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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반찬 다이어리 May 19. 2023

친절한 동네

오늘 소화할 스케줄은 세개다.

아침엔 충무로 인쇄소에 갔다가 점심엔 일산으로 디자인학원 선생님과 점심, 저녁엔 마포에서 전 직장상사와 동료랑 식사.

잠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 모든 걸 진행할 생각을 하니, 아침엔 꽤나 부담이 되고 힘도 좀 빠져 걸음걸이에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도 선잠을 자듯 몽롱했다.

일단 인쇄소에서 지수님을 만나기로 했으니, 용산에서부터 고가도로를 넘어 삼각지역으로 향한다.

그런데 이게 문제였다.

우리는 인쇄소라기 보다는 종이의 재질 종류를 보기 위해 갖가지 종이를 파는 상점을 가기로 한 것이었고, 그 장소는 을지로였다.

그런데 내가 전날 몽롱한 상태에서 장소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인쇄 = 충무로 이것만 생각하고 내맘대로 충무로 역에 내린 것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먼저 도착한 나는 여유로움을 느끼며, 배려하듯 지수님에게 8번 출구로 오라는 카톡을 남기고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나 어느 새 강렬한 여름 햇빛으로 변해있는 그 하늘을 더이상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덥지? 갑자기 한여름이네."


지수님에게 카톡이 왔고, 동시에 나는 약속장소의 위치를 지도로 확인했다.

걸어서 13분. 가까운 역은 충무로가 아니라 을지로4가역으로 표시되었다. 그리고 약속 장소는 역이 아니라 그 종이를 파는 지류가게 였다. 갑자기 일찍 온 자에서 지각자로 신분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네이버 지도로 꼬불꼬불 나오는 길 안내를 따라 걷기 시작하는데 여간 헷갈리는 게 아니었다.

방향을 잘못 가고 있어서 오락가락 하다가 안되겠어서 나는 자리에 멈춰 서서 다시 지도를 보기 시작했다.

지도와 눈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옆에서 왠 머리가 희끗한 중년 어르신이 말을 걸었다.

"어디 가세요?"

순간 나는 멈칫하며 경계하는 태도를 취했다. "어 뭐지?"

중년 어르신은 내가 들고 있는 핸드폰 가까이 얼굴을 갖다 대시더니 안경을 머리 위로 젖혀 올리고는 진지한 눈으로 지도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혹여나 이 분이 진짜 나한테 길을 알려주려고 이러는 걸까? 하는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혹시 요새 다이어트를 해서 그런가? 그 와중에도 몹쓸 의심병은 발병을 했다.  


한 예순 중반은 되보이는 그 어르신은 안보이는 눈으로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집중했다.

급기야는 크고 작게 지도를 확대, 축소해가며 중구청을 중심으로 현재 위치와 목적지를 비교해 주셨고, 최종 어디로 가면 된다는 해답을 내려주셨다.

그리고는 두말 없이 바로 사라지셨다.



경계태세를 취하며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던 나는 그 분의 순수하고 진지한 태도를 보고, 지나온 과거의 일들을 돌이켰다.

아 이런 친절이 정말이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였다니. 생소했다.

나는 오랫동안 불친절에 익숙해져 있었다.

사람을 경계하며 의심을 품고 살았다.

그게 내 주변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것들이었기에, 그러한 친절을 보고도 몹쓸 의심부터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친절이 이렇게 내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 중년 신사의 친절함이 이끈 길로 차근 차근 걸어가다 보니, 드디어 찾던 가게가 나왔다.


피곤함으로 굳어버린 근육들이 부드럽게 풀어지며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지수님!"

먼저 와 기다리던 반가운 얼굴이 나를 맞는다.



친절했던 두성종이 인더페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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