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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의 엄마

by 클라우드나인

어느 여행지든 마찬가지지만, 엄마와 둘이 여행을 다닐 땐 엄마를 더 발견하게 된다. 엄마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내가 너무 익숙해 알아채지 못하던 것들이 은근히 떠오른다.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가 더 선명해진다.


나는 원래 충동성이 매우 매우 높은 사람이지만 엄마랑 여행을 갈 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계획형 인간이 된다. 엄마의 시간이 나의 시간보다 아깝다. 좋고 행복한 기억이 힘들고 당황한 기억보다 훨씬 많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현지에서 그냥 길에서 흘려보내는 시간이 없도록, 당황하고 뭔가를 해결하느라 엄마에게 괜히 짜증을 내는 시간이 없도록 말이다.


엄마는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다. 내가 여행하면서 엄마한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엄마, 지금 힘들지!', '엄마, 지금 덥지?' 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항상 '아니~~ 좋은 것만 하고 놀기만 하는데 뭔가 더워'라고 한다. 객관적으로 힘들 수 밖에 없는 상황, 더울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엄마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차라리 힘들다, 덥다 얘기해주면 좋을텐데 엄마의 참을성은 우리가 모든 일정을 끝내고 숙소에 돌아가서야 끝난다. '힘들긴 좀 힘든데, 그 정도는 당연히 여행하는 데 힘든거지~'라는 엄마를 보며 엄마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더 세심하게 살펴야지 생각하게 된다.


또 엄마는 가끔 정말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때도 잘 기다려준다. 갑자기 비행기를 놓쳐서 경유지에서 자게 될 뻔한 상황, 숙소가 너무 참담하게 안 좋아서 예약한 내가 미안해지는 상황, 갑자기 비가 퍼부어서 다 젖는 상황 등 내가 철저하게 준비한 틈을 파고들어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상황들에서도 엄마는 묵묵히 기다린다. 웬만하면 당황하거나 긴장하지 않는 나는 그런 상황이 닥칠 수록 침착해진다. 항상 최악을 먼저 생각하는 습관 때문일까, 당황스러운 상황이 와도 큰 어려움 없이 침착하게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나와 다르게 엄마는 속으로 걱정하고 또 걱정했을텐데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오히려 나의 당황과 좌절을 품어주기 위해 불행이 닥쳐오기 전과 똑같은 태도로 기다린다.


엄마는 항상 배운다. 엄마는 모든 것에서 배운다. 사람을 볼 때 단점을 잘 찾아내는 나와 달리 사람의 좋은 면만을 위주로 보는 엄마는 여행 중에 만난 모든 사람에게서 배울 점을 찾았다. 발리 여행 중에 만난 '간디'라는 이름의 가이드, 음식을 서빙해주던 서버, 우리의 운전을 담당해주던 택시 기사까지. 누구는 정말 친절하게 사람을 대한다, 누구는 환하게 웃는 낯이 사람 기분을 좋게 한다, 누구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존중이 묻어 있다 등등. 너무 좋은 면만을 보려고 하는 것 같아서 가끔 짜증이 올라올 때도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진심으로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서 기어코 배울점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엄마는 경험과 배움에 열려 있다. 엄마 나이대의 사람들, 아니 많은 사람들은 배움에 마음을 열고 있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아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며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일 것이라고 정당화한다. 나의 신념, 아니 강한 생각에 반하는 것들이 하는 얘기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엄마 또한 본인의 강한 신념과 관련해서는 완고한 측면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편견없이, 기꺼이 배우고자 한다. 해보지 않은 것에도 과감하게 도전하기도 한다. 내가 가보지 않아서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있을테지만 그 새로움이 주는 긍정적인 면에 집중한다. 나는 일상, 특히 여행에서 엄마에게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싶다. 내가 보지만 엄마는 아직 보지 못한 것들을 나의 시선에서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엄마는 손사래를 치는 대신 즐거운 마음으로 내 옆에 와서 선다.


이런 엄마를 보고 있으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당연히 옆에 있는 가까운 사람한테 항상 같은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쉽지 않다. 매 순간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금방 내가 찰나에 느낀 감정이 겉으로 튀어나온다. 엄마도 태어날 때부터 참을성이 뛰어난 게 아니라 계속해서 마음을 다스리는 거다. 우리가 그냥 생각해볼 때는 인간이 태어나서 나이가 들고 늙을수록 지혜롭고 현명해져야 말이 되는 것 같다. 나이를 먹은 만큼 본 것도, 들은 것도, 경험한 것도 많아지니까 내면은 더 단단해져야 말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실상은 나이가 들수록 나의 목소리만 듣는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다른 배움을 구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려면 나부터가 단단하고 높은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 엄마는 나이를 잘 먹고 있다. 진정으로 나이가 든다는 게 어떤 건지 나에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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