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월의 연습과 5분의 무대, 그리고
난생 처음 도전하는 무용 콩쿨 무대.
준비 동작에서 쥐가 난 발가락을 무대 바닥에 꾹 누르며 준비한 동작은 아니지만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즉흥적인 동작을 만들어냈다. 5분동안 펼쳐진 나의 첫 콩쿨 무대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너무 화가 났다. 그런데 응원하러 온 가족과 지인들, 그리고 선생님은 쥐가 났었냐며 전혀 몰랐다며 좋은 결과가 있을거라고 미리 축하까지 해주셨다.
하지만 나는 다같이 식사를 하면서도 아쉬움이 가시지 않았다.
[7개월의 연습기간과 5분의 무대 그리고 아쉬움]
아쉬운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아 연습도 집중을 하지 못했다. 돌아보면 이런 모습 자체가 완전 아마추어였다. 당장 일주일 뒤 청주에서 진행되는 콩쿨 준비에 최선을 다해야했다. 그러나 그냥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며 두번째 무대에 올랐다. 참가번호도 뒤쪽을 받아 기다리는 시간도 지루했다. 다행히 발가락에 쥐가 나는 일은 없었지만 무대에서의 임팩트도 없었다. 선생님도 이번 콩쿨은 기대하지 말라고 하셨다.
다음 콩쿨까지는 한 달.
어쩌면 마지막 콩쿨이 될 수도 있는 무대이기에 정신을 차리고 가장 열정적인 시간을 보내기로 다짐했다.
정말 감사한 일은 의무대 선배들도 바쁜거 없으면 가서 연습하라며 배려를 해주셨다. 덕분에 수병들이 생활하는 생활관에서 연습시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콩쿨 전 일주일은 통째로 휴가를 내고 연습에 매진했다. 세 번째 무대는 크게 긴장이 되지도 않았다. 덤덤하게, 당당하게 걸어올라가 작품을 마치고 내려왔다. 선생님도 수고했다는 말 외에는 특별한 말씀이 없으셨다.
내가 준비한 콩쿨은 끝났지만 선생님의 창작 활동은 더욱 활발해지셨다. 동해시 묵호어시장 주차장에서 열린 오징어축제, 강릉에서 열린 강릉단오제, 그 외 창작 공연을 수 차례 올리셨다. 덕분에 나도 몇 번의 무대를 경험할 수 있었다. 새로운 안무를 연습하느라 콩쿨 결과 발표도 잊고 있었다. 부대에서 근무중 선생님 전화를 받았다. 차분한 목소리로 선생님은 짧게 말씀하셨다.
“결과 확인했어?”
“아..오늘 결과 발표날이네요. 저 수상자 명단에 있어요?”
“직접 확인해봐.”
텐션이 낮은 선생님의 목소리가 기대와 불안감을 절반씩 나눠갖게했다.
부대에는 인트라넷만 접속이 되었고 군의관 휴게실에 외부 인터넷이 가능한 컴퓨터 한 대가 있었다.
점심 시간이 시작되고 군의관 전원이 모여있는 휴게실에 들어갔다.
“인터넷 잠시만 사용하겠습니다.”
수상자 명단은 장려상, 동상, 은상, 금상, 최우수상 각각 조회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장려상 명단을 확인하는데 군의관 한 분이 먼저 말을 꺼내셨다.
“오늘 콩쿨 발표날이야?”
휴식을 취하던 군의관 전원이 컴퓨터 화면을 보기 위해 모두 모여들었다.
“장려상은 볼 필요 없는거 아니야?”
나의 노력한 시간을 함께 지켜본 군의관들은 더 높은 결과를 기대한 것 같았다.
수십명의 장려상 명단에는 내 이름이 없었다.
심장이 점점 빨리 뛰기 시작했다. 정말 동상 정도는 수상한건가?
동상 수상자 명단을 클릭했다.
역시나 내 이름이 아니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목젖까지 진동이 느껴졌다.
은상 수상자 명단을 클릭했다.
정말 큰 기대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내 이름은 없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낮은 텐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저는 상복이 없나봅니다“
나보다 더 기대에 부풀어 있는 군의관들을 향해 한마디를 남기고 휴게실을 나와버렸다.
실망의 감정이 너무 컸다. 조금은 억울하기도 하고 내 자신이 형편없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전화가 다시 울렸다.
“결과 확인했어?”
“죄송해요.”
“최우수상을 바란거야? 그건 욕심이 너무 과하지~“
최우수상은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장려상이라도, 욕심을 좀 부린다면 동상쯤 타보고 싶었다.
군의관 휴게실에서 시끄러운 환호가 흘러나왔다. 새벽마다 수영장을 함께 다니던 군의관이 뛰어나오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축하한다. 이야~ 대단하다.”
의아한 눈으로 멀뚱멀뚱 서있던 나를 휴게실로 다시 끌고갔다.
아직 연결되어 있는 휴대폰으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확인하고 축하받고 있구나. 이따 학원에서 봐.”
다시 확인한 컴퓨터 화면에는 내 이름 석자가 보였다. 무슨 상인지 확인하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금상-
[내가 만든 축제]
학창시절 내가 받아본 상은 개근상 12개와 노력상(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상승폭이 가장 큰 학생에게 주던 상) 뿐이었다.
대회의 규모나 영향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500명 정도의 참가자 중 2등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조금 전 이 방을 나가며 스스로를 형편없다고 느꼈던 나인데, 5분도 지나지 않아 내가 참 대견하고 자랑스러워졌다.
부사관 선배들과 함께 일하던 수병들도 모두 축하해주었다. 그날 학원에서도 축제 분위기였다.
그때까지 살면서 누군가에게 그 정도의 축하를 받아본 경험이 없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칭찬도 받아본 사람이 잘 받는 것 같았다.
쑥쓰럽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날만큼은 연습도 쉬면서 사치를 부리기로 결정했다.
택시를 불러서 망상해수욕장으로 갔다.
망상해수욕장은 나의 상상력과 꿈을 키우던 공간이다.
해수욕장 개장을 하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비수기때 한산한 망상해수욕장의 긴 모래사장을 걷다보면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아래 한없이 작은 내가 보였다.
그래서 힘든 일들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나는 가진게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모두 꽉 움켜쥐려고 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돌아보면 내가 움켜쥐려던 것들 중 하나도 내 손안에 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내 욕심이고 바람이었던 것 같다.
그날은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축하해주고 응원을 해준 날이었다.
어떤 감정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갑자기 복받쳐 오르며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나는 늘 재수가 없다며, 해도 안된다며, 스스로를 얼마나 학대해왔었는지 20여 년의 시간이 너무나도 무겁게 밀려왔다.
그날의 잔잔한 물결과 대조되는 감정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서 울고나니 몸이 떨리고 힘이 다 빠져버렸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는데 처음으로 내가 예뻐보였다.
(우리 와이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안전한 얼굴이다)
떠오른 생각을 현실에서 실행에 옮기는 건 누구보다 잘하던 내가 결과를 낸 일은 처음이라 감정이 많이 요동쳤던 것 같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움켜쥘수록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굳이 필요없는 것들은 던져버리자“
[움켜쥘수록 흘러내리는 모래]
그 후로 쓸데없는 감정, 필요없는 생각이 쌓일때면 실제로 바다에 가서 모래를 던지며 마음을 비우곤 했다.
금상 이후 차례대로 동상, 금상을 추가로 더 수상하며 무용과 입시를 위한 작은 스펙을 준비해두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진행하는 지역 공연에 엑스트라, 단역, 무용수로 무대에 오르며 작은 경력들을 쌓기 시작했다.
공연을 준비할 때면 판소리, 무용의 나름 대가들이 참여하며 프로들의 세계를 눈앞에서 보여주곤 했다.
사실 지역 행사는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오르는 무대라고 생각했었다. 나의 얕은 생각들은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무대에서는 내가 설 자리가 있었고, 내가 할 말이 있었고, 나만이 할 수 있는 동작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두려워졌다.
곧 해군을 전역하고 사회로 돌아가야 하는데 내 자리가 있을지,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살아야 할지 갑자기 막막해졌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비슷한 말을 해주었다.
“너는 어디서든 잘 할거야.”
“너는 무슨일을 하든 남들보다 잘 할거야.”
나에 대한 자신감이 약했던 나는 그런 말들이 기분 좋으라고 해주는 소리 같았다.
실제로 나는 가진것도, 능력도 없는, 그야말로 한량 같은 20대 후반의 무직자가 될 것이 뻔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성찰의 시간은 짧았고, 그 시간이 지나고나면 나는 움직였다.
그리고 결정했다.
어딘지 모르지만 내가 필요한 곳에 있고, 그 곳에서 필요한 모습이 되겠다고!
[최선을 다한 시간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20대 후반. 내 생에 가장 열정적인 시간은 나를 많이 성장시켰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무용과 입시는 도전하지 않았다.
대신 고집을 부려 연극영화과 입시에 도전을 했고 10곳이 넘는 학교에 지원을 했지만 가장 높은 결과는 예비 3번이었다.
결국 해군 전역 이후 다니던 학교에 복학해서 1년을 더 다니고 2년제 대학을 무려 9년만에 졸업했다.
그렇게 30대가 된 나의 스펙에 취업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면접 연락이 오는 곳은 보험회사 아니면 다단계 회사 뿐이었다.
자본은 없으니 극단에 들어가는 결정은 하지 못했다.
대신 매번 불합격하는 연극과 뮤지컬 오디션에 지원하고 다시 알바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쓰리잡의 시간도 돌아왔다.
주말에는 호텔 발렛주차 알바와 돌잔치 사회자로 활동했다.
전체적인 수입은 나쁘지 않았지만 불안정하고 미래를 그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때 전화 한통을 받게 되는데, 해군에서 인연을 맺은 군의관 형이 운영중인 병원에서 일을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인생의 시작, 그 신호탄이 울리는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한 시간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