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서른살, 아무런 연고도 없는 부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군대에서 맺은 인연으로 병원의 원장이 된 군의관 형의 일을 돕겠다는 생각 하나 뿐이었다.
"쌤 얼굴보고 기다리는거에요. 안그럼 벌써 노동청 갔어요"
"과장님 믿고 진행합니다."
"실장님이 지키고 계셨으니 계속 투자한겁니다."
그동안 어려운 상황에 놓인 횟수는 셀 수 없었다.
그때마다 일하며 만났던 직원분들, 거래처 담당자분들, 업체 대표님들의 한마디가 쌓여갔다.
그때의 내가 생각하는 병원, 그리고 병원을 운영하는 원장은,
아니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부자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병원이라는 곳이 그리 만만한 경영의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면접, 아니 그냥 나라는 사람이 곧 이곳에 입사할 거라는 선포같은 걸 하러 정식 입사 전에 병원을 한번 방문했었다. 그때 원무부장은 굳이 왜 먼 곳까지 내려와서 고생을 하려고 하느냐며 그냥 서울에 있으라는 말을 했다. 설렘으로 가득찬 내 마음은 그분의 걱정스러운 말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었다.
입사를 하고 한 달정도 인수인계 시간은 있었지만 전임자의 대답은 늘 비슷했다.
"그건 전 잘 몰라요. 앞에 사람한테 들은게 없어요."
20대 초반 알바인생 시절에도 그랬다. 해군 의무대에 갔을 때도 그랬다.
나는 전임자의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본 역사가 없었다.
팔자려니 생각하고 일을 시작했다.
60명 정도 되는 직원과 200명 이상의 환자, 100곳은 거뜬히 넘어가는 거래처.
당시 꽤 바쁘고 활기차보이는 병원에서 일하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의 연속인 나날들.
6시가 되어야 본격적인 나의 업무가 시작되던 그 시절이 나는 좋았었다.
월말이 다가오고, 결제를 독촉하는 거래처의 방문과 전화가 이어졌다.
사정을 이야기하며 결제 일자를 약속하고 사과를 하는 게 내 일이었다.
하루는 출근을 하는데 직원들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느껴졌다.
내 방 앞에 기다리고 있는 거래처 사람들..
서로 자신이 먼저 왔다고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순서는 알아서 정하시고 한 분씩 들어오세요."
나는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이 참 답답하게 느껴졌다.
"아... 앞으로의 이 곳 생활도 쉽지는 않겠구나...."
거래처는 하루가 지날때마다 몇 곳씩 튀어나왔다.
병원 운영을 하면서 왜 이런 거래가 필요했는지 의아한 곳이 한 둘이 아니었다.
어떤 곳은 3년 전에 납품 후 대금 지급을 받지 못했다며 찾아왔다.
알고보니 담당자가 바뀌었는데 사람이 쉬워보인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이런 소문들은 정말 빠르게 순환되었다.
내 귀까지 들려오는데 채 몇일이 걸리지 않았으니..
꼭 스무살 신용불량자가 시절 채권추심업체 사람들과 만나는 기분이었다.
내가 빚을 진 것도 아니고 사실상 원장님이 직접 빚을 진 것도 아니었다.
쉽게 표현하자면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있는 한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갚을 수 있냐? 얼마나 결제 가능하냐?
매일 이런 입씨름을 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새벽 3시까지 거래처 미수파일을 정리했다. 내가 상상할 수 있었던 금액을 훌쩍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원장님의 학력과 사람을 팬으로 만드는 인간적인 매력은 큰 장점이었고, 병원을 살릴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첫 월급 이후 두번째 월급 지급일에 급여가 밀리기 시작했다.
이미 기존 직원들에게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고 했다.
얼마나 많은 항의를 하고 사직서를 받았는지 모른다.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직원들과 회식을 제안했고 절반정도의 인원이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병원의 히스토리를 알게 되었고 그들은 나에게 서울로 돌아가라는 말을 반복했다.
원장님의 마인드, 부서별 차별하는 태도는 절대 많은 직원들을 이끌고 갈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군대에서 본 모습으로 그들을 설득했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저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마디 남겼을 뿐이다.
"쌤 얼굴보고 기다리는거에요. 안그럼 벌써 노동청 갔어요"
나는 병원을 어떻게든 살려보고 싶었다.
컨설턴트라는 사람을 만나보고, 책을 집필한 저자도 만나봤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보험 상품을 가입하라는 등, 마케팅이 부족하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병실을 폐쇄하고 매출이 나오지 않는 진료과목을 없애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많은 부채를 안고있는 이 병원을 인수할 사람을 찾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도 생활이 안되니 병원업무를 마치는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분식집에서 일을 하며 기본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아이를 키우는 간호사가 찾아왔다.
아기 분유 살 돈도 없다며 너무한거 아니냐고 나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나는 얼마 되지 않지만 알바비 받은 돈을 먼저 쓰시라며 입금해드렸다.
그리고 요금 미납으로 내 휴대폰은 정지상태가 되었다.
직원들의 불만은 계속 쌓여갔고 한 명씩 퇴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장은 그랬다.
"병원 살림이 어렵다면서 원장님은 좋은 집에 살고 있잖아요. 최소한 같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직원들이 믿고 따르지 않겠어요?"
나는 그들에게 구차한 변명을 하다가 스스로 지쳐버렸다.
원장님은 본인만의 이유가 있고, 그런 생각을 하는 직원은 함께 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직원들의 입장은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경영자와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가야 병원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난 어렸으니까 판단 능력이 지금보다 훨씬 떨어졌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면서 마음속으로 디데이를 정했다.
병원쪽 일, 부동산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특이한 사람들이 참 많다.
돈 한푼없는 사람이 기업 회장처럼 포지셔닝하고 접근하는 경우도 많고, 입으로는 대기업도 만들 수 있는 사람, 그 지역의 절반 이상을 본인이 작업했다고 말하는 사람 등등....
지금은 너무 지치지만 그땐 한줄기 빛 같았던 어떤 사람들이 접촉을 해왔고 그들이 병원을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그동안 나는 이번 생에 포기했었던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되었고, 병원은 어느 정도의 정리를 하고 자리를 옮겨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시작을 위해 거래처 계약이 여러번 필요했다.
대부분은 원장님과 관계가 있었지만 몇 몇 업체의 담당자분들은 나를 따로 찾아와 말했다.
"과장님 믿고 계약하는 거니까 신경 많이 써주셔야 합니다."
그분들은 정말 작은 규모의 영세업체였고, 평소에는 전혀 티가 나지 않지만 빠지면 크게 곤란해지는 일을 도맡아 주는 분들이셨다.
하지만 결국 우려했던 것처럼 또 업체 결제가 밀리고 세금과 4대보험 등 문제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식자재 업체의 결제가 밀리지 납품을 중단해버렸다.
그리고 그 독촉은 나에게 집중되었다.
식당 운영에 바로 큰 차질이 생겨버렸다.
당시 내 월급은 200만원.
나는 내 사비를 털어 새벽에 시장을 직접 갔다.
트럭 장사 시절 경험으로 장보는 일은 너무 재미있었다.
다만 선지출 한 비용을 바로 받지 못할때면 가정 경제의 흠집이 나기 시작했고, 아내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래도 병원을 성공적으로 키우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기때문에 버텼다.
퇴근길에 걸음이 어려운 노인 환자분이 귀가도중 넘어지거나 쓰러지는 상황도 많이 발생했다.
그분들을 병원에 모시고 가서 응급실 접수를 해드리면 보호자가 와야 교대하고 퇴근할 수 있는데 타지역에 있거나, 부모님과 연을 끊고 사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았다.
문제는 나도 갓난쟁이가 태어났을 때까지 이런 일들이 계속되었다.
기억에 남는 한 분은 연락이 되지 않아 불안한 마음에 집으로 찾아가봤다.
벨을 눌러도 대답이 없고 집에는 불이 켜져있었다.
신문 구멍으로 보니 주방에 누워있는 환자분의 모습이 보여 119에 신고를 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생명에 지장이 있었을거라는 구급대원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던 날이다.
그분은 평생 혼자 사셨던 여자 환자분인데 가족도 없어서 돌아가신 뒤에 교회에서 연락을 받았었다.
이런 일들은 내가 얼마나 애정이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개인이든 사업체든 무시를 당하기 마련이다.
더 웃긴건 내가 주인도 아닌데 나까지 무시한다는 것.
업무적으로도 발전이 필요했다.
나는 세금폭탄을 맞은 원장님을 보며 세무회계 교육을 신청했다.
그 교육이 끝나고 인사노무 교육도 신청을 했다.
그 이후 진료비 청구업무를 배워 병원 운영을 탄탄하게 꾸려가기 시작했다.
그 후로 마케팅에 관심이 생겨 블로그와 카페, 각종 SNS 마케팅을 배우러 서울까지 다녔다.
모든 비용은 사비로 투자한 것이다.
또 나의 첫 아이, 아들의 모습을 남기고 싶어 유튜브를 시작했는데 그 시장이 점점 커져갔다.
덕분에 마케팅에 관심도 없고 무시하던 원장님은 지역 내 매출 1위를 기록하는 경험과 동시에 100만명이 넘는 구독자를 가진 채널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뿐만아니라 공중파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 채널에는 관심이 없고, 남의 채널에만 애정이 넘쳤다. 섭섭한 마음은 지금도 가시지 않는다.
그때까지 내가 지불한 강의비와 각종 비용이 누적 5천만원이 넘었다. 시작은 병원의 홍보를 해보겠다는 목적이었지만 내 사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으니 투자라고 생각하면 큰 금액은 아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해외 환자 유치는 피부과나 성형외과, 검진센터에서 공격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나 나의 제안은 조용히 묻히고 말았다. 어쩜 그때 더이상 도전하지 말았어야 했나보다.
9년동안 원장님과 나의 시간, 에너지, 비용을 투자하며 해외 병원과 환자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투자도 받고 좋은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꿈으로 끝이 났다.
지분, 직책, 이름....
나는 그냥 유령이 되어버렸다.
나는 원장님을, 원장님은 나를 신뢰하며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지금도 원장님과의 관계는 전혀 문제가 없다.
그저 생각지도 못했던 내부 총질을 당하며 한마디로 팽 당한 꼴이 되어버렸다.
나는 14년의 병원 생활을 정리했다.
내가 병원을 그만두기 얼마 전, 오래 거래하던 업체 대표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실장님이 그동안 자리를 지키고 계셨으니 그거 믿고 기다린겁니다. 그만 두셨으면 저도 힘들었을겁니다."
참 다양한 직책으로 같은 자리에 있었다.
실제로 내가 퇴사한 이후 환자가 10% 이상 줄었다고는 하지만 나라는 작은 존재가 환자 감소에 미치는 영향은 없었을 것이다.
나의 30대를 갈아넣은 곳에서 그 흔한 송별회도, 그동안 수고했다는 문자 한 통 없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져버렸는데 그 타격이 너무나도 컸다.
한 달동안 슬픔의 감정 - 분노의 감정 - 새로운 희망의 감정을 차례대로 겪었다.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많은 눈물이 내 안에 있었는지도 처음 알았다. 나의 분노는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아주 큰 폭풍이 내 안에서 지나가버린 후 고요했다.
너무나도 고요했다.
마치 해군 부사관시절, 동해로 가는 버스에서 했던 생각처럼 지금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나는 이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자고 있는 첫째 아이의 얼굴을 보니 너무 많이 컸다.
초등학교 4학년.
인큐베이터에서 나올 수 있을까 걱정했던 딸의 자는 모습을 보니 역시 너무 많이 컸다.
초등학교 1학년.
그냥 지나가는 세월은 없고, 쓸데없이 허비하는 시간은 없었나보다.
그동안 나의 무기들을 모아 만든 나의 회사를 키울 시간이 시작된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