려본 적이 없기에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다.


가끔 배 타는 선배들이 물품 가지러 오면 커피믹스를 타드리고, 잔심부름 기회라도 있으면 뭔지도 모르면서 내가 하겠다고 자청했다. 그야말로 잉여인간이 되어 본 것이다.


하루는 행정관이 내 아이디로 공문을 보냈다며 읽어보라고 했다.

공문이 뭔지도 몰라서 그걸 계속 메일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무지했던가..

그런데 내용을 보니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공문 기안도 기존에 받은 공문 비슷하게 작성하고, 모르는 건 행정병에게 물어보면서 몇 가지 처리를 했다.

또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아침마다 간부회의를 하는데 나는 대기발령자라 행정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갑자기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의무대장 다음으로 높은 사람은 준위 계급을 달고 있는 관리과장이었는데 아주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분의 사무실에서 회의를 진행하는데 목소리도 쩌렁쩌렁하고 눈매가 부리부리했다.

행정관이 말했다.


"과장님, 이하사 이놈 며칠 굴려봤는데 쓸만한데요? 사람도 없는데 그냥 여기서 쓰면 안 되겠습니까?"


관리과장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더니 말했다.


"이하사, 여기서 근무 한번 해볼래?"


행정관은 군인은 까라면 까는 거라며 나에게 생각할 시간 따위는 주지 않았다.

사실 나는 수당 때문에 배를 타고 싶었다.

그런데 그 방에서 나는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기회 주시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관리과장은 무서운 눈빛으로 말했다.


"어이 이하사, 열심히 하지 말고 잘하거라. 못하면 혼난다."


긴장된 회의시간이 끝나고 책상 하나를 배정받았다.

거기에 행정병이 "방역반장"이라는 탁상용 명패도 걸어줬다.

방역이 뭔지도 몰랐지만, 학창 시절 반장 한 번 못해 본 나는 잠시지만 그저 좋았다.


방역반장 자리는 원래 중사나 중위 TO라고 했다.

그런데 서로 하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공석으로 비워져 있었다고 한다.

일이 힘들어서 피하는 자리가 아니라 진급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어차피 장기근무 할 생각으로 입대한 게 아니었으니 상관없었다.


처음 맡은 일은 보일러실에 기름을 넣는 것.

날이 풀리면서 방역통 메고 부대 돌면서 소독약 뿌리는 것.

여름이 되면 방역차 타고 부대와 군 아파트를 돌며 소독하는 것.

그 외에는 그냥 잡일들이었다.


하루하루가 너무 여유로웠다.

이 여유로움이 너무 이상했다.

아니 불안했다.

왠지 이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옆자리에 근무하던 선배가 전역을 한다고 선포했다.

그 선배는 의약품이나 의료장비를 관리하는 보급일을 하고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에게 임시로 겸직을 맡으라며 일을 가르쳐줬다.

사실 가르쳐준 게 없었다. 특별히 어떤 일을 벌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급 일을 맡게 된 이후 창고를 들어가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출입구를 막고 있는 오래된 들것, 어디에 무슨 물품이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진열장의 배치.

어디서부터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불편하게 서있는 보급병에게 물어봤다.


"너 처음 왔을 때도 이랬냐?"


보급병은 상당히 난처해하며 대답했다.


"아마 그랬을 겁니다."


그 대답이 조금은 짜증이 나서 다시 물었다.


"아마 그랬을 거라는 건 무슨 뜻이야? 너 여기 처음 와봤냐?"


"네 그렇습니다."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보급병은 나보다 늦게 의무대에 발령을 받아서 왔는데 전역한 전임자가 부사관들도 신경 안 쓰는 곳이니 사무실에서 꿀이나 빨다가 전역하라고 했단다. 그게 뭐 대단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다들 그렇게 있다가 가는 곳이니까.


"너도 그냥 모른척하고 있다가 전역하면 되겠지만... 하나만 물어보자. 저 창고 안이 정상 맞아?"


"아닙니다."


"내가 좀 특이한 거 아는데,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맞습니다."


"내가 이런 말하면 너는 좀 싫을 거라는 거 아는데.... 좀 도와줄래?"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보급병은 그러겠다고 했다.

영내 생활관에서 지내며 수병들과 친하게 지내다 보니 10명이 넘게 청소를 도와줬다.

물을 연결할 곳도 없어서 장교 숙소 1층 화장실에서 양동이로 물을 받아오고, 버릴 물건이 너무 많아 공문을 보내 처리해야 했다.


늘 누군가가 시키는 일, 어떤 일의 한 부분을 처리하는 것에 익숙했던 나는 처음으로 내가 주도하는 일을 해본 것이었다. 육체적으로는 너무 힘든 몇 일간의 여정이었지만, 기분이 참 좋았다. 도와주는 수병들 맛있는 음식도 사주고 모두가 웃으면서 일을 했다. 너무나도 감사한 시간이었다.


배를 타는 선배들이 물품 신청을 하면 30평도 넘는 창고 안에서 몇 바퀴를 돌며 물건을 챙겨야 하니 한참이 걸렸다. 같은 물건이 여기에도 있고, 반대편에도 있고, 유효기간 지난 물품도 허다했다.


나는 또 일을 벌이고 말았다.


업무일지 예정사항에는 창고정리(~종료 시까지)라고 적어두고 창고에서 살다시피 했다.

헌병대에 디지털카메라 인가를 받아서 창고에 있는 물품들을 전부 촬영했다. 그걸 출력해서 커다란 스티로폼 판에 번호를 적어 붙였다. 입구에서 물품을 보고 번호가 있는 칸에서 바로 가지고 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일은 내가 의무대에서 제대로 인정받은 첫 사건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지 한 번씩 궁금하다.


내가 자대 배치받은 시기에 부사관은 2년 간 영내 생활관에서 지내야 했다.

3년 차가 되어야 간부 숙소나 부대 밖에서 출퇴근을 할 수 있었다.

영내생활 5개월 차에 접어들었던 시기에 갑자기 공문 하나가 내려왔다.


"부사관의 영내 의무 기간을 2년에서 6개월로 단축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장 한 달 후에 나가야했다.

우리 기수는 영내 생활의 기간이 가장 짧았다. 그래서 선배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다.

그런데 나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군 숙소는 우리가 가장 막내 기수였기 때문에 선배들이 우선적으로 입주했고, 원룸을 구하자니 보증금도 모으지 못한 상황이었다. 나는 행정관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그냥 영내에서 지내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나가려니 모아둔 돈도 없고,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내 이야기는 의무대장님께도 보고가 올라갔다. 선배들 입장에서 내가 영내생활을 계속한다고 하면 좋은 일이었다. 필요할 때 당직도 편하게 바꿔줄 수 있고, 수병들의 생활관 분위기도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부에서는 무조건 나가라는 입장이 강력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당시 영외로 나가는 선배가 같이 살아도 된다고 흔쾌히 받아줘서 그 집에 얹혀서 살기로 하며 부대에서 나왔다.

(그 선배는 지금 제주도에 사는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연락을 하고 지낸다.)


그날 밤 나는 대운이 바뀐 걸 느꼈다.

지금의 나는 운수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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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회복, 인생회복]


영외 생활을 시작하니 주말이 참 여유로웠다.

금요일 퇴근 이후 월요일 출근까지는 자유시간이었다.

주말 알바를 해야할 것만 같은 불안한 여유로움이었다.


급여를 받은 지 6개월이 지나면 신용회복을 진행하자고 했던 담당자분의 말이 떠올랐다.

금요일 하루만 휴가를 내고 금토일 서울로 가는 군의관 형들이 있었다.

나도 금요일 휴가를 내고 목요일 밤 군의관 형 차를 얻어 타고 서울로 향했다.


금요일 아침 일찍 방문한 신용회복위원회.

미리 준비해 간 서류를 제출하고 기다렸다.

영내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면 이 일도 처리하기 번거로웠겠다는 생각을 하며 걱정도 찾아왔다.


급여가 작아서 승인이 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신용회복에 돈을 다 내고 나면 내가 쓸 돈이 별로 없으면 어떡하지?

또 기간이 더 필요해서 몇 달 뒤에 다시 오라고 하면 짜증나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담당자분이 나를 불렀다.


"급여가 120만 원이면 주택비용이랑 식비, 휴대폰 사용료 같은 게 보장이 되어야 한다 그죠? 또 군인인데 타지생활 외롭잖아요. 집에도 한 번씩 오려면 교통비도 필요할 거고, 친구들 밥도 한 번씩 사야 안됩니까? 맨날 얻어먹을 수는 없으니까~

...... 한 달에 30만 원 정도는 낼 수 있겠어요?"


무조건 낼 수 있다고 말하며 빠르게 업무를 진행했다.

별 다른 이야기 없이 승인을 받았고 다음 달부터 납부할 계좌를 받았다.


"그동안 너무너무 고생 많았어요. 그래도 인자 해군하사가 되었다. 그죠? 이건 연체하면 큰일 납니다. 납부 잘하세요"


웃으며 말씀하시는 담당자분이 너무 고마웠다.


2002년 겨울, 사용할 수 없는 카드라는 버스 카드 단말기의 음성으로 처음 알게 된 신용불량자의 삶.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일이 생겼는지 하늘도, 가족도, 세상 모두가 원망스러웠다.

2006년 여름,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생기고, 신용불량자에서 신용회복 중인 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나는 열심히 해도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때 알았다.


열심히만 해서 목표지점에 도달을 못했었구나!

이제 최선을 다한다는 말의 의미를 희미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내 인생의 2막은 내 힘으로 아름답게 만들어보자.


동해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자꾸만 알 수 없는 웃음이 났다. 웃고 있는데 눈물이 났다.

감정이 조금 추슬러진 다음 스스로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어?"


당장은 논리 정연하게 답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보낼 시간이 너무너무 감사하고 행복했다.

그때의 나는 부정적인 생각이 1%도 없었다.


인간은 나약한 동물이라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환경을 컨트롤해야겠다는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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